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반도'와 재난 속 사라진 여성들 [영화]

연상호 <반도>
글 입력 2020.07.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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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지난 15일 개봉해 죽어가던 극장가에 긍정적인 신호를 주고 있다. 현실의 코로나19와 난민 이슈를 생각할 때 소재 또한 시의적절하다.

 

<부산행>에서 최후의 안전지대로 제시되었던 부산은 안전하지 않았으며, 남한의 국가 체제는 단 하루 만에 무너진다. 정석은 어렵게 탈출해 홍콩에 정착했지만, 탈출 중 누나와 조카를 잃어 죄책감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콩의 한 조직으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고 매형 철민과 함께 반도로 향한다.

 

4년 후의 반도는 폐허 그 자체다. 제한 시간 내에 돈다발이 든 트럭을 확보해 반도를 빠져나와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던 중, 정석과 일행은 대규모 좀비 무리와 631부대와 맞닥뜨린다. 위기의 순간, 정석은 준이와 유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뒤이어 민정과 김 노인을 만난다.

 

민정은 준이, 유진, 김 노인과 가족을 이뤄 ‘들개’처럼 살아가고 있고, 631부대원들은 폐허 위에 군림한 무법자다. <반도>는 인간성을 잃은 이들과 인간성을 지켜나가는 이들의 대립을 통해 재난 속 ‘인간’을 보여준다.

 

 

 

반도 속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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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는 여성 캐릭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영화에서 운전대를 잡는 이들은 거의 여성이다. ‘여성’이면서 ‘미성년자’인 준이의 카체이싱은 신선했고, 총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민정의 모습 또한 매력적이었다.

 

차 운전대를 잡은 여성, 총을 든 여성, 다 좋다. 나이와 성별의 클리셰를 전복시키려는 나름의 시도였다. 한 마디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다.

 

그런데, 영화 초반부터 속에서 묘한 반항심이 올라왔다. 하필 준과 유진, 두 여자아이가 낯선 청년 정석을 발견할 이유는 무엇이며. 또 쿨하게 차 문을 열어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갈 이유는 무엇인지. 심지어 정석은 건장한 남성이며 총까지 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아포칼립스 그 자체인 반도에서 이런 질문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납득’하면서 영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말이다. 여자들이 사라졌다.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 택시 운전사 중년 여성, 민정, 준이, 유진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없다.

 

631부대 기지 내에서도 여자 구성원은 찾아볼 수 없다. 여자 '들개' 또한 등장하지 않는다. 631부대는 원래 좀비 사태 초기에 민간인들을 구조하기 위해 투입된 군부대다. 이들이 남자만 골라서 구출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4년 사이에 여자들이 반도에서 사라졌다는 건데, 왜일까?

 

 

 

재난 속 여성들


 

좀비는 사람을 가려 물지 않는다. <반도>에서 여성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좀비들이 여자들만 노려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난’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재난’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연적인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반도>의 풍경이 이질적이다.

 

재난의 영향력에 관한 연구는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재난의 영향은 불평등하며 차별적이다. 재난 발생 시 모두의 취약성이 증가하지만, 그 안에서 차이를 보인다. 재난은 사회적인 것(인종, 젠더, 계급 등)과 불가분리적 관계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취약성이 더 높고, 재난의 피해에 크게 노출되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연상호 유니버스의 좀비는 사람들을 가려가며 물지 않지만, 사회적 규범은 차별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젠더’와 ‘재난’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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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부대의 첫 모습을 상상해보자. 좀비 사태 초기에 민간인들을 구조하며 하나의 안전지대를 구축했을 거다. 이 곳에는 남성, 여성, 어린아이, 노인 등 다양한 민간인들이 있었을 터다. 하지만 좀비 떼가 들끓는 환경에서 무작정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외부로 수색 정찰을 나가 부족한 식량과 물자를 확보해야 한다.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위협하는 좀비를 처리해야 한다.

 

여기서 민간인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자.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생물학적, 생리학적 특성으로 인해 밖으로 나가 위험하고 더러운 일들을 하기 적합하지 않다. 소극적으로 임했을 수도 있다. 철저히 고립된 631부대 입장에서, 민간인 여성들은 짐 덩어리다.

 

혹은 구조 전, 여성, 아이, 노인 등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은 빨리 좀비에게 물렸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초기 631부대가 구해낸 민간인들의 성비가 애초에 불균형했고, 남초 현상이 두드러졌을 수도 있다.

