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한밤중의 불청객을 대하는 법

무력감 앞에서의 ‘글’과 ‘당연한 것’들에 대해
글 입력 2020.11.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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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이 찾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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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무력감은 보통 눈 뜬 밤에 찾아옵니다. 생각이 많아져 잠들 수 없는 시간에 찾아온 불청객은 참 무례해요. 지금의 나를 제 입맛대로 평가하고, 과거의 나를 재단하며 단정 짓고, 미래의 나를 그리지 못하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런 잡념의 순간들이 길어지는 것 같아요. 불안함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동요가 갈수록 커지거든요. 이런저런 잡념이 나를 잠깐만 괴롭히다가 떠나버리면 좋을 텐데, 불청객씨는 사람을 잠에서 깨우는 걸로 모자라 마음속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놓고 홀연히 떠나버릴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러면 저는 거기에 쳐 박혀서 밤을 지세죠. 밤새 구덩이 속에서 소위 말하는 '삽질'이라는 걸 합니다.

 

흑역사가 떠오르고, 내 말과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판단하게 되고,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인지 점검하고, 체크리스트를 일부터 십까지 만들어 하나하나 검토하고, 주변과 나를 비교하고, 그러다 보면 이렇게 살아서는 ‘당장 내일, 한 달 뒤, 일 년 뒤, 십 년 뒤에도 똑같이 '삽질'하고 있겠구나.’라는 무기력함이 온몸을 덮쳐요. 죽고 싶죠. '내가 뭘. 어떻게?'라는 질문에 대해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문답을 하다 보면 어느새 빛의 흔적이 창문 새로 들어옵니다. 그럼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죠. "아-, 오늘 하루는 망했구나."

 

그렇게 아침에 겨우 잠들어서 오후에 일어나거나, 혹은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피곤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던, 늦은 시간에 일어나던, 하루를 망쳤다는 건 똑같아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이 나의 하루를 망치는 건지, 뭘 해도 소용없을 거라는 마음이 나의 하루를 망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둘 다겠죠? 무력감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간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져요. 해야 할 일도 하기가 싫어 미뤄버립니다. ‘나 이거 못하겠어. 이거 내가 해서 뭐해?’라는 못된 마음을 가지고요. (물론 이에 대한 수습과 후회는 온전히 제 몫입니다. 나쁜 습관이죠.)


 

 

순간의 마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기록


 

다시 밤이 찾아옵니다. 피곤함에 함락되어 기절하듯 잠들어버리면 좋으련만, 불청객은 또 찾아와요. ‘오늘 내가 한 게 뭐가 있지?’라는 질문과 함께요. 무력감씨가 찾아온 새벽,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정리가 잘 안 돼요. 한밤중에 찾아온 감정은 언제나 나를 이겨요. 그가 가져온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력감이 가져온 무례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만한, 그런 기록을 해놓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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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의 제가 휴대폰에 남긴 메모입니다. 시간 보이시나요? 오전 4시. 제가 ‘글’과 친해진 건 아마 저 때 즈음인 것 같네요. 도대체 내가 여태까지 뭘 했는지에 대해 밤새 괴로워하다가, ‘그럼 평소에 뭐라도 써놓자!’라는 다짐을 한 순간입니다.

 

물론, 당장 그 날부터 기록광이 되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메모장이나 SNS에 언어의 파편들을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주로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짧게라도 조금씩 쓰다 보니까,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지는 날에는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던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고 있네요. 이제는 그래도 글과 조금은 친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거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거나 하면 곧잘 기록합니다. 나중에 보면 조금 창피하기도, 오글거리기도 하는 마음이라도 꼭꼭 적어놔요.

 

글과 가까워지면서, 새벽의 무력감에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불확실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 이전에 썼던 글들을 봅니다. 긴 글도 좋고, 한 문장의 짧은 글도 좋아요. 그 기록을 하던 순간에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떠올려봅니다. 그러면서 깨달아요. 이전의 내가 무력하지 않아서, 지금에서야 무력감에 젖는다는 걸. 지금 내가 뭘 해도 소용이 없다고 느낀다는 건, 내가 이전에 무언가를 해왔기 때문이거든요. ‘글’은 내가 이전에, 혹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무얼 하고 있냐에 대한 기록이자 증명입니다.

