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허구와 현실, 연극과 인간 - 연극, 웃기는 어둠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과 소격효과기법
글 입력 2020.10.1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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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의 연극이다. 티켓 대신 매어주는 검은 리본을 손목에 달고, 오늘도 지하로 와 앉는다. 그러고 보면 반지하 살이를 벗어난 재작년부터는 지하에 와 앉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구나 싶다. 빛도 아니 드는 이 어두운 지하에 말이다.


티켓 부스를 지나며 연극의 제목을 스윽, 눈으로 훑는다. ‘웃기는 어둠’이라. 벌써 모종 넌센스적인 해석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웃기는 어둠이라. 어둠이 웃기려면, 달리 말해 우스우려면 우선 그 어둠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 제목이 가리키는, 연극 안에서 표상될 ‘어둠’이란 무엇일까. 잠깐 상상을 전개하여 보아도, 어둠에 대하여 직접적인 의미의 유쾌함이란 이미지는 떠오르질 않는다. 만약 그 어둠의 실상이 무엇이 되었건 그리 유쾌한 대상물이 못 될 값이라면, 제목은 이렇듯 벌써 넌센스 하나를 내게 던진다.


그래, 이 어둠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어둠은 웃기는 것인가. 모든 서사 작품의 출발이 제목에 있으니, 나는 아직 한참을 덜 찬 객석에 앉아 제목 하나를 마주한 채 이런 생각을 시작한다. 이 어둠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찌하여 웃기는 것일까.


그때의 내게 물어본 것, 그리고 지금 글을 읽으실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들 기억과 감각의 곳간 속, 어둠으로 상징될 수 있을 원관념에는 무엇이 있겠느냐는. 어둠은 아마 밤보다 짙고, 검정보다 두려운 것. 내게 물어본 것에 대해 먼저 대답을 하자면, 어둠이라는 상징의 원관념의 자리를 차지할 맨 먼저의 것이란 ‘심연’. 달리 말하자면 내면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번뇌 속을 걷는 때의 내면이 띠는 색깔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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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극은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호하는, 한 소말리아 해적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주얼리호에 침범한 죄로 법정에 섰다. 그에게도 한때 꿈이 있었다고. 친구 ‘테츠다우’와 근근이 모은 푼돈으로 배 하나를 샀으니, 배의 이름은 ‘희망’이었단다. 함께 그물코를 꿰어 어부가 되겠노라 나아간 바다에는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강대국의 어선들이 모조리 낚아간 바다는 훤히 투명했고, 그 안에는 물고기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단다. 그 아래를 바라보는 둘의 눈으로, 저기 밑바닥에는 모래 대신 ‘분노’가 영글어 있었다. 너무나 허탈한 그는 해적이 되었다. 너무도 안타깝긴 하지만, 그것이 해적질의 정당한 근거가 되어주지는 못할 일이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


친구 ‘테츠다우’와 함께 해적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다시 바다로 나아와, 석양에 취해있던 중 어느 배가 아주 가까이서 고동을 울리었단다. 미처 피할 새가 없던 둘은, 반쯤의 생존의식과 반쯤의 노략질에 대한 환상으로 배에 오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츠다우’는 급류에 휩싸여 사라졌고, 자신들의 배 ‘희망’은 부서졌다. 그때 그가 오른 배의 이름은 주얼리호, 당연히 그들은 그 익숙한 아덴만 여명 작전에 의해 제압된다. 이것이 그의 진술, 진술을 마치고 무대는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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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이렇듯 현실과 허구를 교묘히 섞어두었다. 실제의 주얼리호 사건과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상상을 기꺼이 섞어댄다. 해적의 변호 내용은 한 꿈많은 소말리아 청년의 실화일 수도 있겠지만, 주얼리호 사건의 실제 배경이라고 보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다만 이 현실과 허구의 부조화 속에서, 소말리아가 겪은 타국의 불법 어업이라는 안타까운 ‘사실’만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편, 여기서 팜플렛에 소개된 ‘불가능한 연극’이라는 개념이 얼핏 떠오른다. 본 극의 원작가 볼프람 로츠가 소개한 개념이라는데, 극은 현실과 허구가 ‘실제로’ 충돌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우리는 ‘허구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극철학이다. 허구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의지,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일어난 것을 변모시키려는 작업이기에 ‘불가능’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겠다.


