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두가 꿈꾸어야 할 공동체; 우리는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다2 [영화]

글 입력 2020.11.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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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우리'라는 이름 아래 획일화를 요구하고 '같음'에 대한 지나친 동경과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같은 이념과 가치를 공유하고 소속감의 기반이 되는 ‘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 성찰이 부재하다.

 

개성을 말살하고, 하고 싶은 말을 아끼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공존할 수 있는 건지. 획일화가 함께 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인지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의문을 던진다.

 

 

 

1.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1980년대는 아직 파시즘적 전체주의의 상흔이 남아있는 시대이자,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가 예고되고 있던 시대이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는 각기 다른 정치경제적 배경하에 생성되었으나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제작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유사했다.

 

이러한 근대 동일성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도래된 ‘차이’의 철학의 경우도 그 태도의 이면에는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동일하게 존속하겠다는 동일성의 철학 여전히 깔려 있었다. 한마디로 한 개인과, 그 개인이 형성된 작은 공동체들도 '작은 전체주의'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그에 속하지 않은 개인들은 철저하게 타자로 취급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는 1986년 <무위의 공동체(La communauté désœuvrée)>을 출간하여 새로운 공동체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전체주의와 전체주의적 '내재성'을 지닌 개인에 대해 비판했다.

 

인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끊임없이 공동체를 만들어 왔고, 그 공동체는 개인과 단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다양한 차이를 지닌 개인들을 하나의 동질적인 사회적 집단으로 결속시키는 과정엔 필연적으로 배타성이 수반할 수밖에 없다. 집단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는 것은 우리라고 불리는 영역의 안과 밖, 우리와 타자의 뚜렷한 경계 지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이념을 강요하며 배타성을 합리화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획일화의 산물일 뿐 낭시가 주장하는 공동체는 될 수 없다.

 

장 뤽 낭시가 말하는 '내재성'이란 자신의 존재를 위해 더 이상의 다른 존재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요소로서 절대적으로 고립된, 닫힌 체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낭시는 이 내재성이 개인주의, 더 나아가 전체주의와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고 본다. 내재성을 지닌 개인은 모든 사유적 물음과 답변이 자기 안에서 시작되고 완결되기에, 개인은 자신의 내부에만 닫혀있는 절대적인 체계를 공고히 하고 나라고 규정된 것 이외에 것들은 하나도 들어올 수 없는 폐쇄적인 개인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낭시는 이러한 고립된 개체에 놓인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만으론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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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수많은 공동체들은) 마치 하나의 단일성만 있어야 하는 것처럼 단일한 본질을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

 

_ 장-뤽 낭시(Jean-Luc Nancy)

 


공동체가 차이보다는 단결을, 다양성보다는 전체성을 공동체의 이상으로 지향할 때 제기되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그 대안적 방법을 고민했던 낭시는 ‘작동하지 않는(un-working)’ 공동체, ‘무위의(inoperative)’ 공동체를 제안했다. 이는 고정된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통일성의 이름으로 사라져버린 ‘차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불안정한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한 공동체는 지켜야 할 어떤 정체성도 없기에, 외부적인 또는 이질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으며 오히려 외부자들이 들어올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공동체이다. ‘무위의 공동체’는 어떠한 목적을 위한 관계 맺음이 아닌, ‘함께 있음’ 그 자체가 가치가 된다.

 

 


2.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의 공동체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논문의 필자 김상철과 김진아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등장인물과 사건을 통해 동막골에서 나타나는 공동체의 특징을 장-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그동안의 공동체를 소재로 삼아왔던 영화들은 특정 공동체를 미화하거나 비판하고,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서 일방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특히 적군과 아군이 확연히 구분되는 전쟁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다루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여타의 영화들과 궤를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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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동막골 스틸컷

 

 

"1950년 11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함백산 절벽들 속에 자리 잡은 마을, 동막골. 이곳에 추락한 P-47D 미 전투기 한 대. 추락한 전투기 안에는 연합군 병사 스미스가 있었다. 동막골에 살고 있는 여일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소식을 전달하러 가던 중 인민군 리수화 일행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동막골로 데리고 온다. (…) 목숨을 걸고 사수하고 싶었던 그곳, 동막골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세 사람. 국군, 인민군, 연합군 총을 본 적도 없는 동막골 사람들 앞에서 수류탄, 총, 철모, 무전기 (…)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세 사람은 목숨까지 걸고 동막골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

 

'웰컴 투 동막골'의 등장인물들은 국군, 인민군, 연합군, 그리고 힘이 없는 동막골의 주민들이다. 이들은 인종, 언어, 문화, 사상, 이념, 하나의 공동체로 형성되기 위한 어떠한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이질성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내는 인물들은 다름 아닌 '미친 소녀' 여일, 철없는 어린이들, 힘없는 노인들이다. 이들은 견고한 경계로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배타성 안으로 갇혀있던 외부인들의 벽에 조금씩 틈새를 내, 확고한 정체성을 엷게 만들고 마침내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이것의 정점을 이루는 모습이 영화에서는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이다. 드디어 낭시가 말했던 ‘함께 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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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동막골 스틸컷

 

 

동막골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 안으로 들어오기를 권유하지도, 설득하지도, 교화시키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그저 외부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뿐이었으나 외부자들은 결국 그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인민군 리수화:

“고함 한번 지르지 않고도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은 뭐요?” 

 

동막골 촌장:

“뭐를 많이 먹여야지 뭐”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막골은 인종, 언어, 사상, 이념이 부딪히고 개인적 특성들이 충돌하는, 철저한 갈등의 상황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펼쳐진 공동체는 특정한 동질성을 강요하지 않고, 새로운 외부자가 들어오면 그들과 ‘함께 하며’ 자신들의 세계 자체를 변화해간 공동체이다.

 

우리가 꿈꾸어야할 공동체는 막강한 한 명의 권력자가 위엄 있는 규율로 지배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닌, 아무것도 쟁취하려 들지 않고 함께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무위의 공동체이다. 어떤 관념, 이념,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본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원리, 기준, 이념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3. 우리는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다.


 

개개인의 다름을 도외시하고 공동체가 표방하는 통일된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합하려는 시도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진 않은가?

 

실제 현실을 들여보면 급진적인 이데올로기적 변화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은 가감 없이 버리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기존의 권력집단도, 이에 반발하려는 담론도 포용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 공동체의 양상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규정한 정체성이 그 자체로 순수하고 완벽하다고 평가해 그 자리에 머무르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무언가에 '완성', '완벽'이라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게 오히려 위험한 거 아닌가? 뭐든 수정 가능할 때 생명력을 지닌다고 믿고 있기에, 고정 불변하는 단단한 중심보다는 변화를 전제한 대화가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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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만연한 다름을 그대로를 유지하며 공존할 수 있다.

 

장-뤽 낭시가 말하는 공동체에선 사람이 사람과 함께하는 이유와 목적은 ‘함께 함’ 그 자체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 '너'와 ‘우리’라는 개념은 모두 동시에 공존할 수 있으며, 공동체에 함의되기 위해 나의 다름을 포기하거나 타협할 필요 없다.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지 않으며 타자를 배제하고 다양성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공동체란 개인과 집단을 동일시하는 합일이 아니라, 합일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 실현되는 것이다.

 

참고: 김상철 ( Sang Cheol Kim ),and 김진아 ( Jin A Kim ). "일반논문 :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특징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11.1 (2015): 227-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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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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