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희망을 떠나, 먼지와도 같은 고요한 인생 속으로 - 도서 '고요한 인생'

때로 아이처럼 순진하게, 때로 모든 것을 단념하고
글 입력 2020.09.17 21:4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고요한 인생을 찾아, 아이로 돌아온 너



내일의문학_고요한인생_평면.jpg

 

 

이 책의 제목을 차지하기도 한 단편 <고요한 인생> 속 주인공은 ‘너’이다. 너는 몇 번째 일지도 모를 출생부터 범상치 않았다. 너가 태어나던 시기에 아버지는 노름에 빠졌고, 너의 출생일엔 아무도 산모인 엄마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온갖 불행을 끌어 모아 그것을 먹고 태어난 너. 그런 너가 태어나던 그때 너의 엄마는 어딘가 너무 친숙한 노인의 빨래하는 뒷모습을 보았고, 새로 태어난 너를 알아본 너의 연년생 언니 또한 새로운 너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너의 뒷모습에서 노인을 보았다.


 

“언제나 그러했듯, 네가 참을 수 없는 건 고요한 일상이 방해받는 것이다.”

 

<고요한 인생> p.27 中

 

 

너는 아이 답지 않았다. 마치 몇 십년의 인생을 살고, 모든 것에 지치기라도 한 것처럼, 너가 원하는 것은 수조속을 조용히, 하염없이 헤엄치는 물고기를 바라보거나 라디오 너머에 갇힌 목소리를 가만 가만 듣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고요한 일상을 보장해줄 수 있는 경제적인 환경이었다. 너에게는 그 누군가와의, 무언가와의 교류도 필요치 않았다. 그저 수조의 단단한 표면을 사이에 두고 물고기를 관찰하는 것처럼, 라디오라는 장치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의 사연을 듣는 것처럼, 무언가 벽을 하나 끼고 마치 스노우볼 속의 세상을 조망하는 것이면 족했다.

 

너의 잔인하고 어쩌면 반사회적인 행위는 그것을 지켜 내기 위한 정당방위였다.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도, 수족관 아저씨 혹은 고등학생의 은근한 추행도, 연년생 언니의 너를 향한 이유 없는 미움도, 너에게 상처를 남기지는 못했다. 그저 귀찮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벌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 너의 결정에는 ‘고요한 일상’을 지켜 내기 위한 목적만이 있었다. 너에게 고요함이란 무엇이었을까. 너는 어째서 고요한 일상을 위해 새로운 너로 태어나기를 반복하면서도 정작 어디에서도 고요하게 살지 못했을까.


 

“기왕에 생겨나버린 인생을, 없었다 치고 처음부터 새로이 시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너는 또 다시, 마치 에일리언처럼, 네게 숙주가 되어줄 만한 이상적인 가정을 찾아 떠나려 한다.”

 

<고요한 인생> p.37 中

 

 

어쩌면 너는 그렇기 때문에 아이이다. 몇 년이 지나고, 여러 번 새로이 태어나기를 반복할 동안 너는 여전히 아이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원칙을 깨는 것이 바로 아이이다. 아이에게는 그 암묵적인 사회적 룰에 대한 면죄부가 주어진다. 아직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있고, 배우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으로 아이의 이기적인, 어쩌면 잔인한 행동들은 쉽게 용서받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한때 너였다.

 

나 또한 아이였던 시절 치기어린 생각으로 한순간 잔인한, 너의 연년생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악마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고, 너와 같이 당시의 나의 처지에 만족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

 

너는 잔인하고 무감각하다고 느낄 정도로 무서운 성품을 지녔으나, 그리하여 순수하고 순진하다. 누군가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잔인한 너의 생각과 성품이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아이는 천사 같은 성품을 지녔다고 누가 그러던가,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이는 어쩌면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아이는 누군가를 상처내고도 그것이 상처주는 행동인지 모른다. 이 얼마나 순수하고 순진한가.