주얼리호 사건을 ‘각색’, 즉 허구로 재구성해 소말리아 불법 조업의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작가는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던 것일까.


 

 

2막



해적의 변호를 끝으로 암전이 찾은 무대에는 시공간적 배경이 아주 달라져 있다. 2막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특전사, ‘두 상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의 임무는 일전에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었다가 동료를 죽이고 잠적한 인물, 양두영 중령을 수색하고 좌표를 송신하는 작전.


그는 팀원 ‘라 하사’와 함께 보트를 타고서 ‘힌두쿠시 강’을 거슬러 밀림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나로선 처음 들어본 힌두쿠시, 곧바로 두 상사는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 “압니다. 여러분은 힌두쿠시를 산맥으로 아시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TV와 인터넷을 통해 힌두쿠시를 접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힌두쿠시 강에.” 과연 인터넷에 찾아보니 힌두쿠시는 산맥이라 전해진다. 나는 두 상사의 발언에 순간 혼란을 느끼지만, 아무래도 허상인 그보다는 내 눈앞을 가득 메운 매체의 말을 믿기로 한다.


이것 또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현실과 허구를 자꾸만 섞어, 극은 지금 여기 있는 나를 혼란케 한다. 힌두쿠시 강이라는 허구를 통해 먼 나라에 대한 우리의 앎, 즉 현실에 의심을 가하게 한다. 이제 두 상사와 라 하사,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지도 속 산맥 위에 극적 환상으로 짜인, 힌두쿠시 ‘강’을 거슬러 밀림으로 밀림으로 향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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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는 큰 강도,

밀림도 없어 보인다.

물론 나는 가본 적이 없다.



밀림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문명의 터전, UN군이 주둔하고 있는 “항구”에 정박한다. 사위 바다 하나 없는 땅에 ‘항구’라니, 이쯤 되면 연극의 모든 것은 의심의 물망에 오른다. 의심으로 연극을 겨누는 와중에도 연극은 자꾸 흘러가니, ‘흘러갈 대로 가라지, 어쨌든 팩션은 아닐 것이다’ 하는 생각으로 나는 연극을 치어다 본다.


그 항구에서는 UN군이 주둔하며, 신체 일부를 잃어버린 원주민들의 인력을 동원해 ‘콜탄’을 채집하고 있단다. 콜탄은 핸드폰의 핵심 원료로, “콩고”에 전 세계 매장량의 7~80%가 매장되어 있다고, 현실의 ‘매체는’ 전한다. 이것이 콩고 내전을 장기화시켰다고…… 콩고라는 현실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허구 사이에서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만 진다.


그곳을 지나 본격적으로 두 상사와 라 하사는 밀림에 접어들고, 점차 점차 어둠 속으로 다가간다. 짐승마저 멀리 수풀에 감돌고 있는지, 소리라곤 보트의 모터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뿐인 적막한 곳. 여기엔 빛도 잘 아니 들어오는가보다, 둘의 입에서 어둡다는 소리가 거듭 들린다. 어둡다. 밀림의 심장으로 향해가는 만큼, 사위는 고요하고 어두워진다. 이것은 두려운 ‘어둠’. 문명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둘은 어둠을 향해간다. 이상스런 긴장감이 두 상사와 라 하사를 조여온다. 그러다 덜컥, 생뚱맞은 와중에 카누에 탄 방문판매상을 만난다. 긴장은 고조되다간 잠시 유보되었다.


나토군의 석유고 폭격 여파로 집과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는 상인, 그의 사정은 기구하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처연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종래 미심쩍음을 샀다. 실의에 빠진 그와 그를 위로하려는 라 하사, 그러나 이런 그를 위로하는 방법은 한갓 위로가 아니라 자기 물건을 사주는 일이라는 보부상의 말이 두 상사와 라 하사,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의심을 자아낸다. 그도 이런 자기가 의심스러운 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이제 이 아픔을 딛기 위해서, 또 자신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으니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 말하곤 그는 반대 방향, 문명의 방향으로 멀어져갔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극은 계속 진실과 허구 그 사이 어딘가에서 의심과 질문을 던져댄다.

