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살아가는 '일'을 상기시키는 것

Q. 미학 왜 공부하세요? A. 살고 싶어서요.
글 입력 2020.10.12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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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환기


 

눈을 뜬다. 머리가 어질하다.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비타민을 꼬박 챙겨먹기 시작한 것이 불면증 심화라는 비극을 낳았을 것 같진 않다. 어쨌거나 무거운 머리를 쳐들어 오늘도 꽉 막히는 하루구나, 싶은 마음에 우울감을 소환하기 시작한다. 소환이라는 말이 다소 어색해 보이지만, 대개 최근의 내가 우울을 다루는 방식은 이처럼 그것을 마치 만질 수 있는 사물인 것마냥 고체화시키는 것이다.

 

제일 가까운 친구 한 명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낸다. 아, 살기 싫다. 아침부터. 나와 비슷한 증상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함께 시달리는 친구인 만큼 그 누구보다 내 메시지에 애정 어린 화답을 보내온다. 나도. 근데, 죽지는 말자.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는 때도 흔하다. 그만큼이나 우리는 서로의 목숨줄을 조금이라도 더세게 붙잡아주기 위해 나름의 발버둥을 친다. 그렇게 다소간의 우울함에 자발적인 의지 반으로, 비자발적인 무력감 반으로 잠식된다. 보통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완벽함에 집착하는 기질에 발목이 잡혀 업무와 과제에서 딜레이가 빚어질 때 이런 경향이 심해진다.

 

책상에 앉는다. 책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각기의 줄을 이루고 있다. 어지럼 속의 질서. 언뜻 보면 정리되지 않은 채 단지 권수만 나누어 쌓아놓은 형국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기준이 있다. 자주 보는 인문학 서적과 소설들 혹은 수업 교재들. 인쇄한 리딩 자료들은 오른쪽 맨 앞, 혹은 왼쪽 맨 앞에. 그 뒤에는 이미 읽었지만, 책장에 꽂아 놓기 번거로워 처분을 유예한 미완결의 책들. 온통 책투성이다. 독서대 위에도 책이 몇 권 올려져 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책은, 독일 현대 미학자들의 사상이 정리된, 지도교수님이 저술하신 책. 놀랍게도 아직 한 번도 안 펼쳐 봤다. 언젠가는 볼 일이 있으리라 생각해서 늘상 독서대 위에 마치 디폴트값처럼, 올려놓곤 하지만 그게 이번 학기가 될지 졸업논문을 쓸 내년 1학기가 될지는 미지수다.

 

천천히 리딩 자료를 꺼내 든다. 한 시간 넘게 영어로 적힌, 현대 정치학자들이 읊어 놓은 글자들을 모아 담다가 기획 기사 취재 속기록을 정리한다. 중간에는 강의도 들으면서 머리를 서서히 환기시킨다. 미학 도서를 펼쳐 헤겔이나 칸트,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뭐 이런 사람들이랑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누가 먼저 분노를 느끼는지 대결을 하는 것이다. 상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니 무의미한 싸움에 불과하리라고 누군가는 내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끝까지. 혹은 목표한 데까지 텍스트를 놓지 않고 나름대로 내 해석을 덧붙여가며 책의 내용을 해체하면 그들로부터 승리한 것이리라 믿곤 한다. 그러다가 과제를 하고, 신문사 일을 하고, 또 책을 읽고, 무언가를 또 뒤적거리다가 잠에 든다.

 

일종의 승부욕이 발현되는 셈이다. 알고 보니 이 사람들도 별로 특별한 이야기 하는 거 아니네. 이후에는 냉정한 자기성찰의 시간이 이어진다. 어라. 그런데 나는 뭐하러 이런 거 공부하고 있지. 미학을 전공하면서 매번 내가 빠지는 순환고리다. 주전공이니까 전공 과목 수업을 듣는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고 레포트를 써야 하거나, 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자료를 펼쳐 내용 독해를 시작한다. 이해가 안 가는 구절은 따로 표시를 해 두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서 해석해보든가 한다. 추가 자료로 RISS 논문을 뒤져보기도 한다. 그렇게 대충 욱여넣은 지식으로 레포트를 쓰고, 서술형 혹은 논술형 시험을 치른다. 강좌의 모든 커리큘럼이 끝나면 소위 “현타”를 맞는다. 나 왜 이거 공부하고 있지. 나는 왜, 그렇게 많고 많은 전공 중에 인문학을. 그 가운데에서도 학부 과정에서는 다른 학교에 존재하지도 않는 미학을 전공하고 있나. 그런 식으로 머리를, 내면의 공기를 환기한다. 보통 이쯤 생각이 도달할 즈음이면, 환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거나 시작한 후이기에. 그만 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라는 감정의 덩어리를 구태여 만져볼 필요가 없게 된다.

