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저널리즘 속 여성이 있었다 - 더 포스트

저널리즘과 페미니즘이 맞닿는 곳에서 정의를 엿보다
글 입력 2020.06.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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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위한 권력이 아닌, 국민의 ‘위에’ 올라서려는 권력을 어떻게 저지할 것인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지휘 아래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가 연기의 정수를 녹여낸 ‘더 포스트’는 일그러진 권력에 정면으로 ‘한 방’을 날린다. 그리고, 그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통찰력과 강인함은 절대 성별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함께 던지고 있다.

 

 

 

더 포스트, 언론 그리고 여성


 

1971년, 미국 역사에 지금껏 없었으며, 있어서도 안될 판결이 현실이 된다. <뉴욕 타임즈>를 향해 법원이 보도 정지 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다른 언론사의 신문 1면을 장식한다.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 1조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이 판결에 맞서 워싱턴 포스트가 움직였다. 그 격동 속에서 성장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펜타곤 페이퍼, 닉슨에게 한 방


 

영화의 소재가 된 ‘펜타곤 페이퍼’는 인도차이나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기록한 보고서다. 닉슨과 그 전임 대통령들이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승산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소위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린 베트남전을 지속해 왔다는 내용을 포함한 7천 쪽 가량의 문서였다.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걸고 그 보고서를 빼돌린, 댄 엘스버그라는 인물 덕분에 이 보고서는 뉴욕 타임즈의 1면 보도로 미 전역에 알려진다. 뉴욕 타임즈가 무언가 특종을 터트릴 것이라는 냄새는 진즉에 맡았지만, 그 특종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있던 워싱턴 포스트(이하 포스트)의 편집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로서는 완전히 물을 먹은 꼴이다. 그는 늦게라도 보고서를 찾는 데 혈안이 되고, 때마침 법원이 뉴욕 타임즈에 보도 정지 명령을 내리면서 포스트에도 다시 한번 특종을 터트릴 기회가 찾아온다. 

 

보고서의 최초 유포자인 댄과 옛 동료 사이였던 포스트의 기자, 벤 백디키언의 활약으로 포스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약 7천 쪽의 보고서 중 4천 페이지 분량을 확보하게 되는데, 겨우 보고서를 입수했더니 이번엔 법률 문제와 맞닥뜨린다. 법원의 보도 정지 명령이 보고서를 다시 한번 보도할 기회를 주었지만, 달리 보면 이를 섣불리 다루다가는 뉴욕 타임즈 꼴이 다시금 날 수도 있음을 상기한 포스트의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언론 발행의 자유를 지킬 방법은 오직 발행하는 것뿐이라는 벤과, 위험을 감수하려다가 회사를 송두리째 날릴지도 모른다는 이사진의 대립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한편, 기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10시간. 4천 쪽을 어느 세월에 읽냐며 푸념하기엔 1분 1초가 아까운 상황에서, 그들은 보고서 더미를 파고들어 기삿거리를 샅샅이 뒤져 낸다. 기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동안 포스트의 국장, 캐서린은 그녀의 전 재산과 인생을 걸고 자신을 에워싼 남성들 앞에 선언한다. “그냥 해요. 합시다. 기사 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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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발행의 자유를 지킬 방법은 발행하는 것뿐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 ‘저널리즘’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지는가? 위험을 감수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기자들을 다룬 영화는 ‘더 포스트’를 제외하고도 수십 편은 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 포스트’를 콕 집어 수작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고 뻔한 그 소재를 정공법으로 다듬어 냈기 때문 아닐까 싶다.

 

한 지방지가 권력의 탄압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사이다’ 플롯은 앞서 말한 것처럼 꽤나 흔히 쓰이는 소재다. 즉, 간파당하기 쉽다. 이 영화도 초반 20분 내지 30분 정도 보다 보면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결말로 끝날지 이미 예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수십 편의 영화들이 갈등과 인물만 달리 해서 지금껏 계속 다루어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부당한 권력으로 인해 언론이 겪어 온 병폐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이 쭉 함께했다. 특히 트럼프 시대를 맞아 미국 언론은 다시금 권력의 강력한 억압 속에 놓였다. 진정한 언론의 역할과 그 가치가 무엇인지, 현대인들에게 다시 화두를 던질 때가 된 것이다. 그래서 거장은 적절한 시점에 ‘당연한 가치에 대한 당연한 메시지’를 던졌다. 괜한 기교나 반전 없이 있는 그대로,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대로 끝나는 영화를 통해.


