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구구절절한 기록과 삶의 힘 - 베토벤이 아니어도 괜찮아 [도서]

글 입력 2020.08.0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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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


 

가을이 무르익어 가던 즈음, 예고에 없던 한파를 몰고 왔던 지난 겨울을 기억한다. 일주일 사이에 거리 위 사람들의 패션이 얇은 자켓에서 두꺼운 코트로, 후드집업에서 패딩으로 바뀌었던 것도.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고집을 부리며 가을 패션을 고집하다 결국 감기에 걸리고 나서야 겨울옷을 주섬주섬 꺼내입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매번 비슷한 패턴이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던 즈음 따뜻한 기온과 풍경들에 맞춘 밝은색의 염색이 유행할 땐 꼭 새까만 머리를 고집하고 싶어지고, 마찬가지로 물건도 기억도 마음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미련 많은 성격이나 결정을 앞두고선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처음과 같은 결정으로 하는 우유부단한 면모까지, 시대를 잘못 타고나도 제대로 잘못 타고났구나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구구절절’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구구절절한 이야기와 시간은 무궁무진한 목소리를 품고 있으며, 구구절절할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엔 여유와 온기가 묻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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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베토벤이 아니어도 괜찮아」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만을 클래식의 전부로 여기지 않고 국악, 재즈, 팝 등으로 클래식의 틀을 넓히고 다양화하며 자신만의 클래식 목록을 만들어가는 중인 저자 최정동의 에세이다.

 

책에는 바흐부터 쇼스타코비치까지 정통 클래식 작곡가들은 물론이고, 몇 백 년 후 '제2의 베토벤'으로 불릴 현대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자까지 망라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누군가의 구구절절한 플레이리스트'로 이름 붙여 소개하고 싶다.

 

이는 삶을 구석구석 경험하며 읽고 쓸 줄 아는 이의 글이라는 감상으로부터 온 이름이다. 클래식 음악 서적이라기보다 그가 사랑하는 음악과 그 음악이 함께했던 순간들을 구구절절 써내려 간 기록 말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 글은 그의 시선을 따라서 읽고 들은 음악과 글에 대한 또다른 구구절절러의 감상이자 기록물이다.

 

 

 

Track.1 송창식, <밤눈>




 

한밤중에 눈이 나리네 소리도 없이

눈 내리는 밤이 이어질수록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한 발짝 두 발짝 멀리도 왔네

 

- 송창식, <밤눈> 중에서

 

 

냉방 중인 지하철의 끝 칸에서, 앉은 자리 반대편에 뚫린 창을 배경으로 송창식의 <밤눈>을 들으며 가사처럼 먼 데서 눈 맞는 소리를 따라서 저자가 있던 겨울로 갔다.

 

고교 2학년의 겨울방학을 산사(산사)에서 보냈다던 소년의 시절과 그 산사의 겨울 풍경을 자주 상상했다. 고시 공부에 매진하던 형들과 아랫마을로 은밀히 내려가 막걸리를 한 사발 하던 그 겨울밤. 주막에서 열 번도 넘게 돌아가는 송창식의 <밤눈>에 꼼짝도 않고 귀 기울이는 소년. 가게의 문을 밀고 나오는 순간, 열리는 문틈새로 영화처럼 마주한 진짜 ‘밤눈’. 그 풍경 앞 소년의 마음. 눈을 맞으며 다시 산사로 오르는 그 밤을 오래 기억시킬 사각거리는 발걸음까지.

 

다섯 페이지의 기록에 쓰이지 않은 소년의 나머지 시공간을 상상하며, 가사와 멜로디와 가수의 목소리와 LP판의 표지를 음미하는 동안 <밤눈>은 열 번도 넘게 돌아갔고 여름의 지하철은 열 번도 넘게 멈추며 문을 열고 닫았다.

 

 

 

Track.2 드뷔시, <영상>


 

한 단어가 새삼스러워지는 감각과, 사전을 펼쳐 그 의미를 조각조각 뜯어보는 과정을 좋아한다. 입안에서 여러 번 우물거려보기, 입밖으로 여러 번 뱉어보기. 단어 하나에 나만의 오롯한 생각이 담기면서 단어를 내 것으로 품게 된 듯한 구구절절하게 소중한 기억을 애정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이 대목에 저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였다. 피아노로 그린 인상(印象).

 

피아노로 인상을 그렸다는 표현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어딘가 흐릿한데 흐릿해서 아름다운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고, 살면서 '인상'이라는 두 음절을 발음했던 다양한 경우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인상(印象)이라는 단어를 오래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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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인상(印象)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을 의미하는 단어다. 도장 인(印)에 형상 상(象)의 한자를 쓴다. 어떠한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빠르게 그려내는 화가를 ‘인상주의 화가’라 칭하는 것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듯, 퍼즐 조각처럼 분명하고 정밀한 짜임새가 아닌 어딘가 불분명하고 모호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단어다.

 

그리고 저자는 드뷔시의 곡 <영상>을 '피아노로 그린 인상(印象)'이라 이름 지으며 그의 곡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문단 전체를 인용한다.


 

드뷔시 음반은 널리 알려진 명반이다. 미켈란 젤리의 <영상> 연주는 첫손에 꼽힌다. 그런데 입문 초기에는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뭔가 흐릿하고 모호했다. 제대로 뚜벅뚜벅 걷지 않고 갈지자로 비틀거린다는 느낌도 들었다. 바흐의 음악은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 상쾌하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소나타들도 고전적 뼈대가 만져진다. 그런데 드뷔시의 건반음악은 손에 잡히지 않고 허공에 흩어지는 연기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상을 솔직하게 풀어냈다. ‘다들 좋다는데 왜 나한테는 이상하게 들릴까?’. 그리고 마침 이 대목을 읽어가던 중에 귀로 흐르는 어딘가 낯설고 불편한 피아노 선율에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멈춰서 QR코드로 재생한 5분 가까이의 영상을 통해 이 곡을 여러 번 들으면서도, 이 곡의 어떠한 멜로디도 기억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곡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순간 드뷔시의 음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저자의 순간과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 것도 같다. 나아가 내 식대로 드뷔시의 곡에서 받은 그 ‘인상’을 표현해보자면, ‘어디로든 문’.

 

어디로든 문은, 어릴 적 즐겨보던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의 도라에몽이 가진 도구 중 하나였다. 도라에몽과 친구들은 그 문을 통해 언제든 또 어디로든 갔다. 문 하나를 두고 알래스카에서 하와이의 해변으로 해변에서 또 사막으로 넘나들던 그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동경하던 TV 앞 어린아이는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그 도구를 닮은 것들을 좋아한다.

 

드뷔시의 <영상>이 그렇다. 분명하고 명료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5분. 어떤 은하 속을 떠다니는 상상으로부터 금세 파도가 빠르게 일렁이는 수면 위를 달리는 상상으로 갈 수 있는 음악. 나는 드뷔시가 피아노로 그린 인상(印象)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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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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