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토해내기도 전에 삼키는 삶

무뎌진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글 입력 2020.09.0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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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봤던 봉천예술관.

무슨 안주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옷


 

지난 주말, 본가에 잠시 다녀왔다. 본가에 머무르는 이틀 동안은 몸 상태가 딱히 좋지 않았다. 몸이 부었고 소화가 잘 안 됐다. 잠도 개운하게 자지 못했다. 성인이 된 후 그곳에 갈 때마다 늘 있는 일이다. 몸이 이곳이 더는 나와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라고 반응하는 기분이다. 집 근처 동네를 거닐 때도 똑같은 이질감을 느낀다. 공간이 나를 밀어내는 듯한 중압감에 시달린다.

 

신경 예민이라는 건조한 말로 내 느낌을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가혹하다는 게 이 시점에서 내리는 결론이다. 그리 건조하게 단정 지으면, 내가 본가에 갈 때마다 짊어지고 오는 상처와 답답함이 별일 아니라고 무심히 축소되는 것만 같다. 원치 않는 보살핌과 불필요한 조언으로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간절기 신고식처럼 찾아오는 비염 기운을 드러낼 때마다 돌아오는 짜증 섞인 걱정에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마찬가지로 화살처럼 돌아오는 짜증과 경계가 모호한 욕설에도 상처가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깊게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면서 상처에 딱지가 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정도다.

 

딱지가 진지 얼마 안 된 부위를 긁으면 껍질이 벗겨지는 동시에 피가 솟구친다. 상처를 재생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이다. 집은 내게 매번 그런 경험을 안겨 왔다. 어렴풋이 기억 나는 유소년기의 몇몇 순간들과 비교적 선명한 청소년기의 기억들을 떠올려보면 늘 그랬다. 짜증을 내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본인들이 정작 고압적인 태도로 내게 일관했다는 걸 기억할까. 언성을 높이며 서로를 할퀴던 순간들은 내가 싸움에 휘말렸든 그렇지 않았든 언제나 내게 절망감과 죄책감, 두려움을 안겼다. 그런 자국들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숨겨야 바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말에도 울음을 삼켰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색깔별로, 사이즈별로 끊임없이 시착해보는 것. 그럼으로써 상처를 애써 숨기고 무뎌지는 것. 내 일상은 여태껏 그런 행동의 반복으로 점철되곤 했다. 제대로 아물지 않은 흉터들을 가리는 데에 한계가 왔을 시점은, 한국 나이 기준으로 성인이 되고도 2년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친한 친구의 죽음과 작은 외삼촌의 부고를 연달아 마주했던 초여름으로의 분기점에 반응이 왔다. 이제는 못 하겠어. 그 이후로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무거운 공기들을 직시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느껴 왔으면서도 애써 무시했던 가려움을 인지할 수 있게 됐다. 저는 미련하게 매번 버텨오고 있었군요. 그랬던 거군요.

 

 

 

눌러 담는 버릇


 

“너 같은 사람은 무언가를 좀 요구할 줄 알아야 해.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언니도 저랑 같은 부류니까 알잖아요, 잘 안 되는 거. 굳이 손 뻗어야 하나 싶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맨날 손해 보고 병 나는 거지. 사람이 좀 약게 굴어야 하는데.”

 

언니는 밥을 먹으며 내게 저런 일침을 날리고, 외동딸의 숙명 비스무리한 걸 나와 얘기했던 것 같다. 흔히 외동딸은 두 케이스로 분류된다. 응석받이로 자라, 자신에게 집중되는 사랑을 당연시하는 유아독존형 케이스가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역으로 혼자기 때문에 타인보다 많은 책임감을 짊어져야 한다고 정체화된 ‘그냥’ 독존형 케이스가 있다. 나는 절대적으로 후자다. 가족들은 내 심리를 헤아려줄 정도로 정신적인 여유가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주변부의 기류를 살피는 일에 스스로 민감해져야 했다. 침묵에 순응하는 일, 그게 참 야속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땅굴을 파고 기어들어 가곤 했다.