 

*


밀림으로 들어갈수록 짙어지는 어둠과 고조되는 긴장, 그런 와중에 타인과의 조우와 긴장감의 해소, 그러나 이내 상대에 대해 품게 되는 불신, 이별, 그리고 밀림. 이 반복이 이번 2막의 주 패턴으로 보인다. 두 상사와 라 하사의 시선을 따라 보트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며, UN군이 점령한 콜탄 채취소와 카누를 탄 보부상, 변태 선교사의 마을을 지난다. 각각의 만남에는 문명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다. 다국적 기업의 콜탄 착취와 나토군 폭격의 희생양, 변태 선교사의 유사 선교 행위와 버스 수류탄 테러 등, 마주한 문명에서 접하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어둠’이다. 만남과 이별은 정거장처럼 스쳐 지나가고, 그럴수록 밀림의 어둠과 주인공 내면의 어둠은 깊어져 간다. 여기, 힌두쿠시 강을 따라 오르는 여정은 어딘가 비상식적이고, 기괴하다.


문명이 멀어지는 만큼 밀림과 어둠은 깊어가고, 긴장감은 짙어져만 간다. 극은 이 밀림, 어둠의 긴장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둘은 밀림이 깊어갈수록, 어둠이 짙어져 갈수록 불안해가고, 어딘가 해체되어가고, 미쳐가는 것 같이 보인다.

 

 

두 상사 : 나는 냉소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래서 지금 나는 라 하사를 더욱 의지하려 한다. 그렇지 않고선 여기, 세계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다.


라 하사 : 자연으로 들어갈수록 자연은 괴물 같았다. 이 무한함.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밀림에는 주변을 비춰줄 빛도 없고, 바라볼 무언가도 없었다. 끝없는 강과 적막함, 이내 이 강과 밀림은 무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주인공을 잠식해가고 결국 강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라 하사는 멍하니 넋을 놓은 채 하염없는 강을 바라보고 있고, 두 상사는 라 하사의 뒤통수에 총을 겨눈다. 총을 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죽인들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며. 그러나 총을 쏠 이유도 없다는 생각에 미칠 때쯤, 라 하사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리고 암전.


 

 

3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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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까지도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사가 3막에 이르니, 이해는 아주 묘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갑자기 여기, 지금, 우리의 일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3막은 몇 주째 글을 쓰지 못하는 어느 작가의 일기. 때는 2020년 5월 22일, ‘확진자’는 58명이란다. 글을 쓰련 들 쓰지 못하는 작가의 고통스러운 독백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나는 ‘갑자기 이게 다 무어람’하는 당혹스러움을 안고서 뚫어지게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때, 뜬금없는 ‘라 하사’의 외침이 들려 온다. “상사님!!!” “저 여기서 죽는 겁니까!!??”


장면은 뜬금없는 방식으로 전환되어 다시 밀림을 비춘다. 어두운 밀림 속, 라 하사는 없고 두 상사만 남았다. 두 상사는 매우 당황스럽고 두려운 눈치다. 아무래도 그가 방아쇠를 당긴 것은 아닌가 보다. 라 하사가 다시 무대에 등장하니 두 상사는 소리친다. 어디 갔었느냐고. 그는 이 밀림 안의 고독이 매우 두려웠나 보다.


 

두 상사 : 어디 갔었어!!!

라 하사 : 모릅니다…… 모르겠습니다……

두 상사 : 자기 일은 알아야지!

라 하사 :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두 상사 :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라 하사 : 아닙니다……. 봤습니다…… 대변을……



이 맥락 아래에서 보아하니, 라 하사는 잠시 이탈했다간 길을 잃은 모양이다. 앞서 작가의 독백 순간에 들린 라 하사의 외침은 외딴곳에서 길을 잃은 그의 두려운 외침. 그 외침과 함께 장면이 전환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제 이 서사는 제4의 벽*을 잃어버린다. 이 서사는 무대라는 완전히 독립된 공간에서 짜이고 핍진성을 통해 설득력을 얻어가는 일종의 ‘약속된 허구’에서, 작가의 창작물로 전락하며 그 허구성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다. 즉, 라 하사의 외침은 작가의 고뇌 어린 창작의 산물임이, 극 무대 위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폭로, 그래도 서사는 일단의 끝을 향해 계속 흐른다.


