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유배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다, 영화 '여름날'

영화 <여름날>이 보여주는 고립의 의미
글 입력 2020.08.1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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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더위와 습도에 유독 약한 탓에 여름이 온다는 것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여름날의 한가운데에 서 있기만 해도 진이 쭉 빠져 쉽게 도통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라는 계절이 주는 어떠한 이미지는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흔히 여름은 정열적이고 활발한 이미지와 직결되는데 나는 오히려 여름에 활동성이 제로가 되기에 이 이미지에는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대신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모든 것이 들끓고 있지만 나만은 이 풍경과 상관없다는 듯이 차분한, 하지만 그 내부는 응축된 에너지가 들끓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좋다.

 

영화 <여름날>의 포스터를 보자마자 바로 관람을 결정한 것도 여기에 있다. 청명하게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이 가득한 여름날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주인공의 마음이 이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메인 포스터.jpg

 

 

<여름날>의 세계에서 주인공 승희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해 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고향 거제로 내려온다. 거제도에 와서 무엇을 할지, 얼마나 오래 있을지,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갈지 혹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지- 어떠한 계획도 없이 말이다.


한 시절을 지나 돌아온 거제는 그녀가 살았던 때와는 달리 집이 허물어져 있었고, 어머니의 짐은 한 컨테이너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마음 붙일 자리는 마땅치 않았다. 오랜 친구도, 삼촌도, 삼촌의 애인도 모두 낯설 뿐 몸이 성치 않으신 할머니와 가끔씩 시간을 보낼 때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영화는 이런 승희의 시간을 유배된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과거에 유배란 죄인을 먼 곳으로 격리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승희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거제도로 내려감으로써 승희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승희의 앞에 있는 것은 오직 시간과 넓게 펼쳐진 거제도의 풍경뿐이었다. 스스로를 유배 보낸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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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는 창고에서 낡은 낚싯대를 찾았고 낚시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제청년을 만난다.

 

거제청년은 승희보다 먼저 거제도에 내려와 조선소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이고 퇴근 후에 홀로 낚시를 즐기는 인물이다. 승희와 거제청년 모두 외로움과 무료함을 이기기 위한 행동으로 낚시를 택하는데, 낚시를 한다는 것이 고립된 자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는 거제청년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데 이것은 그가 승희와 가장 많은 합을 맞추는 등장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를 철저하게 낯선 이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오히려 낯선 이에게서 얻을 수 있는 미적지근한 따뜻함이 거제의 풍경과 어우러져 위로가 되기도 했다.

 

승희의 '유배 선배'라고도 할 수 있는 거제청년은 승희를 거제둔덕기성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고려 18대 왕 의종이 폐위된 후 살았던 성으로 거제 사람들은 '폐왕성'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인데, 영화 속에서 승희와 거제청년은 아주 더운 여름을 뚫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 그곳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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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과 같은 시선으로 낮게 깔린 구름 아래 펼쳐진 마을의 모습과 흐릿하게 보이는 수평선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이 장소가 폐위된 왕의 유배지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성 아래 일상의 공간이 아득하게 멀어보이면서 동시에 이곳에서만큼은 모든 시간이 유예된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승희가 폐왕성을 다시 오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 볼 여유가 사라진다. 누구나 일상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시 멈추어 다시 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조금 유예하여 오로지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여름날>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유배된 시간이자 고독의 모습인 듯 하다. 고독은 누구와도 연결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동시에 내가 나와 가장 강하게 연결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


보편적인 상업 영화를 보는 시각으로 <여름날>을 관람한다면 다소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중심 사건과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서사가 전개되는 선형적 플롯에 익숙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의 삶은 선형적이지 않다. 앞선 사건이 항상 이어지는 사건의 원인이 되지도 않고, 주요한 하나의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은 그저 흘러갈 뿐이고 사건은 그저 일어날 뿐이다. 서사화라는 것은 어찌보면 인위적인 과정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름날>은 불친절한 영화가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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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승희가 거제에서 보내는 일상들을 그저 ‘담아낸다’. 카메라를 여러 대 쓰는 대신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거제의 풍경과 인물들을 한 프레임 안에서 멀찍이 관조하듯 담아낸다. 이런 연출 방식은 보는 이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스크린 안 속 거제의 여름날 한가운데로 옮겨온다.

 

평소에는 영화의 모든 대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습관이 있는데 <여름날>의 대사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카페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 듯한 느낌이랄까. 너무도 일상적이고 극히 자연스러워 대사 한 줄 한 줄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나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자연스러움이 다름 아닌 '즉흥연기'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굉장히 놀라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탄탄히 직조해야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것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거쳤다니. 오정석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상황을 제시한 후 충분한 소통과 이해 후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보통의 영화와는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이러한 우연성과 자연스러움을 개입시킴으로써 <여름날>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더 있음직하게 만든 것이다.

 

*

 

홀로 폐왕성을 오른 승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렸고 엔딩 크레디과 함께 가수 이랑의 '평범한 사람'이 흘러 나온다. 평소 이 노래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반가워 가만히 앉아 듣고 있자니 가사가 <여름날>과 참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평범한 사람은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문득 슬퍼질 때가 있는데요

평범한 사람의 일기장 속에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요

(중략)

그런 불안한 질문들과 두려움들이 가여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이 나는 좋아요

지나가는 길에 그 집에 들어가보고 싶어요

 

- 이랑 - 평범한 사람 中

 

 

모두가 유난히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2020년의 여름이다. 의도치 않게 주어진 유배된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길까.

 

영화 <여름날>을 통해 유배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춘들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자. 그들과 함께 평화로운 거제의 여름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자신에 대한 질문의 답을,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찾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여름날
- Days in a summer -
  
 
감독/각본 : 오정석
 

출연

김유라, 김록경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08월 20일

등급
전체관람가

상영시간 : 82분

 

 

 

이지현.jpg

 

 

[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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