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의 궤도를 걷는 우리에게 [도서]

김애란 <서른>
글 입력 2020.07.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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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잔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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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온도가 희미해지고 짙은 적막만이 남아있는 시간을 뜬 눈으로 마주하면,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생각은 그리움으로 이어지고, 기억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첩을 열어 그때의 흔적을 좇는다. 익숙한 시간의 안락함이 사랑스럽다. 옛 시절을 애틋이 여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나이가 찰수록 그 횟수가 많아진다.

 

불안의 궤도를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벌써 이런 고민을 하는 나이라니. 허겁지겁 시간을 쫓다 보니 지금이다. 대학 졸업과 취업 준비를 앞두고, 해내야 할 일들을 해치우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면 문득 궁금해진다. 이 순간을 버티고 또 버텨 내다 보면 일 년 뒤, 이년 뒤, 그리고 서른에, 나는 바라던 ‘무언가’가 되어 있을까?

 

이상하다. 내가 그려왔던 청춘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가만히 누워 새까만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종종 추락하는 듯, 쿵-하고 떨어진다. 이윽고 찾아오는 불면의 시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런 기분을 안고 살아가는 이가 나만은 아닌듯하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너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김애란의 단편 <서른>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으니 너도 한 번 읽어보라고. 그렇게 <서른>과 만났다.

 

 

 

잠기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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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화자 수인은 편지의 형태로 자신의 지나간 10년을 고백한다. 수인은 노량진 고시촌에서 재수를 하며 스무 살을 보내고, 불문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성적 장학금도 받고, 근로 장학생, 학원 강사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학비와 생활비 충당이 쉽지 않다. 어찌어찌 졸업하는데 칠 년이 걸린다. 사회초년생인 수인에게는 천만 원가량의 학자금 대출이 쌓여 있고, 여유가 없던 집안은 사고로 폭삭 주저앉는다.

 

변변찮은 직장을 갖지 못하던 중, 수인은 예전 남자 친구에 의해 다단계 업체를 소개받는다. 다단계 합숙소에서 사실적인 배고픔에 시달리며 영업을 뛰던 수인의 인간관계는 점점 어그러진다. 결국 수인은 학원 강사 시절 자신을 살갑게 따르던 제자 혜미를 자신의 자리에 넣고 그곳을 뛰쳐나온다. 혜미는 수인에게 연락하지만, 수인은 답하지 않는다.

 

혜미의 문자는 어느 순간부터 뜸해지고, 수인은 혜미가 자살을 시도해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보통의 삶을 살고자 했던, 어쩌면 열심히 살았던 수인은 지금 불행하다.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 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고해성사처럼 펼쳐지는 수인의 이야기는 불편하다. 견디기 힘든,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다. 수인의 삶은 우리네 불행을 모조리 모아 투사한 듯, 눅눅하고 우울하다. 작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우리는 <서른>을 읽으며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와 너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서른>과 수인의 편지에서 읽히는 건 ‘우리’다. 뭘 더 해야 할지. 무얼 더 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들.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 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읽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장에 콕- 하고 박혀 잊히지 않는 문장이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시간을 걸어왔지만, 결국 나에게 남은 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의 칸칸을 채우는 몇 마디인 것 같아 서럽다. 버텨내야 할 시간과, 세월이 만들어낼 나의 모습이 무섭다. 지나온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겁이 난다. 말과 글로는 요약할 수 없는 시간들이, 몇 줄, 몇 단어,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버릴까 불안하다. 불안을 넘어, 혹시 더 나쁜 것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자란다.

 

김애란의 <서른>은 희망과 현실의 간극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공감하기 싫었지만 공감했다.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간극의 틈에 머문다. 내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게 그저 ‘꿈’이듯, 한 순간의 ‘행운’을 바라듯, 바라는 바는 어떻게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에 서린 바람의 자취를 뒤쫓다가 내가 서있는 땅을 내려다볼 때, 우리는 우울과 불안의 잔파도에 휩쓸린다. 현실은 엉망진창이고, 섧다. 불안의 궤도 안에서 저 멀리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쉼 없이 달려봤자 제자리다. <서른>에서 인정하기 싫은 삶의 형태를 보고, 인정하니 오히려 위로가 된다.

 

‘만일 언니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아마 제가 혜미가 있는 병원에 찾아갔다는 뜻일 거예요. 그게 아니면 여전히 아무것도 못한 채 주저하고 있다는 의미일 테고요.’ 언니가 수인의 편지를 읽었는지, 편지를 읽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낀다. 불안과 불운 안에서, 움직였구나. 언니에게 편지를 써 부치고, 혜미를 찾아갔구나. 삶을 이어나가는구나. 문득 치미는 안도에 온기를 느끼고, 결심하게 된다. 미래를 바라지 말자. 바라는 현실을 살자. <서른>은 누군가를 따뜻하게 감싸지 않는다. 어느 겨울, 찬 기운을 잔뜩 맞다 무심결에 내쉰 입바람에 실린 온기에 가깝다. 미약한 기운이지만 충분하다. 간절히 바라던 모습과 현실의 간극 사이에 괴인 우울 속에서, 잠기지 않고 꿈틀거릴 수 있는 기운.

 

 



[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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