 

* 제4의 벽

 

연극에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벽을 뜻한다. 프랑스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가 주창해 사실주의 연극의 기반이 된 개념이다. 이 벽을 사이에 둔 관객과 배우는 서로 간섭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배우들은 제4의 벽이 실존하는 것처럼 연기하며, 관객들은 이벽을 통해 배우들을 엿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디드로는 배우들이 이 안에서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실재하는 방에 있는 것처럼 연기할 수 있다고 했으며,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무대의 그림이나 배경은 매우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 상사는 차츰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라 하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며 극도의 불안 증세를 보인다. 이제 문명은 아득히 멀고, 빛은 아주 없고, 소리도 없어진다. 강이 없어진 것 같다는 라 하사의 말, 곧 멀리서 울리는 짐승의 불길한 울부짖음. 그래도 두 상사는 계속 간다고 말한다. “우린 계속 간다. 우리는 계속 어둠 속으로 간다.” 그러나 라 하사는 이제 자신이 없어 보인다. 어둠, 불안, 불신, 그리고 고조되는 패닉. 무대 음향은 혼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치닫다가 절정의 순간, 정적과 함께 양두영 중령이 나타난다.


*


양 중령 등장 이후, 마지막 씬은 이해에 실패했다. 아무래도 이 연극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번의 관람이 필요할 듯하다. 특히 양 중령의 스토리는 거의 놓쳐버렸다. 간신히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가 두 명의 팀원과 작전을 수행했다는 것, 대략 24명을 사살함으로써 작전을 완수했다는 것, 그리고선 두 팀원을 쏘아 죽였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두 상사가 공감하였다는 것 정도이다. 이 미쳐버린 밀림에서 팀원을 죽이는 행위는 팀원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는 두 상사의 말, 이쯤에서 나의 이해는 힘을 다했다.


그 후 연극은 조금 남은 연극적 세계관과 질서를 부숴버리기 시작한다. 양 중령의 캐릭터는 변장도, 막 전환도 없이 앞서의 작가에 빙의하고 라 하사는 갑자기 전지적 시점의 캐릭터로 변모해, 이 연극의 각본과 탈고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초고에는 제가 없었죠.” 라 하사의 말이다. 작가와 함께 연극 바깥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캐릭터, 연극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제4의 벽은 이제 아주 부수어진다. 작정하고 부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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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상사는 홀로 무대 저편에 남아 연기를 계속한다. 그는 홀로 밀림으로 들어간다. 계속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은 지경까지” 걸었다. “이제 어둠은 우스운 지경”이란다. 낯섦과 공포를 유발하던 어둠은 이제 두 상사에게 친숙한 것으로 시나브로 변모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창자 속을 걷는 듯한’, 어둠은 처음 한없이 낯선 것에서 이제 더없이 친숙한 것,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는 홀로 연기를 계속한다. 더 깊은 어둠을 향해, 자신의 창자 같은 어둠을 따라 걷는다. 그러다가 마지막 인물과 조우한다. 1막에서 급류에 휩싸여 실종된 ‘테츠다우’다. 두 상사는 당황하여 “넌 여기 나오면 안 돼!”라며 소리친다. 그도 제4의 벽 바깥을 인지하고 있는 인물임이 이로써 밝혀진다. 핍진성마저 잃어버린 연극은 이제 그 허구성을 감출 장치를 전부 잃어버리고, 연극의 법칙을 잃어버리며 허물어진다. 생각해보라. 이곳은 지도에도 없는 ‘힌두쿠시 강’의 상류, 밀림의 복판, 창자 속같이 완전한 어둠 속이다. 여기 테츠다우가 있어도 좋을 만한 이유와 인과 따위는 없다. 소말리아 앞바다에서 급류에 휩싸인 테츠다우를 위한 자리 따위 여기 아프가니스탄 밀림 속엔 없다. 우리의 이해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등장, 고로 명백히 어그러진 핍진성, 법칙이탈이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자신의 과거, 소말리아에서의 이야기를 하려는 테츠다우. 두 상사는 그를 적극 말리려 하고, 총으로 쏜다. 그리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인 좌표 송신을 마친다. 끝.


 

 

결론



솔직히 말하자면, 리뷰를 쓰면서도 긴가민가한 부분이 워낙 많다. 이 순서가 맞던가, 이 내용이 맞던가, 지금의 나로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 조금 두렵다. 객석의 완전한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백지 위를 날려쓴 내용들엔 두서가 없고, 내 기억은 불완전하며, 동행한 친구의 진술과도 엇갈리는 부분이 많다. 서사가 무난한 것이었다면야 우리의 일반 이해에 입각해 내용을 복기해볼 수도 있겠건마는, 보시다시피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연극이다.


