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망을 호흡할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 [문학]

글 입력 2020.07.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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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헤르만 헤세의 말을 발췌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비참한 상태에 있을 때, 고통의 한계까지 시달렸을 때,

삶 전체를 화끈거리고 욱신거리는 하나의 상처라고 느낄 때,

절망을 호흡하고 희망이 사라져 버렸을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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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62)의 한 장면

 

 

 

0. 신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세상에서


 

지독히도 어둡다. 어둡고, 폐쇄적이고, 그래서 우울하기까지 하다.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1846)부터 대표작 『죄와 벌』(1866),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79~1880) 등에 이르기까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Ф. М. Достоевскйи, 1821-1881)의 소설들은 참 한결같다. 시베리아 유형을 기준으로 창작의 전ㆍ후기를 나누기는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한결같이 풍기는 우중충한 분위기는, 한 페이지만 읽어도 ‘도스토예프스키가 또’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시궁창같은 현실, 자폐적이며 자의식으로 가득찬 오만한 주인공, 누군가의 자살 또는 살인, 끊임없는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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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1872)

 

 

좋게 말하면 자기 색깔이 뚜렷하고, 나쁘게 말하면 꾸준히 우중충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어쨌거나 사람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 그가 세계 문학에 끼친 영향은 말해 무엇하랴.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상에 준 깊은 영향과, 알베르 카뮈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는 사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의 모(母) 텍스트라는 점 등은 그의 소설이 가진 마력과도 같은 힘을 잘 보여주리라.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인 영향력보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배경에는 그가 7년 전, 고등학생이던 필자를 단숨에 사로잡아 노어노문학과로 입학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있다. 실제로 근 30년 동안 노문과에 입학한 적지 않은 학생들의 선택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거대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평생을 가난, 도박, 간질에 시달리며 폭풍우 같은 삶을 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모두 그를 닮아있다. 거칠고 어둡다. 그러나 시대를 넘나들어 전 세계의 독자들을 매료시킨 이 작가의 힘은 그 거친 어둠 너머에 존재하는, 지극히도 맑아서 울컥함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순수함에 있다. 그만큼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영민하게 감각한 작가가 있었을까. 마초적인 ‘겉바속촉’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고통을 체화한 이 작가의 아름다울 정도로 순수한 시선을 소개하고 싶다.

 

 

 

1. 존재의미를 상실한 ‘라스콜리니코프’ 형 인물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기존 인물의 끊임없는 변주같은 느낌을 준다. 그의 인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표작 『죄와 벌』을 기준으로, 자기분열적이고 극단적 우월감과 열등감을 넘나드는 이론가 ‘라스콜리니코프’ 유형과, 그에 대비되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려는 종교적 구원자‘소냐’ 유형이 있다.

 

‘소냐’ 유형의 인물(‘소냐’(『죄와 벌』), ‘므시낀 공작’(『백치』), ‘알료샤’(『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 확립된 『죄와 벌』을 기준으로 이후 발표된 소설들에서는 작품 속의 주인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자 한 작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작품을 전개해나가는 ‘라스콜리니코프’ 유형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소냐’ 유형에 의해 구원(나쁘게 말하면 패배)받게 되지만, 그 직전까지 내적인 고민을 거듭하며 고통받기를 자처하며 만만치 않은 분량을 홀로 이끌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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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극단의 고립 상태에 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이미 변변찮은 직장조차 잃은 지 오래다. 당연히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 또한 없고, 자신의 방에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배고픈 나날을 견딘다. 스스로 남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사회는 그의 이론은 커녕 그의 존재조차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비정상’인 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이론을 펼친다. 그러나 그는 냉철한 자기 객관화를 끊임없이 내리는 대단한 자의식의 소유자이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고, 실제로는 한낱 머릿니에 불과한 벌레 같은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한 분노를 느끼다가, 다시금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를 반복한다.

 

이 인물들은 생계의 위기를 넘어, 실존적 위기에 처한 지 오래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던 이들은, 타인의 죽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죽음 역시 아무렇지 않다는 '모든 것이 상관없다(Всё равно)’의 사상을 키우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살든, 죽어서 저 세상에 가든 상관 없다. 그는 얼핏 자의식의 포화 상태에 이른 것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존재의미도 타인의 존재의미도 거의 무(無)의 상태로 변해버린, 극도의 우울 상태에 있다.


