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잘하지 못함에도, 그럼에도 [영화]

묵묵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글 입력 2020.11.06 20:2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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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십 번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삶이지만, 학교라는 소속과 큰 이별을 앞두고 다시 한번 인생의 중요하다 싶은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다. 그런 기분이 들 때쯤, 심심찮게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2013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시작은 학교의 인기남,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둔다는 소문이 떠돌면서부터 시작된다. 보다 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이 영화엔 키리시마가 그 어떤 모습으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학교의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던 키리시마라는 잘난 인물의 부재로, 가깝고 먼 방식으로 그와 관계 맺던 학생들의 혼란만이 이 영화 속을 헤맨다.

 

누군가는 키리시마가 활동하던 배구부 *리베로 포지션을 메꾸게 되고, 누군가는 그런 세컨드 리베로를 보며 재능이 없는 자의 한계를 보게 된다. 키리시마라는 인물이 가진 명성을 좋아했던 여자아이와 그녀를 따르던 친구까지, 키리시마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던 인물들에게마저 저마다의 교차점으로 인한 균열이 생긴다. (*리베로libero : 축구와 배구에서 선수 포지션을 나타내는 용어로 수비수의 일종)

 

종례 시간, 반 아이들은 모두 진로희망 조사서를 받는다. 그중엔 히로키도 있다. 히로키는 야구부 주장인 선배가 찾아와 대회에 참가해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로, 재능 있는 야구부 부원이었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야구부를 그만둔 상태다. 선배의 부탁에도 야구부엔 일절 엮이지 않으려는 히로키는 여전히 야구부의 가방은 메고 다닌다. 히로키는 무던하다. 진로희망 조사서를 접는 손짓도, 여자 친구에게 건네는 말투도, 키리시마가 배구 연습이 끝나길 기다리며 농구를 하던 몸짓도, 대체로 그는 무던해 보인다.

 

그러나 키리시마가 갑자기 잠수를 탄 이후, 더 이상 키리시마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 히로키는 농구를 하는 이유를 잃게 되고, 재능이 없는 야구부 선배가 밤새 죽어라 연습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촌스럽고 매니악한 좀비물을 찍겠다고 하는 영화부 부원 료야를 마주한다. 평온한 호수 같던 히로키의 눈동자엔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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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키는 어느 날 야구부 선배에게 묻는다. 3학년인 선배는 왜 다른 선배들처럼 은퇴하지 않는 거냐고, 그러자 선배는 말한다.

 

 

- 신인 선발 끝날 때까진 하려고.

 

- 주장에게 스카웃 제의가 온 적은-

 

- 한 번도 없어. 없었지만, 신인 선발 끝날 때까진.

 

 

내신에도 들어가지 않는 동아리라는 집단에서도, 재능은 존재한다. 조금 더 재능이 있는 자와 덜한 자. 배드민턴을 할 때 스매쉬가 강할 수밖에 없도록 타고난 팔근육과 그렇지 못한 팔뚝. 키리시마가 없어진 배구부에서 그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 남자아이는 이내 자신이 키리시마의 빈 구멍을 완벽히 메꾸어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기에서 패배한다. 물론 패배에는 여러 요인이 있고 그것이 온전히 남자아이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모두가 키리시마의 재능으로부터 결핍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나지도 못하고, 시합에선 패배하고, 대입을 앞둔 시기에 왜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하고 있냐는 히로키의 눈빛에도 이들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저, 당장 확언할 수 있는 건 계속할 것이라는 말뿐이다.

 

 

엄청 열심히 했는데 말이야, 코이즈미. 하지만 결국엔 지는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무엇을 위해 열심히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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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시마가 학교 옥상에 나타났다는 소식에 그를 찾기 위한 학생들이 학교 옥상을 뒤집어 놓는다. 덕분에 그곳에서 좀비물을 찍던 영화부의 촬영 현장까지 망가져 버렸고, 모두가 떠난 후 영화부의 감독인 료야는 그 현장을 부원들과 묵묵히 치우고 있다. 히로키는 떨어진 카메라 소품을 료야에게 건네준다. 돌아가려는 찰나에 히로키는 료야에게 왜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지 묻는다.


 

- 필름에는 디지털로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고. 뭔가, 특별한 힘이랄까 … 좀 설득력이 없었나?

 

- 만져봐도 돼?

 

- 그래

 

- 진짜 지저분하네.

 

 

히로키는 카메라로 료야를 찍으며 묻는다.

 

 

- 여배우랑 결혼할 건가요? 아카데미 수상도 하나요?

 

- …뭐 그럴 일은 없으려나. 영화감독은 무리야.

 

- 그럼,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카메라로 영화를 찍는 거야.

 

- 그건, 음… 아주 가끔씩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랑 지금 우리가 찍는 영화가 연결됐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 정말 아주 가끔이지만 그게 그냥 좋으니까. 

 

 

그 말을 듣던 히로키의 눈동자엔 눈물이 차 그 물결이 거칠게 흔들린다. 히로키는 울먹이는 눈으로 그 자리를 뛰쳐나와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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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데에 그럴듯한 이유를 달지 않고, 혹은 재능이나 실력을 재지 않고 무작정 뛰어들었던 과거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땐 도대체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이 너무 바래져서 알 수가 없는데, 요즘도 그런 친구들을 주변에서 목격하곤 한다. 어째서 저 친구는 확신할 수 없는, 아무것도 모르겠을 일에 저렇게 온전히 열중할 수 있는 거지.

 

때로는 나에겐 비밀로 해놓고 본인만 알고 있는 아주 확실한 길의 보증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닐까, 하며 혼자 질투에 눈이 멀기도 했다. 근데 이젠 그게 아니란 걸 어렴풋이는 안다. 그들은 확실한 보증은 없지만, 키리시마 없이도 나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연결점을 찾아 이었구나. 설령 그 연결의 끈이 터무니없이 설득력이 부족한, 허술한 끈이라고 해도 말이다.

 

‘왜’라는 질문 앞에서, ‘잘해서’라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긴 터널을 걷고 있다. 재능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결핍을 알면서도 그들은 우주 어딘가의 작은 연결 따위를 믿으며 가는 수밖엔 없는 거다. 히로키는 왜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잘하지 못하면 각박해지려 하는 지금의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결말을 지었고, 그렇게 용기를 얻는다.

 

 

[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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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  
  • Ggomi
    • 본 적이 없는 영화지만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을 느낍니다.. 내가 잘하는게 뭔지, 도대체 있긴 한건지, 앞으로 뭘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요즘 역시 묵묵히 무언갈 하는게 해야 할 일이겠죠. 조만간 시간내서 영화가 꼭 보고싶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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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onge
    • 마치 출발비디오여행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맨날 포스터로만 봐오던 영화였는데 이렇게 소개글을 보니 영화가 궁금해져 빨리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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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hsu.bag
    • 끝까지 다 읽고 저에게 주는 큰 용기가 있네요! 재능이 없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영화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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