그래서, 웃기는 어둠은 무엇이었을까. 작중에 어둠과 웃김이 함께 진술된 경우는, 내 기억에 따르면 연극의 끝자락, 두 상사가 홀로 어둠 속을 걷는 중에 등장했다.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은 지경까지 걸었다. 이제 어둠은 우스운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볼까. 나로선 고민이 깊다.


그 전에, 어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여기서 어둠이란 우선 밀림의 환경이 제공하는 사실적 어둠이다. 그리고 그 사실적 어둠은 문명과의 이격을 우선 가리키고, 뒤이어 그때 우리가 겪을 불안과 불신, 패닉을 상징한다. 우리의 문명은 불야성의 공간, 여기서 한 촉 불빛도 없는 완전한 어둠은 겪을 일 적다. 어둠은 정복된 것이다. 내게 강원도의 밤이 두렵게 여겨지는 것이란 이 밀림의 두려움과 같았다. 멀리 가로등 하나 보이지 않을 때, 높은 곳에서 바라본 산의 실루엣은 너무도 웅장하고 무한히 여겨지며 내게 두려움을 자아낸다. 산이 거기 가만히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 내 느낀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파헤쳐보자면, 그것은 모종 조난의 감각, 완벽한 고립과 소외의 감각이었다.


이 어둠을 달리 말해보자면, 지금 글을 쓰고, 또 글을 읽을 우리 처한 이곳으로부터 이격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밀림에 가본 적이라곤 없지만, 연극을 통해 그 먹먹하고 두려운 감정이 얼추 이해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여기, 불야성의 도시와 숱한 인간의 틈바구니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한없이 두렵게 여겨진다는, 원리 하나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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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속에서 어둠의 의미는 이것에 그치지 않았다. 어둠의 가장 유명한 비유인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 또한 이 극의 어둠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한다. 콜탄 착취, 나토군의 폭격, 이슬람 원주민에 대한 기독교 선교자의 노골적 성욕, 버스 수류탄 테러 등. 주인공이 밀림이라는 사실적 어둠으로, 또한 불안을 유발하는 어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접한 잠깐의 “문명”은 이러한 ‘인간의 어둠, 인간의 부정’을 표상한다. 주인공은 밀림 속에서 불안해져만 갔고 문명을, 타인을 마주칠 때마다 안도하였지만, 그들의 ‘어둠’을 마주하곤 석연찮은 감정을 안고서 더 짙은 밀림의 어둠을 향해 떠났다. 이것은 극의 제목이 가리키는 어둠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즉, 극이 보이고자 하는 어둠은 문명과 타인에 의존적인 우리의 속성을 조명하고, 문명이자 타인인 우리의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속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이 왜 웃기는 것일지…… 두 상사는 홀로 어둠의 최전방까지 몸을 밀고 나아갔다. 그에게도 분명 어둠은 두렵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는 맡은 바 임무를 꽉 쥔 채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고 하였고, 나아가는 동안 어둠은 차츰 익숙해졌으며, 마침내 그에게 우스운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일까, 이것이.


무언가가 웃기다, 우습다는 것은 또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직접적 의미로, 그 자체로 아주 재미있고 즐겁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우회적 내지 반어적 의미로, 무언가가 가소롭거나 불쾌하다는 뜻이다. 제목이 가리키는 ‘웃기는’의 의미는, 아무래도 직접적 의미로 해석되진 않는다. 위에서 본 어둠의 두 의미에 대해, 극 안에서 해학적인 웃음을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둠에 대해 두려워하고, 그럼에도 그를 계속 대하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익숙해지고 종래에는 우스워졌다.’ 그렇다면 이것을 두려운 것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 변화라 보아도 좋을까. 두려워하던 대상을 자꾸 바라보자니 그것이 친숙해지고, 무던해지고, 마침내는 가소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선 문명과 사회와 타인에 꽉 안긴 채,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속성을 비꼬는 일이 된다. 좀 더 일반화해보자면, 타인에 의존적인 우리의 속성을 비꼬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다.


