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롤링페이퍼 포비아 [사람]

사소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숨겨온 포비아가 있나요?
글 입력 2020.11.1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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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일기를 쓰질 않았네요. 시간이 없어서, 하루의 일상을 기록할 만큼 뚜렷한 자국이 남은 날이 아녔기에, 핑계는 끊임없이 생각이 납니다. 지난겨울엔 날마다 기록을 하곤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상세하기 기록하진 않았지만, 그날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자 꽤 두꺼웠던 일기장을 항상 들고 다녔습니다. 그래선지, 일기는 저녁에  써야한다는 혼자만의 고정관념이 깨졌습니다. 감정이란 것들은 예기치 못하게 불쑥 방문한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아챘습니다.

 

평소에 표현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기 덕분에 어딘가에 속마음을 풀어버릴 곳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보지 못해도 각기 다른 시간의 내가 읽어주고 위로와 공감을 해준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분명 펜을 잡은 사람은 한 명이지만 그걸 읽고 눈물을 흘리거나 웃어주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일기는 편지 같습니다. 수취인불명을 희망하며 쓴 작은 소망 모음집.

 

그런데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은 긴 학창 시절의 이야기까지 끄집어내면서 말이죠. 지금부터 쓸 이야기의 시작은 몇 달 전 받은 한 편의 롤링페이퍼로부터 시작합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잠깐의 시간 동안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면 쓴 짧은 글들입니다. 호흡은 짧지만 특색있고 재밌는 소설집처럼 롤링페이퍼는 어느 편지보다 강렬하고 강한 충격을 줍니다. 그게 좋든 나쁘든 말이죠. 편지의 DEAR가 많다 보니 TO의 심리상태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에 조금 더 집중을 하지 이걸 받는 사람의 상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인사라는 아름답고도 애잔한 말이 독이 될 수도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입니다.

 

 

phobia 공포증

 

공포의 감정이 강박적으로 특정대상에 결부되어 행동을 저해하는 이상반응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쉽게 말하면 두려워 하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사람과 상황에 따라 형태도 일정하지 않아 동사가 될 수도, 명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포비아는 동물공포증, 고소공포증, 폐소공포증이 있습니다. 어릴 적 친구는 고소공포증과 폐쇄공포증이 둘 다 심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습니다. 무섭다는 감정은 자주 느껴봤지만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친구의 사색이 된 얼굴에 손을 잡아주었던 저의 손엔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있었습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와 있었을 뿐인 상황이었지만, 그때의 전 제가 타인의 두려움을 공감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순수하지만 이기적이었고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했지만, 선택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본능 또한 깨어나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별다른 공포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알레르기도 없고 선천적으로 큰 불편함 없이 태어나 매일 같이 감사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싫어하거나 징그러워하는 동물도 딱히 없어 무언가 존재 자체만으로 두려움을 느낀 경험은 생소하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그런 제게 상상만으로도 두렵게 느껴지는 유일한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롤링페이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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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페이퍼 포비아'라는 글의 제목은 제가 임의로 만든 말입니다. 롤링페이퍼는 모임이나 어떤 집단에서 서로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친밀감을 보여주기 위해 행사를 마무리하는 시간에 등장하는 행위입니다. 다들 한 두번은 해보셨을 겁니다. 꽤나 재밌고, 꽤나 감동적이며 그리고 감정이 보존된다는 건 정말 소중한 가치라 몇 번의 기억들이 기억에 남으실 겁니다. 저에게도 몇 번의 기억에 남는 롤링페이퍼가 있습니다. 사소하면서도 정말 사소한 일상의 일부분이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는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학창 시절의 저는 혼자 조용히 공부하고 있는 게 가장 편안했습니다. 전교 1등이라거나 공부를 굉장히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것을 하고 있는 그 상황이 굉장히 만족스러웠던 것입니다.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것도 좋고 가끔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이 불편해지기 전까지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일탈을 선망 하나, 막상 해버리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다시 원하게 됩니다. 그래도 성인이 되고 나서는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찾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알아가며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한 일탈을 필요하지 않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그게 참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상황에 관계없이 싫으면 싫다고 무조건 말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니깐요.

 

자습시간이면 반은 항상 시끄러웠습니다.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친해지는 게 더 급하고 즐거운 아이들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근데 그때 전 그게 참 이해가 안됐습니다. 쉬는 시간에 놀고, 방과 후에 놀면 되지 왜 지금도 시끄럽게 굴면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

 

물론 그 아이들이 저를 괴롭히기 위해 시끄럽게 행동했을 리는 없습니다. 단지 전 누군가를 비난하면서까지 시끄러운 상황이 싫었고, 당시의 전 소리 높여 표현을 했습니다. '조용히 좀 해라'라고.