 

기지 내에서는 여성의 신체적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재난 상황에서 여성의 신체적 안전을 위협하는 새로운 상황들이 관찰된다. 재난 직후에는 여성의 강간, 성폭력 위험에 대한 노출도가 높아진다. 이재민 수용소에서 강간을 당한 사례, 구호물자를 배급하여 주는 요원에게 강간을 당한 사례,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 사례, 여성 전용 화장실이 없어서 강간을 당한 사례, 강제혼 등의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여성은 재생산, 보건 분야에서도 취약하다. 특히 임신 여성인 경우, 산과 진료 없이 방치되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분만하거나 유산까지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에게는 생리대, 피임약 등의 물품과 약품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반도>에서 631부대의 기지는 버려진 대형마트다. 그렇기에 초반에는 이러한 물자 조달이 원활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물자는 한정되어있고, <반도>의 시점은 <부산행> 이후 4년이다.

 

재난 상황에 여성에게 가중되는 역할 또한 살펴볼 수 있다. 여성 사망자가 높은 상황에서는 노인과 아동 돌봄의 의무, 자녀교육, 가사의 역할이 생존 여성 몇몇에게 집중된다. 또한 평소 사용하던 것들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일반적인 노동량이 늘어난다. 이러한 추가 노동은 돌봄과 가사와 병행되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 부담은 가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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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재난 후 여성이 직면하는 취약성은 연구를 통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사실, 각 사회 문화에 따라 젠더의 구성물(인간관계, 역할, 규범 등)이 다르기 때문에 재난과 젠더의 관계를 완전히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국가별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연재해 당시 사망률의 남녀 격차는 작다.

 

하지만 ‘젠더’를 사회 조직 원리로 삼고 있는 한, 젠더에 따른 차별적인 재난 취약성은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또한 <반도>의 ‘사라진 여성들’이라는 텍스트에 집중했을 때, 우리는 앞서 제시된 이야기들을 통해 나름의 추리와 생각을 할 수 있다.

 

<반도> 후반부에서 민정은 서 대위와 마주친다. 민정은 그를 알아보고, 서 대위도 민정을 기억한다.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부대 지휘관이 피난민을 기억할 정도면 나름의 사건이 있었을 거라 추측된다. 민정이 631부대원들을 ‘미친놈들’이라고 부른 걸 보면 딱히 좋은 인연도 아닌 것 같다.

 

기지 내에는 여자가 한 명도 없고, 민정은 그곳을 탈출했다. 631부대원들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급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을 유흥거리로 소모한다. 민정과 631부대, 여성과 남성 중심의 군부대. 악연이라면 악연이다.

 

이러한 <반도> 속 정황과, 재난 속 여성이 맞닥뜨리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나름의 결론이 만들어진다. 분명히, 631부대 기지에 여성 민간인들이 존재했을 거다. 그 수가 적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 존재하긴 했다. 4년 후, 기지 내의 여성들이 사라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먼저 좀비에게 물렸을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어떤 상황’이라 함은 생물학적, 생리학적 특성뿐만 아니라 젠더 역할과 관계에 관한 사회 구성물과 여기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불평등까지 아우른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 중 한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여자들은 재난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고 모린 포덤은 말한다. 젠더 때문에, 그리고 젠더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를 고려하지 않는 사회 때문에 죽는 것이다.”

 

 

 

반도, 재난 이후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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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이 여성의 취약성만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재난이 여성들의 숨겨졌던 역량을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관점의 연구 또한 존재한다.

 

<반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민정은 능숙하게 총기를 다루고, 거침없이 트럭을 운전하며 강인한 전사의 모습을 보인다. 준이는 한 치의 틈을 보여주지 않는 운전 실력으로 좀비 떼를 무참히 밟는다. 유진 또한 RC카를 이용해 좀비를 유인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역량을 드러낸다.

 

631부대의 대척점에는 이러한 민정의 가족이 있다. 4년 전, 살아남은 민정은 631부대에서 탈출해 김 노인, 준이, 유진과 함께 모계 중심의 일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정석의 목숨을 구해내고, 탈출을 돕고, 영화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 모두 민정과 그 가족 덕분이다. 여성, 노인, 아이로 구성된 이 가족은 <반도>에서 제시되는 희망의 끈이다.

 

연상호 감독이 631부대와 민정 가족의 기원을 다룬 이야기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드라마가 될지 단편이 될지는 모르지만, 감독은 이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다. 해당 작품에서는 <반도>를 보며 품었던 의문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반도>에서 민정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가 ‘모성’이라는 게 아쉬웠다. 만약, 속편이 제작되어 민정 가족의 기원을 다룬다면, 더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재난 속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살아남으며, 그 힘을 보여줄지. 또 다른 상상력을 기대해본다.



참고자료

 

장은하 <자연재난과 젠더> (2015)

허라금 <젠더 관점에서 본 아시아 여성의 재난 취약성> (2012)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보이지 않는 여자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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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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