한편, ‘웃기는’이 가리키는 두 번째 어둠에 관해서는 설명이 아직 묘연하다.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 그것은 이 극 안에서 무엇으로 ‘웃기는’ 것이 되었던지. 그러고 보면 UN군의 사령관, 보부상, 그리고 기독교 선교자는 한 명의 배우를 통해 연기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제 입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치부를 떠들어 대곤 했는데, 그것이 부끄러운 줄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자기 입으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치부를 떠들어댐으로써, 그는 인간의 부정적 속성을 주인공과 관객에게 알리었다. 그렇다면 극은 그 인물들을 등장시킬 제, 풍자적으로 대함으로써 그들을 ‘가소로운’ 존재로 격하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이런 해석에도 아쉬운 부분이 남아 있다. 여전히 두 어둠이 ‘웃김’이라는 속성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재차 연극을 복기해 보아도, 두 어둠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겠다는 직감은 들지 않는다.


한편, 연극은 왜 난해한 형식을 채택하였는가. 그에 대한 까닭을 모르고선 위의 파격적인 시도가 읽히지 않을 테고, 그때 연극은 내게서 한없이 멀리 떨어진다. 연극 ‘웃기는 어둠’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본 극은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을 확장하는 동시에 기존 연극 문법을 무너뜨리는 연극적 묘미를 한껏 살려낸 포스트 서사극”이다. 대학 시절 극 이론 공부를 소홀히 한 나로선, 브레히트의 서사극 기법이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어 인터넷을 전전해보았다.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


종래의 감정이입에 바탕을 둔 극적 연극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기 위해 대두된 이론.


본래의 극적연극 (Dramatic Theater) 에서는 배우가 자기의 역할에 완전히 몰두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무대에서의 일이 마치 현실적인 것 같은 환상을 일으키게 하고 도취 상태에 빠뜨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데 반해 서사극 (Epic theatre)에서는 배우가 자기의 역할과의 사이에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연기함으로써 객관적으로 연기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관객도 거기에 적응함으로써 그 극 전체를 비판적으로 관찰하고 이러한 냉철한 관찰을 통해 판단력을 부여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것이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격효과기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판단을 위해서는 감정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연극에 대해 이성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연극이란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사회적 병폐를 무대위에 전개시키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냉정한 판단력을 관객 각자가 배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연극 형태는 ‘비 아리스토탤레스적 연극’ 혹은 ‘객관적 연극 형태’라고도 불리워진다.


소격효과기법


브레히트가 주장한 개념으로, 당시 주류였던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카타르시스 이론을 반박하며 관객이 배우의 연극에 몰입되지 않아야만 비판적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개념. 다른 말로는 ‘거리두기의 기법’

 

브레히트는 감정이입을 통한 연극 감상은 관객의 비판적인 정신을 말살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감화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관객들이 무대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았다.

 

배우가 관객들 사이로 걸어가거나, 말을 걸거나 함으로써 무대와 관객들을 철저히 격리시키는 것이다. 그로써 관객들을 감정이입에 따른 환상과 몰입에 빠지지 못하게 만든다.


- 한성대학교 미디어 위키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과 그 핵심인 ‘소격효과기법’을 알기 쉽게 정리해둔 글을 가져와 보았다. 너무 긴 글처럼 보이시겠지만, 중간에 생략한 내용도 꽤 많으니 양해를 바란다. 즉, 브레히트 서사극 기법이란, 관객이 무대에 흠뻑 젖어들지 못하도록 일부러 제4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기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까닭은, 관객이 연극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객관적 시야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 기법이 효과적이었던 탓인지, 나 또한 3막에서부터는 몰입하지 못했다. 몰입이 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옳겠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작가, 갑자기 서사 전개로부터 뛰쳐나와 작가와 대화하는 주인공, 엉뚱한 곳엘 느닷없이 등장하여 서사의 종결부를 완전히 망쳐버린 테츠다우. 이 모든 것이 한없이 난해했고, 정말이지 ‘낯설었다.’ 심지어 나는 연극에 대해 반감까지 느꼈다. 여태 잘 집중해 온 내게, 그럴듯한 결말을 보답하지 않은 극과 각본에 대해 분노까지 든 것이다.


