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윤곽 [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상실 혹은 단절
글 입력 2020.09.2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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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자꾸만 책표지를 확인했다. ‘레이첼 커스크 장편소설’이라 되어있는데, 이상하게 그냥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단편소설을 엮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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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는 영국의 소설가이다. 그녀는 여름 동안 글쓰기 강좌를 위해 아테네로 가게 된다. 그리고 사흘 동안 만난 사람들, 비행기 옆자리 남자를 비롯해 동료, 편집자, 그리스 작가, 그리고 그녀의 수업을 듣는 수강생의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실패한 결혼 생활 이야기, 열정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한 이야기, 새로 발견하게 된 자아의 이야기, 실패한 연애 이야기 등. 챕터 하나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 이상 담겨있다. 그래서 모든 인물이 엮여있는 장편 소설이 아니라 연작 소설, 혹은 단편 소설 같은 느낌이 든다. 화자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단 대부분 들어주는 입장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인물들이 직접 내게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종종, 인생이란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갔던 순간들에 대한 형벌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 혹은 공감하지 못했던 일들일 거라고, 그가 모르는 것 혹은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들을 언젠가는 억지로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말이다.


- p.113

 

 

화자를 따라 들은 인물의 여러 이야기 중 기억에 남은 건 수강생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10명쯤 되는 수강생들의 이야기에서 가장 몰입감 있게 읽어내린 인물은 페넬로페였다.

 

페넬로페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어느 저녁 날, 옆집의 스타브로스 씨가 찾아와 키우던 개가 낳은 새끼들 중 한 마리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강아지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강아지를 키우길 원했다. 페넬로페 또한 새끼 강아지를 안을 때 조심스러워진 아이들의 모습에 혹했으나, 끝내 키우지 못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엄마는 늘 일을 망치기만 해'라고 아들이 말하는 순간, 페넬로페는 강아지가 아이들에게 부렸던 마법이 완전히 풀렸고, 그와 함게 현실 감각도 되돌아오게 된다. 냉혹하고 강력한 느낌, 이라고 페넬로페는 말했다.

 

페넬로페는 2년 전 키웠던 미미를 기억했다.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었고, 그때는 강아지를 분양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던 때였다. 미미는 "담배 색 털이 곱슬곱슬하고 눈은 두 개의 작은 초콜릿" 같은 아주 예쁜 강아지였다. 처음 페넬로페의 집에 왔을 땐 아주 작고 예뻐서, 그녀가 할 일이라고 해봤자 아이들이 강아지와 노는 시간과 친구들에게 강아지를 자랑하는 시간을 적당히 조절해 주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미미와 노는 즐거움을 방해할까 봐, 그녀는 미미가 온 집안에 냄새를 묻히고 다녀도 아이들에게 청소를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이들은 산책도 안 시키고, 대소변도 안 치웠다. 심지어 짖는다고, 또 자기들 방을 엉망으로 만들고 물건을 물어뜯는다고 짜증을 냈다. 그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페넬로페는 미미를 감당해야만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해 개를 기르기로 했지만, 덕분에 저는 저의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 p.253

 

 

미미는 빨랐고 기운도 넘쳤으며, 무엇보다 식탐이 많았다. 페넬로페는 그런 미미를 혼자서 감당했다. 미미에게 관심을 거둔 아이들은 그런 페넬로페를 나 몰라라 했다. 그러다 페넬로페가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었는데, 미미가 새로 산 쿠션을 다 물어뜯은 사건이었다.

 

페넬로페는 새로 산 쿠션을 물어뜯은 미미에게, 그것을 보고도 그저 텔레비전만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그래서 미미를 때리게 되었다. 페넬로페의 행동에 아이들은 큰 충격을 받고 놀라 몸을 던져 미미를 보호했다.

 

 

아이들이 몸을 던져 미미를 보호하고, 저를 괴몰보듯이 바라보더군요. 하지만 제가 그때 괴물이었다면 그렇게 만든 건 미미였다고, 저는 믿었어요.

 

- p.254

 

 

얼마 동안 아이들은 페넬로페만 보면 그 일은 언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은 잦아든 것 같았고, 같은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그녀가 미미를 때리는 건 아이들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미미는 이제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고, 그녀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쳐다봤으며, 집 안을 몰래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망가뜨렸다. 그리고 아이들도 이제 그녀를 대할 때 조금 냉정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페넬로페가 말하는 장면에서 나는 인물들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지 고민했다. 미미를 책임지지 않고 싫증 낸 아이들을 나쁘게 바라봐야 할지, 참지 못하고 미미에게 폭력을 쏟아낸 페넬로페에게 잘잘못을 물어야 할지, 아니면 미미한테 그래야 할지. 폭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 건지. 그것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끝내 책임을 물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우리는 얼마나 폭력에 익숙해져 있는 건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만, 아이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에서, 어떤 면에서는 좀 편해지기도 했다고 느끼는 페넬로페가, 그와 동시에 인생에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든 페넬로페가 안타깝다고 느껴졌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책표지가 생각난다. 첵표지에 있는 여성은 비행기 옆자리 남자와 함께 보트를 타러 간 화자로 보인다. 또 한편으로는 소설 속 인물들과 전혀 연관 없는 사람으로도 보인다. 화자가 들은, 쏟아내진 상실과 단절에 관한 이야기와 전혀 무관한 사람. 그저 유유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는 사람. 물 위에 떠다니고 있는 여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원하는 만큼 멀리 헤엄쳐나갈 수 있는 그녀. 반대로 거기서 그대로 익사할 수도 있는 그녀. 문득, 그런 그녀가 부러워진다.

 



 

윤곽
- 삶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이야기 -
 

지은이 : 레이첼 커스크
 
옮긴이 : 김현우

출판사 : 한길사

분야
영미소설

규격
128*188

쪽 수 : 304쪽

발행일
2020년 08월 10일

정가 : 15,500원

ISBN
978-89-356-6854-0 (03840)

 

 

[김승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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