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선희 ; 말과 현실 사이의 어긋남 [영화]

글 입력 2020.06.14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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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작품 <우리 선희>는 정의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과 마치 그럴 권력을 지닌 듯 함부로 정의 내리는 세 남성에 대한 이야기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적 논쟁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지금,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함부로 판단하고 이름 매기는 권력적 시각과 이에 따른 위험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시대적 의의가 있다. 또한 여러 스캔들을 가진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꺼내 시사점을 논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다.


 

우리 선희: 말과 현실 사이의 어긋남

 

“선희야 넌 너무 순수해. 또 이쁘고 착하고 용감한데 솔직하지 않아. 그러면서 솔직해 그리고 똑똑하고 안목도 있어.”

 

이 대사는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호한 이 문장 하나가 마치 선희를 완벽하게 정의한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나열된 몇 가지 형용사들이 과연 선희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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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는 누구인가?

 

처음 선희를 마주했을 때 ‘참 알기 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은 강한데 실력은 없고 언제나 분노에 차있으며 융통성 없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현명하지 못한 사람. 현실에도 선희 같은 인물은 많이 존재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러한 성격에 싫증을 느껴 곧 그 사람을 떠나게 되더라. 하지만 영화가 흘러갈수록 선희의 주변은 더 북적거리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뻔한 성격으로 보였던 그녀가 점점 “왜 저래?”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가 정의한 ‘선희’라는 인물과는 맞지 않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너는 이상할 정도로 순수해.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순수해.” 영화 초반, 한 선배가 선희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선희를 순수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까. 어느 쪽이 선희일까? 선희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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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복

 

“끝까지 파고 나가야 —를 아는 것이야”

 

각자 다른 상황에서 똑같은 말을 꺼내는 세 남자. 하지만 말하는 이, 듣는 이, 그 누구도 어딘가 끝까지 파고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를’에 해당하는 목적어를 찾지 못한 그들의 빈칸에 ‘선희’를 넣을 것을 추천한다.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선희를 끝까지 파고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저 이제 남자 안 만날 거예요" 어쩌면 ‘저는 진심을 가지고 남자를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라는 속마음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는 세 남자는 솔직하면서 솔직하지 못한 선희의 양면을 간과한 채, 후자에 모든 것을 복속해버린다. 그녀에 대한 모호한 정의들은 사실 그들의 판단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처럼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모호함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방법이다.

 

“조금 힘들어도 너무 추하게 들고 일어서지 않으면 돼.” 이러한 사회적 억제에 무능한 선희를 부정적인 상징으로 비하하고 현실에서 용납할 만한 융통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면서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욕망, 결국 세 남자의 모순이다.

 

반증과 반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주장 속엔 진실이 담길 수 없다. 자신들의 정의에 속아 눈이 멀어버린 끔찍한 충고자들은 진리에 가까운 확신을 덕지덕지 묻힌 채, 그 입을 열고 또 연다.

 

인물들의 언행불일치가 거듭될수록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충고들이 가지는 영향력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자격이 없는 충고자의 문장은 무게를 가지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고 사람에게 닿지 못하는 독백처럼 말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반복은 강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대사는 인물들의 ‘말’의 무게를 더욱 덜어내고 익숙함의 배신처럼 역설적으로 그 힘을 퇴색시킨다.

 

 

3. 선희와 추천서

 

“나중에 얘기해 줄게.”,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 “몰라”

 

선희를 제외한 세 남자들이 서로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이때, ‘말’의 속임수가 등장한다. 남자들의 대화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는 ‘어른의 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선희의 말은 겉으론 솔직하고 용감해 보이는 ‘어린아이의 말’이다. ‘저의 손을 왜 잡았었나요?’, ‘너무 이쁘고 귀여워요’, “술 사주세요” 이렇듯 직설적인 선희의 문장들은 그녀를 순수한 아이처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답답함을 느끼고 의문을 가져야 할 말은 이해관계의 지배를 받는 ‘어른의 말’이 아닌 선희의 ‘어린 말’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희의 말에 의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들이 정의한 ‘순수하고 진실한 선희’는 자신을 속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다.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던 추천서는 마치 온전히 선희를 정의할 수 있다는 듯 당당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두 가지의 추천서 모두 그녀가 아니었다. 이렇듯 추천서, 충고 등 모든 언어적 도구를 동원하여 선희를 정의하려 애쓰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텍스트와 형체의 거듭되는 어긋남은 절대적인 무언가를 대변할 수 없는 기표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답답함이 아닌 통쾌함을 느낀 건 텍스트의 거만함이 싫었던 나의 개인적인 감정일 것이다) 영화의 시간과 반비례하여 증가하는 의문들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머릿속에서 지속된다. 관객은 세 남자와 같이 그녀를 나름대로 정의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그 판단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다. 어떠한 답을 내리든 선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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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녀는 악역인가?

 

누군가는 선희를 남자의 마음을 이용하는 (흔히 차별적이고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꽃뱀'이라고 욕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밉지만은 않았다. 동시에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맺음에도 불구하고 선희를 변호하고 싶은 이유는 그녀 역시 피해자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나’를 정의당하고 그것이 자신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달리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제가 그래요?”, “그렇다고 믿고 싶어요.”라며 회피하려 한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해보려 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한 괴로움을 남자로 채우려고 하는 애정결핍 아닐까. 자신을 망가뜨려야 괴로움과 허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일종의 자해적 행위일 수도’라며 말이다. 또는 그녀를 단순히 '여우'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어떠한 이해관계나 물질적인 것을 원하여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담 교수에게 얻어내는 추천서는 그저 우연인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여러 가설과 그에 대한 반박을 거듭하며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지만 결국 증명에 실패하고 그녀를 향한 모든 가설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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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은 남들이 정의하는 그녀와 선희를 일치시켜 관객의 인물 분석에 도움을 주는 듯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터져 나오는 말은 “그래서 선희는 뭐 하는 애야?”였다. 안타깝게도(혹은 기쁘게도) 89분의 영화를 통해 그녀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세 남자의 시선처럼 평면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선희가 아닌 선희를 바라보는 시선, 더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희’라는 제목에 선희는 없다. ‘우리’라는 거만한 정의 내림만이 남아 가려버린 진실에 대해 의문을 던질 뿐이다. 당신에게 누군가는 누구인가. 그 앞에 숨겨진 ‘우리’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람은 사전처럼 정의할 수 없다. ‘우리 선희’는 오직 나의 두 눈만이 진실이라 착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영화이다.

 

감독 홍상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의견 일치의 경우가 불일치한 의견의 충돌보다 더 위험한 것 아닌가? 충고란 것들이 하나의 기성 상품처럼 충고자들의 입 사이를 떠돌며 사람들 몸에 억지로 쓰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정리하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지만 그런 우리의 정의 내리기가 곧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 같다.”

 

반성 없는 판단들은 곧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 버린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 무한한 생각에 제한을 둔다는 것. 결국 인물을 향한 어떤 정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것이다. 판단을 구실로 누군가를 정의 내리고 고정된 단안을 진리라 믿고 있진 않는가.

 

창경궁에서 드디어 세 남자가 만났다. 자신만이 선희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다고 여기며 서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서로 우리 선희, 나의 선희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선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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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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