놀랍게도 올해 2019년, 대한민국은 언론자유지수 순위에서 세계 41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1위, 그리고 48위를 차지한 미국보다도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여전히 언론 조작, 탄압, 여론몰이 등 잡음과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는 현실이다. 포스트의 국장 캐서린은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전 국방장관, 맥나마라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면서 소중한 친구에요. 하지만 그런 관계와 감정이 이 기사를 내고 말고에 영향을 줄 순 없어요”. 언론과 보도 대상이 어떤 관계이든, 보도 이후 후폭풍이 어떻게 되든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이라면 언론은 알려야 한다.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보도할 권리는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더 포스트’는 그러한 언론의 사명을 인물들의 대사, 행동, 장면 모든 요소를 동원해 러닝타임 내내 외치고 있다. 어떤 외압에도 굴복하지 말고, 언론은 보도함으로써 비로소 언론이라고.

 

 

 

중년 여성의 성장 서사, 자연스럽다


 

‘더 포스트’가 던지는 메시지가 유독 묵직한 이유는 이 영화가 언론 영화이면서도 여성 서사를 감히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담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 몇 년 사이, 영화 속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에 대한 영화계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많은 작품들이 여성을 다루는 기존의 프레임을 부수려는 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개중에는 관객들에게 오히려 피로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 있다. 여성 주연배우가 직접 “나는 당신 뜻대로 행동하는 꼭두각시가 아니야”같은 클리셰적인 대사를 읊어준다든가 하는, 뻔한 방식에 담긴 메시지는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도달하지 못한다. 거장의 영화라면 모름지기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더 포스트’는 대사로 캐서린의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여성 주연의 서사와 정직한 장면들로 주체로서의 여성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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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식거래소, 회의장 등등, 캐서린이 참석하는 모든 자리는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 그녀가 포스트의 사주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진 회의에서 그녀의 발언에는 아무도 대꾸조차 않는다. 심지어 그녀의 면전에다 대놓고 그녀는 사교계에서는 탁월할지 몰라도 사주로서는 영 아니라는 앞담화를 서슴지 않는다. 캐서린이 나중에 스스로 말하듯, 그녀는 ‘직업이란 것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여성 신문사주로서 받을 압박과 부담감은 그녀를 아주 무겁게 짓눌렀을 것이다. 감독은 그녀가 느낄 그 무거운 감정들을 절대 촌스럽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남몰래 한숨 쉬며 “남자들 사이에서 버텨내는 것은 참 고된 일이죠.” 비스무리한 대사를 단 한 마디만 했더라도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 최소 20%는 깨졌을 것이다. 감독이 참 ‘공간을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서린이 이사진 회의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회의장 문 밖에는 여성 비서들이 캐서린을 바라보며 서 있다. 그러나 한 발짝 너머의 회의장 문 안쪽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성들만이 가득 차 있는 공간이다. 그들의 고압적인 시선은 마치 당장이라도 그녀를 어디 구석으로 몰아붙일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같은 연출에 메릴 스트립의 관록 있는 연기가 더해지면 그 시너지는 200%다.  그녀는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도 예상치 못하게 신문사의 요직을 떠맡은 중년 여성의 부담감과 피로, 위축되는 감정을 완벽하게 관객에게 전달해 낸다.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캐서린에게 잔뜩 이입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캐서린은 시종일관 자신에게 부정적인 남성들 사이에서 점차 성장해 나간다. 극 초반에는 이사진 회의 때 있을 발언이 긴장되어 몇 차례 질의응답 연습을 하고도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면, 극 후반에는 이사진 중 한명을 우아하지만 강단있게 몰아붙이는 모습으로 쾌감을 선사한다. “이곳은 더 이상 내 아버지의 회사도, 내 남편의 회사도 아닌 나의 회사입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내 이사진에 있을 필요가 없겠죠” 라는 대사는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성에게 날리는 직접적인 ‘한 방’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캐서린이 이 한 줄의 대사를 말하기까지 그녀의 서사를 뒷받쳐 준 많은 장면들과 합쳐져, 몇 줄의 대사보다 더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그냥 그런 시대였던 겁니다.


 

캐서린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이 아닌 사위에게 신문 사주를 맡긴 것은 분명 사위가 뛰어나서였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진에 대고, 벤이 하는 말이다. “그냥 그런 시대였던 겁니다”. 이건 감독이 정치계와 우리 사회에 동시에 던지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그 때는 대통령이 언론을 쥐락펴락하려 들 수 있는 시대이자, 여성은 남성의 뒷바라지만 하는 시대였다. 그냥 그런 시대였다. 이 뒤에는 아마도 이 말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여서는 안 된다고. 우리 모두 나아가자는 말 말이다.

 

 

[이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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