 

“너는 어째서 네가 돌아간 곳에서 다시 아이로 돌아왔는가.”

 

<고요한 인생> p.9 中

 

 

그리하여 너는 아이임을 유지함으로써 잔인하고도 고요한 너의 인생을 지켜낼 수 있었다. 사회 속에 너를 끼워 맞추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너만의 공간 속에서 남에게 보여지는 너의 모습은 상관하지 않고 그저 세상을 조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러한 너의 고요한 인생은 당연히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그러면 너는 너를 아는 자들의 기억을 없애고 네 이름도 영원히 지우고, 세상에 부유하는 너에 대한 추억까지 완전히 삭제 하여 아무도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가서 완전히 다른 아이로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다.

 

 

 

언니의 봄은 고요했다



[크기변환]언니의 봄.jpg

 

 

화자의 가족 중 난희 언니는 유독 운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러 방면으로 재능이 있었으나, 그 재능을 꽃피워야 할 시기에 집안에 기우가 들었고, 언니에게 주어진 기회는 없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고 집안일을 도맡던 언니에게 부잣집 신랑과의 결혼이라는 동아줄이 기적처럼 내려온다. 그것마저 썩은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얼마 안가 깨닫게 된 난희 언니는 그럼에도 온전히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언니는 언제나 이사를 꿈꾸고, 그러기 위해 하루 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 수선을 했다.

 

언니에게 있어 봄은 희망과 동시에 절망이었다. 언니는 봄에 결혼했고, 봄에 죽음을 맞이했다. 가장 가쁘게 희망을 품었던 그 시기에 봄은 매몰차게 언니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그런 언니의 봄은 단순히 운이 없었다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고요했다. 화자의 가족들은 난희 언니를 항상 걱정했다. 말그대로 ‘걱정’만 했다. 언젠가는, 때 되면 도와줘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지금 당장이야 어떻게든 자기 앞가림을 하겠지, 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 뿐인 걱정은 난희 언니에게 죄업으로 다가왔다.


 

“복권 한 장엔 일주일 내내 희망을 걸 수 있는 요술이 들어있거든. 그렇게 적은 돈으로 희망을 살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 아니겠니.”

 

<고요한 인생> p.81 中

 

 

복권을 사는 난희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에게 난희 언니는 복권을 사는 것은 희망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언니에게는 그러한 소소한 희망이 아마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동기였을 것이다. 적어도 당첨 날짜가 나오는 날까지 살아갈 힘을 줄 분량의 희망을 사고, 또 다시 다음 일주일을 살아가기 위해 몇 천원어치 복권을 사는 것이다. 그러한 소소한 희망으로 고요한 인생을 이어가던 언니는 이사의 꿈을 짓고 부수던 여느 때와 같던 봄, 돌연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이 세상과는 너무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여름은 늙어 지쳐서 잔인한 두 손을 축 드리우고 허하게 산야를 바라본다. 이제는 끝났다 여름은 그의 불꽃을 다 날려 버리고 그의 꽃을 다 태워 버렸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드러누워, 창백한 손을 싸늘한 죽음에게 주어 이제는 듣고, 보지 않으며 잠들어…..사라져…..가는…..”

 

헤르만 헤세-<여름은 늙어> 中

 

 

언니의 고요한 인생은 어쩌면 봄이 아니라 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막 싹을 틔우는 새싹처럼, 봄이면 피어나는 희망을 품고, 언제나 그 희망을 뒤따라오는 절망까지도 품어낸 나머지 언니의 여름은 결국 늙고 지치고 말았다. 봄에 심었던 불꽃은 어느 샌가 다 날려버리고 태워 버린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여름날, 언니는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던 고통을 끝내기 위한 답을 찾았을 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영원히 고요할 인생을 피할 유일한 방법을 언니는 택하였고, 화자를 포함한 언니의 가족들은 삶을 누리는 대가로 언니의 죽음을 평생 화인처럼 간직해야 할 것이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박다온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441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