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기검열을 뚫고 번뜩이는 그녀의 통찰이란 [도서]

버지니아 울프 산문집, '런던 거리 헤매기'
글 입력 2020.09.1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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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 여성의 꿰뚫는 통찰이란!


 

책을 열기 직전까지만 해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했다. 그녀가 페미니즘의 선두주자였으며 엄청나게 명석하여 그 시대에 정말 보기 드문 수재였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내가 그런 그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궁금증을 가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가장 유명한 '댈러웨이 부인', '3기니', '등대로'나 페미니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이 더 읽어보고 싶었던 건 맞지만, 이미 많은 이들의 논평으로 정의된 그녀의 모습보다 가벼운 산문을 통해 내 방식대로 먼저 그녀를 고스란히 이해해 보고 싶어서 이 책을 골랐다.

 

 

 

"런던 거리 헤매기"


 

여러 이야기가 적힌 산문집인 만큼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수록된 "런던 거리 헤매기" 는 완전히 의식의 흐름 기법대로 쓰여서 맨 처음 읽을 때는 이해하지 못해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뒤적여야만 했다. 그렇지만 구성이나 문체가 정말 매력적이어서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아 있다.

 

다음 챕터 "충실한 벗에 관하여"는 반려견이나 여타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꽤나 충격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 시대에 눈에 띄게 의식이 발전된 인물이었음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분들과 달리 동물권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낮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맨 마지막 부분은 그녀가 오만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요즘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남았다.

 

그 다음, 하워스에 관한 챕터를 읽을 때는 다시금 그녀의 식견에 감탄했지만, 순간 요즘으로 치면 방탄소년단 팬이 방탄소년단 박물관에 가서 감탄하는 것과 비슷한가? 싶어 웃긴 기분이 들었다. 관심 있는 주제의 차이만으로 똑같은 행동이 멋져보이기도, 그냥 그런가보다 싶기도 하다는 게 재미있다. 이 다음 '웃음은 인간의 고유한 행동이다'라는 메시지의 챕터 '웃음의 가치'를 읽으며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확실히 웃음은 생각, 사유의 산물이니까. 당장 나만 해도 하워드랑 방탄소년단을 동시에 떠올려 놓고 웃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다시 웃음(헛웃음?)이 났다.

 

"서재에서의 시간"은 꼭 21세기의 사람이 쓴 글 같아 인상적이었다. 100년도 더 이전에 살았던 사람의 생각이 요즘 사람 생각과 비슷하다는 점이 놀랍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어떤 사실, 어떤 통찰은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씁쓸하지 않나. 미래로 향할수록 그녀의 표현처럼 ‘존경의 능력을 제멋대로 탕진’하는 경향은 더 커질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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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도 직업을 가져라! 아, 예술가는 빼고.


 

마지막에 수록된 여성의 직업은 진짜 멋진 글이어서 모든 부분이 좋았다. 사실 내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기대했던 부분들, 그 이상이었다. 그녀처럼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야, 넌 젊은 아가씨야. 남자가 쓴 책에 관해서 쓰고 있구나. 공감을 보이렴. 다정하게 대하고. 아첨도 하고 속이려무나. 우리 여성의 온갖 기교와 간계를 발휘하렴. 네게 자기 나름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무나. 무엇보다도 순결해야 해.”

 

“여자는 이런 문제들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다룰 수 없다고 집안의 천사는 주장합니다. 성공하려는 여자는 상대를 매혹하고, 회유하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요. 그래서 나는 그녀의 날개 그림자인지 빛나는 후광이 내 종이에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때마다 잉크병을 들어 그녀에게 던졌습니다.”

 

 

무언가를 자유롭게 논평하는 여성은 당시 남성에게 충격과 위협이 되었다. 자신의 열정에 관해 진실을 말하는 여성에 대해 당시 남자들이 뭐라고 떠들었을지는 잠깐만 생각해도 머릿속에 훤하다. 이는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끊임없는 자기검열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예술가의 무의식 상태에서 강제로 깨어나게 된 여성들은, 그들의 상상력은 나래를 펼칠 수 없으리라.

 

한편 여담으로, 헌신적인 여성에 대한 묘사 중 닭고기를 먹을 때 항상 닭다리를 집는다는 부분에서 진짜 깜짝 놀랐다. 요즘은 닭다리를 양보하는 것이 미덕인데, 그 당시에는 닭다리가 맛없는 부위로 여겨졌나보다.

 

*

 

몇몇 조금 어려운 챕터를 제외하고는 후다닥 읽기도 좋고 재밌는 산문집이었다. 이제 그녀의 얕은 부분이나마 내 방식대로 이해했으니, 그녀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는 다른 책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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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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