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 안의 차별주의자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글 입력 2020.07.2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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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처럼

너무도 평범한 말이

차별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유기농 음식을 먹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도

차별적 행동이라면 인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정치에 관심 없어요”

라는 말이 엄청난 특권 행위라 한다면 믿겠는가,

 

 

*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의견과 가치관, 생활방식이 옳은데

남들이 뭘 몰라서 저러는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결단코 한 번도 없는가?


 

『내 안의 차별주의자』

_라우라 비스뵈크

 

 

내 안의 차별주의자_평면_인쇄용.jpg

 

 

[PRESS]

내 안의 차별주의자

 

 

충격적이지 않은가. 필자도 책을 읽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우연히 보게 된 책 소개를 읽으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차별’은 아무렇지 않게 다루거나 입에 담기 쉽지 않은 예민한 단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차별은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지금까지도 비틀어진 사회의 초상을 말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일 것이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예전보다 많이 퍼져 있는 것 같다가도 여전치 차별의 사건이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차별과 그것이 일으킨 불평등이란 화두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얘기할 수 없다는 건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장 오늘도 뉴스와 누군가의 처절한 호소를 보며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뇐다. 나의 가벼운 생각이 차별이 아니었는지 고민하고 어려운 문제일지라도 최대한 바른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부끄럽지만 나도 모르게 차별을 가했었다면 기어이 반성하고 고치고 싶다. 늘 그런 생각을 품어오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차별주의자>와의 첫 만남은 너무도 강렬하게 다가와 내면에 당황스럽고도 조용한 압박 면접 같은 것을 일으켰다. 책은 주제만큼이나 묵직한 충격과 날카로운 지적을 예비 독자인 필자에게 인사 대신 건네며 지금 자신을 다시 돌아보라고 권유하는 것만 같았다. 저 말들이 정말 차별의 맥락에 있었다면 정말 나의 견해와 내가 해온 말들에 대해 다시 성찰을 시작해야 함이 분명하지 않은가.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상식도 개념도 없는 멍청이일까? 난민과 이민자는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안전을 위협하는 잠재적 범죄자일까? 매일 출퇴근하며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는 직장인은 비루한 월급의 노예인가? 우리 생각은 옳은데 저 소수의 ‘멍충이’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사회는 점점 흉악해지고, 안전은 위협받고,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마저 놓친 건 아닐까?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이런 생각을 단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와 사회를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 출판사 서평


 

한 개인이 자신을 스스로 정의하는 신념, 취향, 상식이라 생각한 것에 차별이 숨어있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라는 너무도 평범하고 희망적인 것으로 언급되는 말이 차별이 될 수 있다면 어떻겠는가. 저자 라우라 비스뵈크는 이에 대해 몇 년 전 유명했던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인용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에게 하듯 자신의 일에 충실하세요. 그럼 당신의 일이 당신 삶의 큰 부분을 채울 것입니다. 진실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위대하다고 믿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


이 짧은 몇 문장에 ‘당신’과 ‘자신’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온다. 미야 토쿠미츠 역시 <열정 절벽>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고, 열정적이고 성실한 노동자의 이미지를 구축해온 스티브 잡스가 이토록 강하게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플의 성공을 잡스 개인의 사랑과 열정의 결과인 양 선정하는 것은 지구 반대편의 애플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수천 노동자의 땀과 노동을 외면하는 짓이다. 스티브 잡스가 일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다 이들의 노동 덕분이다.

 

_Chapter1. 일 -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지상 명제

 

 

저자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명제 뒤에 숨어있는 사회 구조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 구조에 아무렇지 않게 맞춰져 숨어있던 차별을 낱낱이, 그야말로 해부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저자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는 말이 사실은 위장되고 은폐된 엘리트주의라고 말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 그 명제에 그리고 그 명제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우리에게 질문한다. “경제적, 사회적 부담 없이 항상 열정만 좇으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직업을 돈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것으로, 열정을 위한 것으로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다.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더니 끝내 성공했다, 그러니 당신도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말했던 사람들은 진정 누구였는지 말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해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익숙하게 언급되지만 그만큼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뒤로 밀려나 잊혔는지 질문할 수 있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유롭고 엘리트적인 삶을 살았다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다. 분명 사회적, 경제적으로 불리한 배경을 내디디고 성공한 이들도 있다. 또한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는 것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것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의 핵심은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는 결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한 것으로 다가올 수 없는 명제가 모두에게 동일한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 이에 기대어 일어나는 압박과 차별들이다. 그러기에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한다.