 

 

2. 리얼리즘의 대가: 부조리한 근대 현실 속 ‘살아있는 인물’의 창조


 

이 ‘라스콜리니코프’ 형 인물들은 따져보면 지나치게 오만하고 감정의 기복도 심한데, 묘하게 눈이 계속 간다. 그것은 이들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악마적 캐릭터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매혹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아마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이 안쓰럽고, 아파서 공감을 자아낸다는 점과 보다 연관돼있을 것이다. 그 비호감적인 사상과 행동의 근간에는, 그의 탓이 아닌, 사회적ㆍ사회구조적 폭력으로 인한 우울과 불안이 내재돼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리얼리즘의 대가(大家)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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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폐적 인물들이 가진 우울은 그들 탓이 아니다. 살아온 배경과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19세기 후반, 후발 산업혁명 주자였던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에 비해 뒤처져 있던 시간만큼 빠른 속도로 산업화에 불을 붙인다. 그러나 급하게 이뤄진 산업화는 제대로 된 기반 없이 위태롭게 세워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노동 환경, 그 안에서 죽어나간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들, 피폐해진 농촌, 도시 내의 극심한 빈부 격차, 방치되는 도시 빈곤의 문제……. 빠른 속도의 산업화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산 자들의 무덤만이 남아있었다. 거기에 더해 근대의 시작은, 이전 몇백 년을 지탱해온 신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도시 현실에 발딛고 선 연약한 인간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합쳐질 수 없는 이념적ㆍ사상적 논쟁이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모든 시대가 그러하듯이, 그 시대 역시 쉽지가 않았다. 혼돈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시기 근대의 풍경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그는 “농노해방과 더불어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발달과 사상적 논쟁의 첨예화로 정의될 수 있는 1860년대”(김연경 2007 : 11) 와 그 산물로서 탄생한 이념들에 주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포착한 근대적 빈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착되어온 구조적인 것이다. 『죄와 벌』을 들여다 보자. 『죄와 벌』 속의 가난한 인물들은 모두 시궁창에 빠져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논문도 몇 편 발표하고 인정받는 학생이었음에도 대학을 졸업하는 것조차 어렵다. 가족을 힘든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게끔 해 주려던 그의 꿈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조차 기다려주지 않고 도리어 가족의 희생을 초래하고야 만다.

 

이러한 페테르부르크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의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죄’와 관련되지 않고는 불가능해 보인다. 출구 없는 현실 속에서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고통을 겪은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립된 채로 니체 이후 흔히 초인 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범인-비범인 사상’을 키워나가게 되고, 결국 이에 기반하여 살인을 저지르고야 만다. 그에게는 그의 10년이 넘는 기약없는 시간을 버텨줄 돈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그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왜 나폴레옹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위대한 인간이라 칭송받았는데, 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인가. 대체 그 잔인한 행위가 이해되는 기준은 어떤 것인가. 인간의 악은 도대체 누가 규정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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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우스운 자의 꿈>

(알렉산드르 페트로프, 1992)의 한 장면

 

 

러시아 문학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주로 주인공의 이념적 측면이나 인물의 심리를 포착해내는 뛰어난 작가의 서술 방식을 위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몽상가-니힐리스트 유형’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새롭게 창조한 것이 아니라, 1840년대 등장 이미 등장한 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조유선 2011 : 170).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면목은 이러한 인물을 구체적인 근대 현실 속에 위치 시켰다는 데 있다. 이념만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라, 부조리한 근대 현실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 들은 비로소 소설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긍정적 전망도 주지 않으면서 더 나은 삶으로의 유일한 길조차 거부당한 현실에 대한 인간의 절규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미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 빚어낸, 극도의 우울과 실존의 위기에 처한 인물의 이야기이다.


 

 

3. 현실과 믿음 사이,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따라


 

현실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고통을 이토록 온몸으로 겪고 포착해내는 작가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어쨌거나 사랑해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목도한 현실은 너무도 끔찍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스스로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며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현실에서는 죄없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가난은 나아질 기미는 커녕 악화될 뿐이다. 그는 ‘라스콜니코프’, ‘이반’과 같은 인물을 통해 이러한 참상을 만들어낸 신을 원망하며, 그가 만들어낸 이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부 5편 「Pro와 Contra」의 「반역」과 「대심문관」 장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민이 가장 절정의 경지로 표현된 것으로 평가된다. ‘이반’은 ‘알료샤’에게 죄 없는 아이들까지 고통을 받으면서 이뤄낼 수 있는 것이 조화라면, 신이 세운 세계의 조화를 거부하겠다고 선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고통이란 대가를 치르고서 영원한 조화를 얻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고통 받아야 한다면 여기에 아이들은 도대체 왜 필요한 거니, 한번 말해 보렴, 응? (중략) 나는 용서하고 싶고 부둥켜안고 싶어. 더 이상 사람들이 고통 받는 건 원치 않아.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권 중 - (도스토예프스키 2007 : 514-515)

 

 

