[Opinion] 평균율의 존재들 : 정영수 소설 '내일의 연인들' [도서]

어렴풋하지만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들
글 입력 2020.11.1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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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하지만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들



타인을 일종의 시공간적인 지점 혹은 ‘세계’로 상정하여 감각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한 시절이나 일생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세계’에 몸을 담그던 희미한 기억을 통해 여러 빛깔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두 사람의 세계], [서로의 나라에서],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기적의 시대], [길을 잘 찾는 서울 사람들]... 마지막에 언급한 작품에서 ‘나’는 도로 위의 자신이 향하는 곳과 타인의 방향성에 대한 혼란을 서울이라는 과밀한 공간의 무지향 안에서 언뜻 가리킨다.

 

이런 식의 어렴풋하지만 없다고는 하지 못할 인식의 순간이 소설 곳곳에 있다.

 


어떤 화자가 신뢰감을 준다는 것은 그가 잘 배울 줄 안다는 것이고, 그의 능력은 제 무능력을 깨닫는 고유한 방식에 있다는 것.

 

_해설, p.216

 


신형철 평론가의 이 말은 믿음직한 서사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진실들과 나란히 놓고서 바라볼 만하다. 이는 어떤 일-정영수의 소설 속에서는 대개 연인(혹은 그와 비슷한 관계) 사이의 관계 형성과 소멸-을 겪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인물들이 일련의 일을 겪고 난 후 잔존하는 감정의 부유물들을 통해 여전히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알지 못함’ 자체를 알게 된다는 건 얼마나 아득한 앎이며, 동시에 성숙이라는 고행의 조건이란 말인가.

 


성숙한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배우면서 화자는 한걸음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_해설, p.220

 


 

평균율의 존재들



더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 결정적인 순간 기존에 자신의 판단을 거두는 이들이 보인다. 삶은 계속되는데 그들의 선택은 유보된 것이라 여겨지고 심지어는 그 유보 자체를 선택한 것처럼 느껴진다. 타인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외로움이나 고독을 깨치는 이들은 끝이 날 모든 것에서 내일을 본다.

 

그들이 알게 된 알지 못함은 좌절의 여러 변주가 아닌 평균율의(well-tempered) 반복 재생에 가깝다. 평균율은 순정률이 가진 불협화를 극복하기 위해 각 음을 균등한 협화로 나누는 것인데, 이렇게 느끼기 어려울 정도의 미분음을 조금씩 나누며 근접하는 불균형의 균형은 삶의 독특한 조율법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섬세한 ‘자기’의 조율사여야 하고, 자신에 대한 음감을 정밀하게 안고 가야 한다. 이 과정 중 타인이라는 미분음은 우리를 순정(률)이 아닌 평균(율)에 수렴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정밀한 오차를 안고서 연주가 되는 건 오히려 나와 타인을 향한 협화라는 것이다.

 

알지 못함을 알게 되면서 내일의 연인들은 좀 더 외로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성숙의 다른 말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우스운 과거 대신 불행을 매개로 이어져 있었고 서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불운을 상기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운을 떠올리는 일은 서로를 연상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만나지 않게 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은 아마도 끝을 기약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이어질 것이었다.

 

_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p.118

 

 

 

조원용 컬처리스트.jpg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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