 

저자는 쉬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라는 명제를 해부하고 그 뒤에 숨어있던 은밀한 차별을 지적한다. “좋아하는 일”이라는 말이 일으킨 일에 대한 지나친 낭만화(좋아하는 분야의 일이더라도 그 모든 일이 좋아하는 일만이 될 수 없다), ‘열정’과 ‘헌신’을 중요한 직업관으로 두며 뒤로 밀려난 실질적인 임금과 복지에 대한 담론(자기 일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그것은 개인의 탓이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 모두 개인의 문제로 전가된다), 직업이 항상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 되면 일에 대한 비판을 곧바로 자아에 대한 비판으로 돌아가며,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일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좋아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직장인은 자아실현에서 밀려난 불행한 월급쟁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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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우리는 ‘차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어떻게 존재하는지 다시 되짚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단지 바로 눈앞에서 선명한 경계선을 그으며 ‘너는 나와 달라’라며 직설적으로 조롱하며 드러내는 것만이 차별인가?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건만이 불평등과 차별의 존재를 알리는 것인가? 필자는 도서를 읽으며 그러한 차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은 단순히 개인의 무지와 의도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무지한 개인에 의한 것으로 초점을 맞추어 ‘차별하는 사람’만 찾아 비판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의 차별만 우리 앞에 드러날 뿐이다. 필자가 이해한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보다 차별의 존재와 그것이 사회 구조 안에 자리 잡은 방식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까지도 깊이 이야기되지 않은 차별의 존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렇게 저자가 책 한 권에서 하나하나 해부하는 차별의 수는 일, 젠더, 이주, 빈부 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 8개의 주제 아래 무려 16개나 된다. 정리된 수로는 16개의 차별이라지만 더 나아가 각각의 차별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차별과 불평등까지 그 뻗어가는 가지 수를 상상해보라.

 

많은 차별이 사회 구조 안에, 상류층과 언론의 언어와 의도 안에,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와 기업의 속삭임 안에 은밀하게, 전혀 없는 것처럼 숨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차별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의 말과 권유를 따르며 의도치 않게 차별에 동조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모든 것을 전시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현대에는 자신을 남과 다른 우월감이 있는 존재로 과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경계선을 긋는 차별도 일어나고 있다.


*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유기농 음식을 먹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도 차별적 행동이라면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가진 신념, 철학, 행동이 사회적 구조와 맞물려 어떻게 차별로 변질되는지 적나라하게 목도할 수 있다.

 

- 출판사 서평

 

 

아마 글의 시작에서 가장 의아했을 문장에 대한 것이 될 수 있겠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유기농 음식을 먹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이 왜 차별이란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선택이고 신념이지 않은가. 필자가 이해할 때 저자는 단순히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유기농 음식을 먹고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이 차별이고 그래서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지적은 어디에 향해있는가?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런 말들을 내세우고 전시하려는 사람의 욕망과 태도를 향해있다. 당신은 진정으로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신념과 가치를 위해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 그것을 왜 소비를 통해 이루려고 하는가? 그렇지 못하는 사람을,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 돈을 쓰고 실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단지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며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의식있는 식습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 계급의 우월함을 표현하고 사회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_Chapter 6. 소비 - 도덕적 우월감

 

 

우리는 소비가 자아를 정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소비한 것은 곧 나의 정체성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들에는 사람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달리고 있다. 맛있는 빵이 아니라 ‘정직한 빵’이다. 좋은 셔츠가 아니라 ‘성실한 셔츠’다. 그냥 제품이 아니고 ‘환경을 위한’ 제품이다. 그 물건을 소비하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그냥 빵이나 옷을 사고 그냥 일반적인 제품을 사는 사람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인스타그램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올린다. 내면에 스스로 되새긴 ‘남들과 다른, 환경을 생각하는 나’를 외부로 선언하며 조용히 선을 긋는다. 그리고 기업은 그 우월감의 메커니즘을 통해 광고하고 속삭인다. 그래야 소비를 지향할 수 있으니까.