 

 

 

2. 살아간다는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역시나, 답은 똑같이 환기라는 단어에서 찾아야만 했다. 미학, 나아가 인문학 공부는 나는 살아가고 있다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차원에서 필요하다.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설명이란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액면가 그대로다. 삶을 연장할 필요성을 느끼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한다. 푸코를 읽고, 벤야민의 저작으로 한국 현대문학을 해석하고, 아도르노를 읽고 문화철학이 어떤 공부인지 슬쩍 훔쳐보고, 칸트를 읽으면서 고리타분한 인식론적 논의에 고개를 젓는다. 때로는 정치학, 외교학에서 대두되는 사회과학적 논의들을 읽고 들어보기도 하면서 저 사람들은 저걸 저런 식으로 접근하는구나, 라며 앎의 지평을 넓혀보기도 한다. 이번에는 누가 국내에서 젊은작가상을 받았는지.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은 어떤 언어를 내포하고 있는지. 이 출판사에서는 어떤 신간이 나왔는지. 더 재미있는 소설, 핍진한 서술로 가득한 문학작품은 어디 없는지. 발품을 적극적으로 팔아 시장을 뒤져보기도 한다.

 

내 일상은 컨디션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이렇듯 인간의 지성이 ‘남발된’ 텍스트를 붙잡고 살아가는 일정들로.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내 부족한 지적 능력으로 나의 글자를 뱉는 일정들로 가득하다. 그게 내 인생이다. 졸업하고 직장을 가질 즈음이면 이렇게 순수하게 글자에만 빠져 사는 삶에서 다소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글자가 적힌 무언가를 손에 쥐고 다닐 것이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웬만하면 홀로 서적에 파묻히며, 20세기 중반을 살아가는 근대인같이 삶으 궤적을 채워 나가는 것. 그것의 단초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은 인문학 공부에 근간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어쨌든 자발적으로 멈출 수 없는 한 지속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조금 더 내 기호에 맞는 일들이. 내가 신경을 쏟는 일들이 내 특질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적인 특성들로 자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것들이 내 어지러운 공상에 환기의 바람을 몰고 올 수 있길 바라는 셈이다. 나는 왜 이런 걸 전공해서 사서 고생을 하는지, 험한 말 투성이를 내뱉으며 레포트를 쓸 때도 내심, 그래도 이런 공부로 내면을 채우고 있어서 수명 연장에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라 안도한다. 얼떨결에 학부생 연구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발돼 발터 벤야민의 도시 경험을 주제로 산업화 시대 이후 한국 소설에 내재된, 자본주의적 도시의 논리를 밝혀내야 하는 위험에 처했지만. 분명 문헌을 독해하고 레포트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볼멘소리를 쏟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앞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로 모순적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이유를 구구절절 쏟아 뱉기란 상당히 어렵다. 나와 비슷한 카테고리의 글을 쓰는 사람들과 보름 전 만남을 가졌을 때, 왜 인문학에서 연구 가치를 느끼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쉽사리 답하지 못했던 이유도 도대체 이런 근본적인 상념을 어떤 방식으로 풀이해야 듣는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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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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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 미술사 역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들의 작품과 의미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소현님의 미학을 둘러싼 일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던 것 같아요. 인문학이라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과정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당연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글’은 여전히 필연적인 소통 방식이자 결과물인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글 없이 살아가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기에, 그리고 이소현님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다시금 떠올랐어요.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에서 말씀하신 그 ‘모순’에 마음이 갔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용하다는 ‘미술’을 공부하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무어라고 이야기해보기 위해, 고작 몇 편의 글을 위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꼭 지금 살아갈 이유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았거든요. 정말 괴로운 일인데, 그렇게 살아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한편 어쩌면 그것이 정말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합리적이라 회자되는 가치들이 굳어진 사회에 그런 인간적인 인문학을 파고드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하기란 적어도 단순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런 현실 자체도 모순일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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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2eon
    • 레몬어쨌거나 인문학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씀해주신 형태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웃픈 현실이네요. 매번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다가 소위 '현타'를 맞다가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거라는 생각에 또 다시 텍스트를 집어 들고... 뫼비우스의 띠가 반복되는 양상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 저희는 이런 학문을 공부하기로 선택한 걸까요? 정신을 이만큼이나 실시간으로 깎아먹는 일도 많이 없을 터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말씀해주신 대로 저희는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저희의 앎을 드러내고자 분투할 것이고, 그렇게 삶을 살아가겠죠. 또 한 번 정성 어린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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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melo
    • 소현님의 글과 비슷한 감정인데요, 영화 ‘아가씨’의 “내 삶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생각났어요.
      저 또한 고등학교시절 야간자습시간 듣던 음악에 매료되어 ‘나는 음악으로 먹고 살거야’라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절 여기까지 질질 끌고왔지요.
      음악은 절 먹여살려주진 않지만, 오히려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더 강했기 때문에 모순된 애착과 꿈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확신이 옅어져 ‘이래도 되나’싶지만, ‘이래야만 한다’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다른 외부의 기준들에 흔들리지 않게, 사랑할 수록 더 채우고 가까이 둬야겠다는 다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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