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국립현대미술관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다원예술]

퍼포머가 무대에 없는 공연
글 입력 2020.06.11 07: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05년, 처음 국내에 ‘다원예술’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인 2017년부터 현재까지 세상은 다원예술에 호기심을 느끼고 열광한다. ‘다원예술’이란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예술을 말한다. 그래서 한가지 장르로 한정 지을 수 없이 장르끼리 분해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2017년부터 매년 국제 다원예술 동향을 국내에 소개해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하는 ‘다원예술 프로그램’이 올해는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의 일부로 열렸다.

 

 

131.jpg



작년 초, 국립현대미술관 SNS를 통해 다원예술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를 알게 되었다. 평소 분기마다 한번씩 찾게 되는 공간이기도 하고 미술관에서의 퍼포먼스가 궁금하기도 하여 바로 예매신청을 하게 되었다. 올해 공연되는 다원예술 세 작품들은 50주년 기념전인 <광장>의 일부여서 그런지 동시대성을 겨냥한 작품들로 선정되었다고 해 꽤 기대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9는 서울관 <광장 : 미술과 사회 1900-2019, 3부. 2019>의 주제를 공유하며 ‘동시대 광장’을 사유하고 질문할 다원예술 세 편을 소개한다. ‘동시대’라는 접두어는 우리가 기존의 ‘광장’을 함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가를 질문해보는 시작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시대 광장에 대한 사유는 공론장, 공공장소로서의 미술관과 극장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발췌)

 

 

2019082201305416515074.jpg

 

 

B1 멀티프로젝트홀에서 공연하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밝은 정사각형의 단차가 없는 사각방면의 무대와 그를 둘러싼 의자가 보였다. 그 뒤로 단차가 있는 관객석이 보였다. 관객은 작품을 여러 방향으로,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아주 둘러싼 의자에 앉음으로써 아주 가까이에서 작품을 관람하였다.

 

카럴 판 라러의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는 작가가 직접 무대에서 실제로 최면 상태에 빠진 뒤,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를 또 다른 무용수 4명에 의해 조작되는 형식이다. 실제로 최면술사가 공연 시작 직후, 최면을 거는 모습을 약 2차례 보여준다. 최면에 걸린 신체는 단순히 힘이 빠진 것만이 아니다. 실제 몸의 긴장을 푸는 것보다 훨씬 무거워지고 다루기도 어려워진다.

 

세 명의 무용수과 한 명의 안무감독이 ‘카럴 판 라러’를 들고 움직인다. 그들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그를 다루며, 그를 걷게 하기도 하고 관객 위에 앉혀 이동하기도 한다. 여기서 제목의 뜻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대에 존재하지만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래서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이다.

 

<광장전>에서의 ‘광장’은 넓은 의미에서 개인의 사회적 삶이 시작되는 공간이라고 현대미술관은 말한다. 그 공간에서 개개인은 크고 작은 문제를 직면한다. 광장은 우리 사회이고 그 안에서 각자의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의 퍼포머 또한 광장에 속해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의지없이 움직이는 신체를 보며 사회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0분의 퍼포먼스라고는 하지만, 최면이 걸린 시점부터의 퍼포먼스는 약 15분 정도이다.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한 개인을 15분동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게 하는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 관객을 앉힘으로써 퍼포머의 움직임을 더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장황한 설명과는 다르게 무용수들 당황한 모습이 잘 보이기도 하고, 들고 내리고 하는 과정에서 퍼포머의 신체노출이 되어 관객석에서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 후 30분정도 기획자, 퍼포먼스 참여자, 통역가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그 때 들어보니 매 연습때마다 최면을 하는 것은 위험해 실제로는 긴장을 풀고 연습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면에 걸린 신체는 긴장했을 때보다 배로 더 무거워지고 머리는 아래로 떨어져 부상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뤘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놀란 부분인데 사실 작가인 ‘카럴 판 라러’는 존재하지 않을 방법으로 전신마취를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진짜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꽤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광장전>과 묶어놔서 더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사회속의 무력한 개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간은 살아가며, 수많은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 집단 속에서 우리는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집단의 성향, 주변인들의 태도에 휩쓸려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의지와는 다른 선택을 할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작품과 국립현대미술관 <광장전>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광장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다시 일깨워준다.

 

 

[김화정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