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빠의 윤전, 나의 텍스트 [문학]

활자를 찍어내는 사람의 반복적 존재 방식
글 입력 2020.07.0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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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신문사에서 일했다. 기자나 편집자는 아니고, 윤전 인쇄기를 가동하여 신문을 찍어내는 윤전부에 몸을 담았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활자와 세상의 소식으로부터 아빠는 그것들이 온전히 활자로서 작동할 수 있도록 기계를 살피고 조판과 인쇄된 활자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빛에 비춰보았을 것이다.

 

기계음과 형광전구 아래서 보내는 새벽의 피로는 비정기 간행물처럼 매번 다르게 찾아왔을 테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조간신문은 아랑곳 않고 누군가의 현관과 사무실 앞에 동이 트기도 전에 놓여 있었을 테다.

 

이처럼 나는 아빠의 작업복과 손끝에 묻은 활자의 흔적에 빚지며 나고 자랐다. 그 먼 쪽의 자양분 덕분인지 나는 커가면서 조금씩 책과 글이 있는 쪽으로 이끌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흐릿한 감각이 나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명료해지는 경험은, 가끔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다른 방식으로 대체 불가능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신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 빛줄기 같은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시간을 조탁하여 빚어낸 글로 조금씩 밥벌이 하리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게 됐다.

 

작년은 다양한 텍스트를 만나게 된 한 해였다. 아니 에르노와 앙드레 고르가 남긴 사랑의 기록을 들춰봤고,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평전을 읽으면서 메커니즘에 매달리지 않는 보편적 음악적 심성과 예술적 초월성이 그의 음악에 올올히 맺혀있음을 다시금 절감했으며, 허문영 평론가와 박찬욱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뷰 파인더를 그들의 책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또 김애란 작가가 몇 년 전 낭독회에서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신작소설을 기다리던 와중에 산문집을 냈다는 의외의 소식을 접하기도 했고, 페르난두 페소아가 자신의 이명(異名) 작가들로 내비친 시정이 마음을 짓누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가끔 책방과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을 보며 그곳에 인쇄된 잉크의 흔적을 빤히 쳐다봤다. 그것을 활자로 인식했을 때와 잉크로 인식했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른데, 확실한 것은 양쪽 다 어떤 의미에서의 자국이라는 점이었다. 생의 자국, 마음의 자국, 시간을 달여 만든 각자의 원액. 그리고 나의 아빠처럼 활자를 찍어내는 사람의 반복적 존재 방식. 작가들이 남긴 흔적의 결정을 곱씹는 일은 그만큼 나의 이야기를 충동하게 만들었다.

 

2020년이면 내가 더 이상 아빠를 볼 수 없게 된 지 5년이 된다. 정확한 영문도 모르고 간 병원에서 아빠가 초점 잃은 눈이 제대로 감기지도 않은 채 산소 호흡기를 차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도, 상을 마치고서 이제 다시는 마주칠 수 없는 눈을 감은 채 나무 상자 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봤을 때도, 그리고 그 몸이 작은 단지에 담겨 내 품에 안겼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나만 듣지 못하는 이명(耳鳴) 같은 게 있는 것처럼 한동안 당신의 비존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 한동안을 거친 내 상실감과 회한은 도저히 갈아낼 수 없을 만큼 큰 양감으로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껏 나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에 부채감을 느끼며, 생의 감각들을 보다 더 흔적 할 생각이다. 아빠가 찍어낸 신문들은 이미 한참의 시간이 지나 파쇄기의 찌꺼기로도 남아있지 않겠지만, 나는 작은 글들로 아빠의 활자보다 오래 남아 그동안 기억하지 못한 당신을 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글을 경청해 줄 몇 명만이 있어주길 바라며 어리숙하게 앉아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대신할 수 없는 활자의 순간들을 맞이하기 위해 올해의 나는 역시, 혹은 여전히 뭐라도 읽고 쓸 예정이니, 좀 더 다양한(구체적으로는 2개 이상의 새로운) 지면을 통해 타인과 생각과 감정을 나눌 수 있길 바라고 애써보려 한다. 이름보다는 글이 먼저 기억되는 사람이길, 그리하여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나의 이름이 떠오르는 사람이길 욕심내본다. 그동안 어딘가의 지면이든 내 노트북 폴더 속 한글 파일이든 부단히 감각을 흔적하고 있겠다.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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