 

 

전도유망한 소비 세계는 끊임없이 욕망을 일깨운다. 계속해서 새로운 자극을 주어 이미 없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 이번에는 친환경 제품을 구매해보라고 부추긴다. 녹색 제품과 서비스를 선택한 사람들은 두 가지 목적을 이룬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개인의 목적과 기업의 매출과 성장 (...). 공정 제작 스마트폰이나 플라스틱 병을 재활용한 배낭을 구매하는 것은 소비재를 더 집중 소비하면서도 양심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제품 제작의 환경만을 고려할 뿐, 진정한 환경 보호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소비를, 제품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 테고 나아가 더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기업에 유익하지 않으며 소비 지향적 상류층의 자기 과시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 환경에 더 유익한 다른 전략들도 많지만 그것들 역시 도덕적 과시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

 

_Chapter 6. 소비 - 도덕적 우월감

 

 

질문해보자. 환경을 위하는 것이라 말하는 제품을 ‘소비’하는 것이 진정 환경을 지키는 방법인가? 그것을 소비하며 자신이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사람 중 진정한 환경의 보호와 그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유기농 제품을 소비하는 우리는 그 제품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기업이 그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지킬 수 있다는 환경은 정말 환경의 어느 부분과 문제를 말하는 것인가. 환경을 위한 진정한 가치 추구가 소비에만 있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소비가 가능한가? 환경을 생각하는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기회와 조건이 마련된 사람만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윤리적 가치 추구에 대한 충분한 소통이 있기 전에 이미 윤리는 소비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소비가 한 사람의 윤리적 인식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고 이는 이어서 신분 의식이 되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윤리적 소비’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럴 수 있는 사람보다 윤리적이지 못한 것처럼 인식된다.

 

소비의 방식으로 개인의 도덕성을 가늠하고 판단하는 것은 불평등의 문제로 이어진다. 저자에 의하면 사실 환경 보호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기 때문이다. 빈민들은 유기견을 입양할 수 있는 조건이나 친환경 제품을 소비할 만큼의 자본과 여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도덕적 소비’를 전혀 실천할 수 없는 그들이야말로 낙후된 환경에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위치에 몰려있다.

 

 

지속 가능성과 관련된 불평등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세계적으로 볼 때 국가 차원에서는 굳이 환경 보호를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이 특권이다. 서구 국가들은 거침없는 자원 낭비와 흥청망청 라이프 스타일의 악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환경 문제 유발에 가장 기여도가 낮은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다. (...) 독일 같은 복지 국가들이 못쓰는 전자 제품을 가나로 실어 보낸다. 그 결과 폐기된 전자 제품의 화학 물질에서 나온 발암 성분이 인근 주민들과 아크라 앞바다의 물고기에 침투한다. (...) 한 나라 안에서도 특권층은 환경 영향을 훨씬 덜 받는다. 도시 빈민들은 대부분 유해물질 오염과 차량 소음, 열섬 현상이 높은 지역에 거주한다.