어둠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어둠을 흡수하고 있는 두 상사의 앞에, 그 진지하고 긴장되는 순간인 클라이막스의 순간에, 갑자기 등장한 테츠다우는 내 맥을 풀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캐릭터가 가진 해맑은 색채감으로 말미암아 이 공간 자체의 진지함과 엄숙성마저 풀어헤쳐 버리는 존재. 2막에서부터 지금까지 잘 적층된 긴장이 단 한 순간 맥없이 스러지는 것에 대해, 나는 이상한 억울함과 보상심리까지 가지게 되었다. 정말이지 두 상사와 라 하사는 밀림의 두려움을 잘 보여주었기에. 이 분노는 밀림 속에서 점층적으로 깊어만 가는 두려움과 패닉을, 두 사람이 너무 잘 연기해낸 탓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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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부 의도였다 하니, 이제 나의 감상을 들여다본다. 나는 이 기법을 통해서 잘 객관적이게 되었고 비판적이게 되었는가 자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다!”는 기꺼운 대답은 나오질 않는다. 이것이 내 한계인지 극의 한계인지는 알 길 없다만, 아무래도 세계의 극찬을 받은 연극이라고 ‘매체’는 전하고 있으니, 일단 나의 한계라고 보아야겠다.


3막에서 뜬금없이 작가가 등장한 점, 이후 등장인물들이 서사를 뒷전으로 하곤 연극의 세계를 벗어나려 한 점, 양 중령이 작가에 빙의해 굳이 창작과정을 설명한 점, 결말 부에 1막에서 실종된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서사 종결을 무화시키려 한 점 등, 이 모든 것이 기법이라는 것은 알겠다. 분명 유의미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유발한 것이란, 아무래도 객관적 거리 유지라기보다는 반감과 반몰입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이것이 낯설게 하기 기법인 것은 알겠는데, 나와 연극 사이에 객관적인 거리를 설정하게끔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는 말이다.


기존 연극 문법을 무너뜨렸다는, 새로운 시도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나로서 할 말이란 없다. 내가 그리 많은 연극을 관람하지도, 보편적인 기법을 알지도, 그로써 파격적인 시도의 산 의미를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관극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아무래도 아직 연극에 대해서 보수적인 관객, 고전적인 감상법의 관객인가보다.


관객으로서의 나는 그 자체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달리 말하자면 의미를 떠먹여 주는 연극을 선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방식의 한계를 체험한 바도 잦지만 말이다. 의미, 곧 주제를 분명히 설정하여 제시하는 서사 방식에는 한계가 분명하고, 우리는 그에 쉽게 싫증을 낸다. 참신하지 못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바라볼 때,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파격적인 기법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만 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결말이라도 잘 매듭지어주었더라면 하는 점이다. 1막과 2막은 옴니버스 구성으로 해석하며 수용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이후의 막은 옴니버스 구성을 띠지 않았지만 말이다. 1막과 2막의 일부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메시지는 ‘우리가 볼 수 없되 익히 아는 것들은, 대개 직접 체험한 앎이 아니라 매체를 통한 지식이고 그것은 진실의 전부일 수 없다.’이다. 소말리아 해적의 변론과 두 상사가 설명하는 힌두쿠시 속에는 우리의 앎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만약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여전히 유효할 비판이. 이것을 작가의 의도인 ‘허구를 통한 현실 변화의 의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1막의 의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던가 보다. 극의 마지막 부에 등장시킬 뜬금없는 인물을, 서사적으로 독립된 1막에서 채용한 것이다. 극의 문법을 해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그 때문에 두 상사의 깊은 어둠을 향한 여정은 맥없이 끝나버렸다. 슬며시 종결 처리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여태껏 쌓아온 어둠에 대한 의미심장한 뉘앙스는 열린 결말로 처리된 것이 아니라, 슬쩍 통편집되었다. 내가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러한 주제의식과 핵심 소재에 대한 나의 니드조차도, 구시대적인 태도일까. 극 문법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이전에 문법에 맞는 극의 구조를 일정 부분 성립해야 한다. 해체를 위해서는 성립이 먼저 필요한 것이다. 그 말인즉, 보편문법에 따라 주제의식을 구성하고 구조를 조성하고, 서사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충분히 진행된 서사구조는 이제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기대를 상기시키는데, 그것이 결말에 대한 우리의 예상과 니드일 것이다. 이것을 부수는 행위는, 그러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내 자그마한 의견이다. 우리를 기대하게 한 것도, 일단 여러분인 탓이다. 기대를 조성시킨 후 가차 없이 기대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까마득히 모른 채로 스스로 실험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기분은, 아무래도 좋은 기분일 수는 없을 일이다.