 

무엇이든 ‘삼키는’ 습관이 있다. 이를테면 희망 사항을 말로 내뱉기도 전에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 상대에게서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할 거라 단정하는 버릇이다. 소통을 포기하는 거다. 정확히는 소통을 망설이다가 역시 안 되겠거니, 하고 체념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 만약 상대방의 기호에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에게 민폐를 끼칠 테고, 결과적으로 나 또한 불편해질 테니 조금 버겁더라도 혼자 감내할 수 있는 일이면 혼자 해버리고 말자-라며 자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알아서 하겠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달고 산다. 독립심과 개인주의적 가치관, 그리고 책임감이라는 명목으로 타인에게서 자발적으로 멀어지곤 한다.

 

이게 그다지 건강하지 않은 습관임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람 없이 살아가기 불가능한 세상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벽을 쳐 버리고 혼자 골골대며 살아간다는 어려운 길로 굳이 선회한 셈이니 말이다. 지레 겁을 먹거나 귀찮음을 느끼고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확보하려는 태도에, 스스로도 진절머리날 때가 종종 있다. 더군다나 심할 정도로 몸을 혹사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끔찍한 버릇도 있어서 문제다. 이 때문에 강제적인 종용(같이 해라, 혼자 하는 일 아니다 등등)이 들어오지 않는 한 스스로 몸을 갈아 넣어 무언가를 성취하게 된다. 중압감만 가득 받고, 스트레스를 풀 곳은 마땅치 않아 또 혼자 내적으로 삼키고 눌러 담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반복한다.

 

얼마간의 불이익이 주어져도 그러려니 했다. 마음의 손상을 입는 날이 있어도 결과적으로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방향으로 감정을 조절했다.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 여겼다. 혼자 일을 떠맡건, 최대한 내게 편중되는 쪽으로 일을 분담하건 최종적으로는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타인에게 부담을 줄까봐 누구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고, 그게 옳은 방향이라 믿으며 나를 혹사시켰다. 그 과정에서 턱 끝까지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매번 삼키고 눌러 담았다.

 

 

 

그래도 디저트는 달다


 

언니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내가 너무 참고만 산다고 꾸짖는다. 하지만 나는 나의 이런 행동들로 인해 오히려 내가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임을 역으로 깨닫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희생하는 척, 부담을 끌어안는 척하면서 나름대로의 평판과 뚜렷한 정체성(철이 일찍 들었다, 그 나이 또래 같지가 않다)을 유지할 수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세뇌를 지속하는 편이 낫다. 집을 방문할 때마다 느껴지는 중압감을 인지했다고 한들, 삶의 양식 전반에 문제를 발견했다고 한들, 이미 몸에 밴 메커니즘을 벗어 던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말이다. 가혹한 일상을 굴레처럼 만들고도 멀쩡할 수 있으려면 이와 같은 나름의 합리화가 필요하다.

 

적응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상처 난 부위를 긁어 상처를 또 만들어내는 일을 반복하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겪을 때마다 나는 볼멘소리와 욕설을 내뱉을 거고, 때때로 내가 직면하고 있는 불합리함에 환멸감을 느끼며 일상에서 탈선하려는 마음을 먹기도 할 테다. 그렇지만 동시에, 디저트를 손에서 놓지 못하리란 사실도 명백하다. 디저트가 기도로 넘어가는 순간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단 기운을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숨이 닿는 데까지 삶을 인내해나갈 것이다. 낙관주의를 외치지는 않는다. 버티고 있는 게 기적인 나날이기 때문이다.

 

단지 최소에 가까운 교류로 최소한의 민폐를 낳고, 인간으로서 갖는 존재성에 책임을 다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미적지근한 끝맺음만큼이나 삶을 대하는 내 태도 역시 마찬가지로 미적지근하고 밍밍하다. 그만큼 지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해, 혹은 나를 둘러싼 환경에 커다란 원망이나 분노를 표현할 만큼 내게는 에너지가 충분치 않다. 체념에 가깝나.

 

편의점에 들러 브라우니를 사올까 한다. 기복이 심한 친구에게서 맛있다고 극찬을 받은 제품이다. 브라우니의 단맛으로 협심증을 억누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시간이 벌써 열 시를 넘겼구나, 문득 깨닫는다.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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