 

_Chapter 6. 소비 - 도덕적 우월감

 

 

저자는 글의 끝에서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개인의 실천과 도덕적 우월감을 과시할 수 있는 방식을 반복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함께 가야 하지 않는지 우리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무지한 인간들’이라 생각하며 배제하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지 않은지 질문한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방어의 안전지대에서 걸어나오라고 애걸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들여다보는 쪽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정직한 공동체는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물질적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도덕적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각을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_Chapter 6. 소비 - 도덕적 우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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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글의 시작에서 ‘차별’은 아무렇지 않게 다루거나 입에 담기 쉽지 않은 예민한 단어라고 말했었다. 그만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도서를 정해진 기간 내에 일독하고 그 내용을 충분히 잘 소화해내서 충분히 공유할만한 글을 쓴다는 것은, 필자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누군가의 글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필자의 리뷰는 책 속 여러 주제 중 일부만을 다루고 있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소 급한 흐름으로 완성된 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금은 불충분한 리뷰가 될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 이는 한편으로는 그만큼 <내 안의 차별주의자> 본 도서에서는 차별을 명료하고 섬세하게 해부하며 낱낱이 분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는 도서를 리뷰할 때마다 추천하고 싶은 분들을 생각하곤 하는데 <내 안의 차별주의자>야말로 모든 분께 일독을 권하고 싶은 도서다. 차별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분들,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했던 분들, 차별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던 분들, 자신이 차별주의자라 생각하지 못했거나, 자신의 생각이 차별이 아니었는지 고민해봤던 분들 등 사회 곳곳에서 차별을 마주하고 있을 모든 분께 이 도서를 추천해 드리고 싶다.

 

저자는 독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책의 제목을 빌려오자면 자신 안에 차별주의자를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의미일 테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책 속 8가지 주제인 일, 젠더, 이주, 빈부 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에 따라 분류되고 라벨링 되는 시대라는 사실은 불가피한 차별의 존재를 더욱이나 선명하게 부각한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오히려 ‘나는 이런 사람들과 달라’, ‘나는 그렇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선을 긋는 것은 차별이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발언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일 테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를 읽는 과정은 개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사회적인 구조와 관념 아래에서 차별이 일어나고 일어날 수 있음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채 오고 가는 평범한 말들이 얼마든지 차별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자신과 사회의 모습에 대해 반추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필자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결론이 아닌, 그 뒤로 끊임없이 이어질 질문과 성찰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나의 의견과 가치관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여 그저 받아들이는 태도만으로도 차별이 일어나는 것에 동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근본적인 것에서, 조금 더 당연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차별을 없애야 한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나와 다르고 무지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등을 돌리거나 그들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이해를 위한 소통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는 ‘차별하기 때문에’ 반드시 배제되야 하는 사회를 원하는 걸까, 아니면 모두가 소통하며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자극적이기에 겉으로 드러난 거친 말들과 단정지어버린 개인의 생각에 휘말려 처음부터 비로소 해야 할 질문을 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평범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의 차별적 시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역으로 사회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모두가 불평등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는 일원이 될 수도 있음도 상기시켜준다. 우리가 지금까지 ‘저들’이라고 불렀던 사람이 어느날 곧 내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 출판사 서평

 


 

[도서 정보]


경계 짓기, 소속감, 인정 욕구 뒤에

숨겨진 독선과 차별의 민낯

내가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차별적 시선을 짚어주는 책

 

 

『내 안의 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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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라우라 비스뵈크


옮긴이

장혜경


분야

사회문제


정가

16,000원


쪽수

260쪽


출판사

심플라이프


출간

2020년 7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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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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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Y2eon
    • 오예찬 님이 글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현대인은 무의식이 빚어내는 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아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겠죠. '과시'가 만성화되고, 일상의 당연한 일부로 편입되면서 더욱 그런 경향이 심해지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시를 들어주신 것처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영향도 크겠죠. 무언가를 가시적인 동시에 비가시적으로 과시해서 나다움과, 나의 영향력을 전시하려는 욕망이 특히 오늘날 사회에서 극대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을 보면요. 어쩔 수 없는 일에 가깝겠죠. 이렇게 염세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저조차도, 나는 이렇게 염세적이고 어딘가 어긋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정체성을 타인에게 과시하려는 때가 종종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참 비뚤어진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차이를 인정하는 게 아닌, 차이를 바탕으로 위계를 확립하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차별'은 잘못된 행동이 맞으니까요. 그런 차별이 더욱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이기에, 더욱 조심하면서 살아가려는 태도는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기회가 되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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