그러나 『죄와 벌』 속 ‘소냐’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속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말한다. 그 모든 의식과 이성의 앞에, 무엇보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들은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타인과 자연과 신과 공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며, ’개인의 전체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다. 나의 행동 하나가 어린 아이, 풀들, 더 나아가 세상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과 같이, 반대로 타인의 죄는 모두 나의 죄이기도 하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겸허히 삶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이 뜬구름 잡는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교훈에 멍해질 지도 모르겠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들의 결말은 성스러운 ‘소냐’형 인물의 목소리에 포섭되며, ‘(신이 만든)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일관된 메시지로 늘 귀결된다.이러한 갱생은 매우 종교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갑자기’, ‘문득’, ‘예기치 못하게’와 같은 부사와 함께 일어나며, 종교적 고양으로 끝맺어지는 이러한 결말의 해석과 평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도 여전히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갱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몇백 페이지를 거친 후 에필로그에 다다른 이후의 일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는 갑자기 인류를 파멸시킨 선모충(旋毛蟲)에 관한 꿈을 꾼다. 그리고 갑자기 항상 그를 찾아오던 소냐가 오지 않고 있음을 의식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어째서 갑자기 그런 꿈을 꾸었는지, 어째서 갑자기 그런 사랑을 깨달았는지, 그리고 그의 내적 세계가 ‘구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통째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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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게, <진리란 무엇인가>(1890)

 

 

그것은 인물들도 모르고, 작가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하면 진정한 이해, 진정한 신의 용서는 이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이성 너머의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지극한 감동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소설의 완성도를 해치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른다. 다만 이 두 사상의 충돌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일생을 겪으면서 목도한 현실과 그럼에도 지켜내고 싶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 사이의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에서 우리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며 설득적인 사상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계속해서 고민했던 그 과정을 따라 밟아가게 된다. 그것은 불완전할 수도 있고, 나의 해석이 작가가 설파하고자 한 메시지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수많은 생각의 전복을 거치며 가혹할 정도로 고민을 거듭한 이 작가의 진실함에 빠져들 지도 모를 일이다. 고통스러운 고민을 놓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4. 고통을 감각하며 꿈꿨던 이상, 그리고 ‘지상의 유토피아’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발표하기 쓴 단편소설 「우스운 자의 꿈」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기존 ‘라스콜리니코프’ 유형의 인물인 ‘우스운 자’는 자살 직전 빠져든 꿈에서 에덴동산과 유사한, 사랑으로 넘쳐나는 조화로운 태곳적 지구를 여행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라 할지라도, ‘우스운 자’는 말한다.


 

내가 사랑하고 사랑할 수 있는 지구는 오로지 내가 떠나온 지구, 배은망덕한 내가 심장에 총을 쏘아 생명을 끊을 때 튄 핏자국이 남아 있는 지구 뿐이야. 난 그 지구에 대한 사랑을 결코 멈춘 적이 없어. 결코.

 

- 「우스운 자의 꿈」중 - (도스토옙스키 2011: 140)

 

 

비록 그가 끊임없는 고통으로 자살하기를 결심한 그 사회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것은 고통으로 가득한 지구라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알고 있다. 전인류적인 구원이 이루어져 완전히 조화로운 유토피아가 실현될지에 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설령 그것은 실현된다 할지라도 금세 허물어질 수 있는 허약한 것이다. ‘우스운 자’,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하고 가엾은 지구”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본성에 내재된 선을 믿으며, 고통을 겪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느끼며 끊임없이 서로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 과정 자체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상적 세계가 있다고 보았다. 도스토예프스키 사상의 핵심이자 그가 꿈꾼 이상은, 고립돼있던 인물에 충격을 가하는 인물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시작된 ‘자아와 타아의 연결돼있다는 의식’, 그것에 근거하여 끊임없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멈추지 않는 지상의 사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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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사회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신이 만든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 이 작가의 순수한 이상이다. 그는 막연한 유토피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땅에 살고 있는 존재들 위에 인간 본성의 선에 근거한 ‘지상의 유토피아’를 세우기를 꿈꿨다. 그것이 완전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 본연의 선과 타자에 대한 책임의식과 사랑을 계속 꿈꾸는 것만으로, 그는 이 고통스러운 세상은 그 자체로 이상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주제를 떨치지 못하고 고민한 것은, 그가 살던 세상에서는 이 소박한 꿈조차 너무나도 먼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라본 현실의 참담함과 그럼에도 그가 놓지 못한 인간과 신, 세상에 대한 믿음, 그 사이에서 그가 꿈꾼 세상, 그 모든 고민들과 사랑과 이상을 계속해서 사랑할 것 같다. 자신과 타인을 둘러싼 삶의 고통 앞에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진실된 시선을 가진 작가였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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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을

'라스콜리니코프' 유형과

'소냐'으로 분류한 것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다소 거칠게 나눈 것임을 밝혀둔다.

 

 

참고문헌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1ㆍ2』, 김희숙 옮김, 을유문화사, 2012.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3권, 김연경 옮김, 민음사, 2007.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백야ㆍ우스운 자의 꿈』, 고일 옮김, 작가정신, 2011.

김연경, 「도스토예프스키와 근대 –죄와 벌을 중심으로-」,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0』, 한국러시아문학회, 2007.

조유선, 「문학: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인간 고통의 두 양상」,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36』, 한국러시아문학회, 2011.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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