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널 찾아낼게, 뮤지컬 '디어 에반 한센 Dear Evan Hansen'

나의 브로드웨이 관극 연대기 01
글 입력 2020.10.2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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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푸르딩딩한 빛이 감도는 포스터 속, 푸른 가로줄 무늬 셔츠를 입은 사람은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 깁스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You Will Be Found”. 놀랍게도, 이것이 뮤지컬 ‘디어 에반 한센’ 포스터의 전부다. 뉴욕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 42번가를 걷다가 이 포스터를 마주했다. 당혹스러웠지만, 호기심이 일었다. 거기다 토니 어워즈 6관왕이라는 정보까지. 당시 아직 자막 없이 영어로 된 무언가를 보고 듣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한국에서 공연되지 않은 뮤지컬을 보는 것이 약간 두려웠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그렇게 나는 뮤지컬 ‘디어 에반 한센’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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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 들어서니 무대 가득 반투명 장막이 여러 개 걸려 있고, 스마트폰으로 보는 SNS 화면처럼 소식들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들어오는 각종 알림 소리가 극장을 채웠다. 여기서부터 이 뮤지컬이 상당히 모던한 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림 효과음이 띵- 하고 들릴 때마다 기대감이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에반은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는 고등학생이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두려운 나머지 원치 않는 말, 엉뚱한 말을 내뱉기 일쑤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겐 말을 건네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갈 생각만 해도 손바닥에 땀이 가득 찬다. 이러니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에반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와 이혼하고 집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런 힘든 시기를 겪는 동안 생계를 유지하느라 바빠서 에반의 곁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엄마.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불안한 에반을 만들었다. 에반은 그런 자신을 “투명한 창문 너머 손을 흔들고 있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람”이라 표현한다. 새 학기 첫 날에도 여전히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심리 상담사가 내준 숙제인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나 적고 있던 에반에게 자발적 아웃사이더이자 학교 내 알아주는 괴짜로 통하는 코너가 나타난다. 코너는 에반의 새하얀 깁스에 자신의 이름을 적으며 살짝 다가오는 듯한 기미를 보이더니, 이내 에반이 쓴 편지에 자신의 여동생 조이의 이름이 등장하자 (에반은 조이를 짝사랑하고 있다) 격하게 화를 내며 편지를 뺏어들고 가 버린다. 에반은 덩그러니 무대에 남는다.

 

그러던 에반에게 느닷없이 커다란 사건 하나가 닥친다. 코너의 자살이다. 코너의 부모님은 코너가 가지고 있던 에반의 편지, 즉 ‘디어 에반 한센’으로 시작하는, 에반이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가 코너의 유서라고 확신한다. 에반이 아무리 손을 내저으며 부정해봤자 ‘코너’라는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힌 자신의 깁스만 코너의 부모님의 눈에 더욱 잘 띌 뿐이다. 결국 에반은 엄마 친구 아들 제라드의 도움을 받아 코너와의 가짜 우정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 이야기는 코너의 부모님과 조이를 넘어 누군가와의 진실한 관계를 바라는 사람들, 어둠 속에 갇혀 누군가의 손길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는다. 그렇게 에반의 인생은 변한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리던 사람에서, 어둠을 딛고 일어나 또 다른 어둠 속으로 손을 내미는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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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에반 한센’을 봤을 당시 나는 유학 생활에 잔뜩 지쳐 있었기 때문에, 이 공연을 통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위로를 받았다. ‘공연장에 휴지를 두 통씩 쟁여 들고 들어갔다’는 다른 관객들의 후기가 공감이 갔을 정도로 많이 울었다. 특히 에반이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노래하는 넘버 ‘Waving Through A Window’와, 에반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 사람들 앞에 서서 힘겨워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넘버 ‘You Will Be Found’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내 마음을 그대로 무대 위로 옮겨 놓은 듯한 장면이었고, 그대로 글로 옮겨 노래하는 듯한 가사였다. 그러나 ‘You Will Be Found’를 마지막으로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이 시작되자 주변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에반의 이야기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디어 에반 한센’이 전하고자 하는 희망이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꽤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였다는 것과 보편적인 감동을 전한다는 사실은 왜 이 뮤지컬이 토니 어워즈에서 6개나 되는 상을 싹쓸이할 수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뿐만 아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어 살아달라는 메시지 외에도 ‘디어 에반 한센’은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껴주는 코너의 가족들에게서 그리웠던 가족의 정을 느끼는 에반에게 섭섭함을 느끼던 에반의 엄마 하이디는 극의 후반부에서 에반의 거짓말에 대해 알게 되고, 에반의 아버지가 떠나던 날 자신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으며 에반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서로의 잘못을 사과하고 부둥켜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 뮤지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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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디어 에반 한센’이 전하고자 하는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고, 극예술 장르에서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 중 하나다. 그렇지만 ‘디어 에반 한센’의 이야기가 진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를 전달하는 방식이 뻔하거나 진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스토리의 전개 방향은 평범할지 몰라도 스토리 자체는 꼼꼼한 개연성으로 잘 짜여져 있다. 그 어떤 부분 하나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또한, 이 뮤지컬은 무대를 가득 채운 스마트폰 화면처럼 굉장히 세련되고 모던한 방식으로 연출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신박한 연출은 이야기에 참신함을 더한다. 마지막으로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인 넘버가 ‘디어 에반 한센’에서는 그 매력을 최대치로 자랑한다. 영화 ‘라라랜드’의 음악을 담당한 벤지 파섹(Benj Pasek)과 저스틴 폴(Justin Paul)이 작사하고 작곡한 ‘디어 에반 한센’의 넘버는 한번 들은 사람도 쉽게 머릿속에 맴돌 법한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시적이면서도 직설적인 가사를 통해 뮤지컬로서의 ‘디어 에반 한센’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반은 파란 하늘을 보면서 미소지으며 말한다. “에반 한센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 될 거야. 왜냐면… 나는 나니까. 그걸로 충분하니까.” 관객들에게, 그리고 그 중 작디작은 한 부분인 나에게 다시 한 번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는 대사였다. 너는 너로 충분하다. 그러니 용기를 내어 나에게 손을 뻗어달라. 그렇게 살아달라. 에반은 관객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디어 에반 한센’은 그렇게 새파란 희망을 전하는 작품이었다. 적어도 당시의 나에게는 흐린 하늘, 가득 낀 구름들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파란 점과도 같은 해방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때로 에반이 전해주던 그 위로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땐 ‘You Will Be Found’를 찾아 듣는다. 그리고 에반의 말이 정말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이면, 끝내 빛이 날 찾아온다는 것을.

 

 

[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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