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막이 오를 당신의 연극을 위해: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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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제목을 듣고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빠졌다. 20대를 지나는 우리들에게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는 이가 몇이나 될까?
열아홉 끝자락, 친구들은 모두 20대에 대한 환상을 펼치며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아닌 척했지만 나 역시, 분명 어떤 지점에서라도 해방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달라질 것 없는 생활에 묘하게 지쳐갔으니 말이다.
온갖 미디어에서 20대 청춘에 관한 화려하고 빛나는 이야기들만 풀어놓으니, 아마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내 미래가 될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아주 밝고,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고, 변화를 즐기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넘어져도 일어서고, 어디든 훌쩍 떠날 용기가 있고, 누구의 비난에도 기죽지 않는, 그런 청춘의 생활을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입학보다 졸업에 가까워져 있었다. 누구도 나를 등 떠민 적이 없었음에도 괜히 억울해지는 날이 가끔 있었다. 결국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은 나 혼자인데, 왜들 그렇게 말 한마디 씩 얹어 나를 짓눌렀을까 하는 억울함.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누군가 말 한마디로 숟가락 얹었다고 휘청거리기나 한 자신에 대한 한심함도 몇 스푼 첨가한다.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에는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에 몰두하며, 주변을 둘러볼 여유 없이 살아온 대학생 이찬란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찬란은 우중충한 '오늘'을 살다 우연히 연극 동아리 부장 윤도래의 눈에 띄어 그의 희곡 속 주인공이 되기로 한다.
얼렁뚱땅 가입하게 된 연극 동아리에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채도 낮은 일상을 보내는 (우리 모두를 닮은) 청춘들이 모여 있었다. 그렇게 극의 주인공이 된 이찬란이 연극 동아리 부원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며 감정과 태도의 변화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이찬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벽 속에 스스로를 가뒀지만 결국 그 벽은 이찬란이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도록 하는 벽장이 되어버렸다며 웅크려있는 인물이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숨 쉬는 법도 잊었다고 말한 그지만, 부원들과 '함께' 자기 자신을 꺼내어 보이고, 스스로를 용서해가며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법을 연습해 나간다.
이찬란과 연극부 부원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독자로서 지켜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들 그렇게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에 휩싸여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걸까? 특히 이찬란의 성장이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그의 모습 안에서 나의 단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어딘가에 갇혀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늘 취해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어떻게 옮길 수 있는지 알지 못했고, 또 행동으로 옮기고 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음에 주저했다. 그렇게 매일이 자꾸 숨이 모자라기만 했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생 때, 첫 연극 아닌 연극을 하게 되었다. 연극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고, 아주 짧은 콩트의 한 배역을 맡은 것이었다. 남 앞에서, 그것도 내 모습이 아닌 모습인 채로 나선다는 게 그 당시 생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같은 조 친구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기에 결국 제비뽑기로 꽤 주목받는 역할을 담당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짧은 연습시간이 지나고, 실전이 코 앞이었을 때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다. 연습 시간에도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꾀를 부리며 자리를 피했었는데 실전이라니. 그렇지만 수업 시간에 문을 열고 나가 도망칠만한 깡도 없던 나는 결국 무대 앞에 서고야 말았다. 그때부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 분량을 눈 딱 감고 '질러버렸을' 때. 묘한 희열을 느꼈다는 것만 생생할 뿐이다.
그때 느꼈던 그 작은 희열을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나 생생한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걸까. 어쩌면 나에겐 그렇게 자잘한 기회들이 여러 번 주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주저 없이 표현하게 되는 '시작점'이 되는 기회들 말이다. 그리고는 매번 '해보지 않은 일을 내가 어떻게 능숙하게 할 수 있겠어!' 하는 변명으로 그 기회들을 뻥뻥 차 버렸는지도 모른다.
윤도래가 이찬란을 위한 연극 훈련의 일환으로 축제 부스 홍보 역할을 맡겼다. 이찬란은 그때 당연하게도 격하게 거부한다.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윤도래는 이렇게 반박한다. '안 해봤다고 안 하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어? (중략) 할 수 있어. 해봐. 해보면 별거 아냐.' 그런 윤도래의 설득에 이찬란이 점점 마음을 열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에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스스로의 의지만 있다면, 정말 단 한 번의 계기로도 변곡점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에 나오는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이것이었다. '일화'와 '사건'은 다르다는 것. '일화'가 지나면 일상은 원래대로 흘러가지만, '사건'이 지나면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이찬란과 윤도래, 그리고 각자의 상처와 성장점을 간직한 부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졌던 '사건'들을 다만 '일화'로 치부한 채 제자리에 머무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들의 인생은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말이 정말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한 번뿐인 내 인생이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내 인생만 소박하게 가꾸는데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는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시작해보지도 않은 일들이 널려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달리다 지치는 어느 날에 '네가 뭘 해도 괜찮다.', '어떤 모습의 너여도 괜찮다.'라고 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꽤 괜찮은 날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기대가 다시 든다. 우리는 모두 괜찮을 수 있다. 머무르고 싶다면 머무르고, 벗어나고 싶다면 벗어나며, 우리만의 연극을 올리고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다. 어쨌든, 막은 오를 테니까.
*찬란하지 않아도 괜찮아- 웹툰과 연극의 감동을 고스란히 책에 담다 -지은이 : 까마중출판사 : 넥서스분야웹툰/카툰에세이규격153*215쪽 수1권 192쪽2권 260쪽3권 248쪽발행일2020년 08월 10일정가1권 12,000원2권 14,000원3권 14,000원ISBN979-11-9092-717-8[고민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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