 

이때 무얼 했고, 어떤 생각을 했고,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 모든 걸 알려주는 게 글이라고 생각해요. 먼 미래에 다시 과거의 글을 보면서, 그때의 마음을 다시 맞닥뜨렸으면 합니다. 그때의 그 시간을 상실하고 싶지 않아서, 순간의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저의 글을 박제하는 가장 큰 이유예요.

 

 

 

새로운 마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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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글’로만 무력감을 이겨낸다는 건 거짓말이고, 하는 것들이 또 있어요. (기분이 진창에 박혔는데 전에 쓴 글 하나 읽었다고, 지금 글 하나 쓴다고 갑자기 하늘을 나는 기분이겠어요?) 뭐냐면, 일단 눈 뜬 밤의 불청객이 제 마음속 문을 두드리면 애써서 헤쳐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그냥 그 무력감을 머금고, 그 선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합니다. 주변에 있는 당연한 것들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줍니다.

 

무력감이 찾아온 날에는 오후에 일어나거나, 혹은 잠을 자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앞에서 말했죠? 그럼 저는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하루 종일 누워서 노래를 듣고, 창가에 걸어둔 썬 캐쳐가 머금은 빛 조각을 몇 분이고 바라보고,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면 샤워를 하고, 달달한 디저트와 카페인을 머금고 습관적인 넷플릭스 시청을 합니다. (물론, 이런 일상이 가능한 날은 주말뿐이에요!)

 

요즘에는 주로 <프렌즈>를 보는데, 정신없는 여섯 친구들의 일상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요. 부럽기도 하고. 그러다가 기운이 좀 나면, 서늘한 공기를 머금은 바깥세상을 만나러 갑니다. 잔잔한 하늘과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온도를 보고 있으면 ‘그래도 세상은 돌아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기에 좋아하는 노래까지 곁들이면 그 시간이 바로 최고의 순간이 된답니다.

 

살풋이 피부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간간히 들리는 말소리, 귓가에 울리는 샴페인 슈퍼노바, 윤슬처럼 반짝이는 구름 별. 이렇게 글로만 쓰는데도 마음이 벅차오르네요. (근데 이건 제가 ‘금사빠’라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 저는 항상 사소한 것들에 흥분하고, 어떤 대상에 대해 쉽게 애정을 품거든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러다 보면, 뭔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요. 사실 이 감정이 어떤 건지 설명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웹툰 <고래별>에서 이런 대사를 봤어요. "새로이 곱씹어보면서 다시 알게 됐어요. 어떤 마음의 시작은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는구나."

 

맞아요. 정말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것들이, 놀랍게도 새로운 마음들을 가져다줘요. 그 대상이 좋아하는 노래일 수도 있고,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일 수도 있고, 걷다가 문득 올려다본 하늘일 수도, 반가운 사람들과의 연락일 수도 있어요. 이밖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것들이, 무력했던 나를 끌어올려줘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라 차마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없는 것들을,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감각. 그 감각은 저에게 새로운 마음을 불어넣어줘요.

 

그래서, 저는 불쑥 찾아온 무력감 앞에 ‘글’과 ‘당연한 것’들을 내세웁니다. 힘이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 그 전에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글’로 확인하고 주변의 ‘당연한 것’들을 통해 새로운 마음을 얻습니다. 아마, 이 글이 제가 아트인사이트에서 쓴 것들 중 가장 솔직한 글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더더욱, 시간이 흘러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무력감이 저를 덮칠 때 즈음 다시 이 글을 꺼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기록에 담긴 마음이 나중의 나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이 글을 읽으면서 크게 웃을지도 모르겠네요. 참 어렸다면서. 그래도 미래의 나에게 가닿는 이 글이, 지금의 마음을 온전하게 전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더 많은 시간을 스쳐간 내가, 어렸던 지금의 나로 인해 새로운 마음을 얻을 테니까요. 그리고 지금의 나를 둘러싼 당연한 것들이, 훗날의 저에게도 남아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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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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