앞서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 소격효과기법의 설명에서 내가 느끼는 바란 ‘거리두기’, 일종의 ‘낯설게 하기’이다. ‘낯설게 하기’는 연극에 과몰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것은 어디까지나 연극이다’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이자 등장인물인 대상이 제4의 벽 너머를 인지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관객에게 제4의 벽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것으로도 관객의 극에 대한 객관화는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 외 여러 시도는 그 실험 정신으로 말미암아 칭찬받을 만 하나, 파괴적 시도에는 조심성과 관객에 대한 배려가 깃들기를… 관객의 그 불편함과 괴로움마저 이 연극의 목적이었다는, 그런 오만한 의도는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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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와 현실. 앞서 작가는 연극이란 허구와 현실이 충돌하는 곳이고, 그 안에서 불가능한 갈등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조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현실이 허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가 현실을 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더하여, 연극이 가지는 허구성은 서사의 마력에 기인해 관객을 매료시키는 경향을 지니는데, 이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연극은 제4의 벽을 허물고, 이것이 어디까지나 연극이라는 사실을, 어디까지나 허구라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관객에게 객관적 거리를 유도하고 비판적 자세를 요구했다.

 

이 허구, 말하자면 ‘힌두쿠시’의 강과도 같은 허구의 앞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었을까. 두 어둠에 대해, 각각의 비판적 감상을 가지었는가, 나는? 글쎄, 그건 이렇다 말하기가 어렵다. 나의 비판적 태도는 극의 내용이 아닌 구성을 향해 버리었기 때문이다. 연극적 시도, 구조의 고리타분한 틀과 정형성을 벗어던지기 위한 실험의 과정에서 서사는 집중력을 잃었고, 진지성은 희석되었으며 그것이 이끌어오던 내용은 슬며시 흩어져버렸다. 혹, 인간의 어둠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마음으로 대한다? 명랑하게? 이런 의도였더라면 안타깝게도 내가 그에 동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여차저차 흥미로운 연극이었다. ‘재미있는’ 연극이라 말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진지한 연극이었으니 말이다. 낯선 기법과 구성은 일견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신선하기도 했다. 물론 따라가기가 버겁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던진다기보다는, 혼란한 와중에 여러 메시지를 던지는 연극이란 점은 특히 지금까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관극 직후에는 다소 머리가 얼얼하기도 했고 해석도 잘 아니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조사하고 리뷰를 써내려가며 메시지들이 정리되고 있자니 이 서사의 복잡한 구조에 감탄을 느낀다.


어려운 연극이었다. 리뷰를 쓰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신 없는 부분이 많다. 두 번은 보아야 쓸만할 터인데, 내가 영 넉넉하지도 재바르지도 못해 스스로 아쉽다. 이제 리뷰를 마치며, 그래서 ‘웃기는 어둠’이 무엇이냐고 마지막으로 내게 물어보자. 두 상사가 당도한 ‘내 창자 같은 어둠’은 웃기는 것인가. 그는 우스운 지경이라 말했지만 홍소도 냉소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상사가 목도한 ‘인간의 부정인 어둠’은 웃기는 것인가. 그 사건에 있어 주인공은 유의미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웃기는가.


어쩌면 이 ‘웃김’은 관객의 몫일지도. 작가와 연출이 열심히 구조를 부서뜨리며 의도한 것이 관객의 극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라면, 그런 태도를 조성한 까닭이 극이 제시한 사회적 병폐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성 함양이라면, 이제 그 태도 위에서 관객인 내가 이 ‘어둠’을 바라보자. 내게 그것은 웃기는 것이더냐? 홍소, 혹은 냉소할만한 것들이더냐? 안타깝게도 아직의 내게는 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두 어둠,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의 부정함에 대한 내 대답은 아직 침묵 속에 있다. 아직 그러한 질문을 완전히 대할 수 있을 만큼, 내 앎과 양심이 충분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연극을 관람하신, 혹은 관람하실 여러분이 그 질문을 대할 차례이다. 지금 연극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여러분의 눈 위로 비치는 우리들의 어둠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이제 그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으신지.

 

연극, 웃기는 어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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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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