 

뭐 특별한 상황이 아니죠? 그렇지만 서른 명 중에 그 말 한 문장을 공감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면, 그리고 그게 화자라면 상황은 무척이나 곤란하게 흘러갑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저는 학기가 끝날 때까지 그런 샤우팅을 몇 번이나 더 했고 어느새 방학이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물론 제 기준입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대회도 준비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반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다른 반 친한 친구들과 모여서 공부도 하며 나름대로 즐거움과 미래를 위한 실리를 챙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항상 마음이 제일 편한 곳은 저의 반이었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집이라는 생각은 했으니깐요. 학기 마지막 날 선생님의 의도로 반 애들끼리 롤링페이퍼를 작성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친한애들이 많지 않았어도 정겨운 마음에 정성껏 아이들의 이름 주변으로 짧은 편지를 썻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어. 더 친해지지 못해서 아쉬웠다. 등등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굉장히 형식적이었지만 의외로 진심이 담긴 그런 말들이었거든요.

 

적지 않은 수의 종이를 채우며 슬슬 제 종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그런 매력이잖아요? 남의 것을 쓰면서도 남이 내 종이에 어떤 내용을 적는지 보고 싶은. 그렇게 몇 번의 종이를 넘기자 드디어 제 종이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잠깐이나마 제 생각을 하며 몇 문장을 새겨넣었다는 종이가 말입니다.

 

가슴이 벅차며 위에서부터 한 문장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몇 문장을 읽고 난 후 교실 안에 적막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분명 아이들은 시끄럽게 떠드는데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누군가 곁눈질로 저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종이엔 모진 말들 뿐이었습니다. 간단한 욕설도 있었고, 짧은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긴 글은 없었고 구체적인 비난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짧은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날아왔습니다. 옆, 뒤로 앉아 있는 친구들은 꽤나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참 무서웠습니다.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모습이 그렇게 가증스러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요.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은 후 쉬는 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저에겐 그 롤링페이퍼에 대해 반박하거나 슬퍼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종이 한 장엔 수많은 눈이 있었고 전부 저를 응시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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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롤링페이퍼를 생각하면 두렵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람과의 인간관계도 결과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어떤 글을 남겨줄까에 대해서 매번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아이들은 아마 저에게 큰 분노나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롤링페이퍼의 특성을 잘 활용한 것이죠. 익명의 편지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글에서 발견하면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어차피 발신자로서의 책임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수신자의 감정 따윈 고려대상이 될 이유가 없죠. 적당히 싫었던 애한테 할 말을 하기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수년 동안 트라우마로 남은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괜히 불편했습니다. 언제나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은 좋은 이미지를 쌓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대학과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저를 편견없이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롤링페이퍼를 기억 속에서 조금씩 지워갔습니다.

 

스물 두 살이 되자 입대를 했습니다. 초반엔 적응을 참 못했습니다. 훈련소에선 한 달 뒤에 헤어질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이 들었고 자대배치를 받은 후엔 삼재가 꼈나 싶을 정도로 매달 크게 다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19개월이라는 기간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조금씩 정을 줘가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갔죠. 결국 전역 한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훈련소 동기와 며칠 전 식사를 했습니다. 동기들과는 꾸준히 연락도하고 가까운 곳으로 mt를 갈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전역하기 일주일 전부터 부대에서 '롤링페이퍼' 비슷한 걸 했습니다. 당사자는 전역날 받게 되고 동기, 후임 가리지 않고 암암리(?)에 다들 하고 싶은 말을 적습니다. 차라리 안 좋은 말이 적혀있는 것보단 빈칸이 많기를 바랬습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졌다 해도 과거의 기억은 아직도 제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전역날이 왔고, 응원과 함께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며 미운 정 들었던 그곳을 떠났습니다. 우체국에서 짐도 붙이고 커피도 한 잔 마시니 전역날 아침은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야 저의 롤링페이퍼를 펼쳐볼 수 있었습니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귀여운 글들이 많았습니다. 자주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추천해줬던 책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후임, 19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항상 곁에서 함께해줘 고마웠다는 동기들. 이번 롤링페이퍼에서도 아마 그들은 큰 책임감을 갖고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안 볼 수 있는 사람이고 하고 싶었던 말을 쓸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감정보단 자신들의 감정에 솔직한 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롤링페이퍼의 발신자들과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참 비슷할 텐데 어떻게 이렇게 결이 다른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인간관계에 대해서 성장했을 수도 있고, 저와 궁합이 잘 맞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일 수 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친구들 덕분에 혼자서 두려워했던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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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다면 사소한 공포증이지만 그늘에서 벗어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공포증, 포비아라는 것은 지나치게 개인적이면서도 지독해서 쉽게 벗어나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남들은 모르는 포비아라면 말하기도 꺼려지죠. 오늘 이 글을 통해 여러분들의 포비아는 어떤 것이 있는지 주변 사람들과 한 번 나눠봤으면 좋겠습니다. 혼자서 몇 년을 끙끙 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긴 너무 유치하고 개인적이라는 생각때문에요.

 

저는 이번이 두 번째 고백입니다. 첫 번째는 우연히 친한친구에게 말해줬습니다. 대학친구인데 제 말을 듣곤 심각하게 들어주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 상상이가지 않는다면서요. 여러분들도 각자의 포비아가 있다면 한 번 용기를 갖고 주변에 말해보시길 바랍니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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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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