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속없는 낙관, 단단한 결실 [도서]

글 입력 2020.06.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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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없는 낙관, 단단한 결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형성된 특별한 관계가 한순간의 실수(처럼 보이는 고질적인 문제) 덕에 모조리 무너져버리는 서사는 일반적이다. 서보 머그더의 소설 ‘도어’가 앞의 서사와 흐름을 같이 하면서도 첨예하게 다른 감상을 자아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에메렌츠 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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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반인텔리주의자 에메렌츠 앞에서 경전에 쓰인 말이나 저명한 가르침은 모두 효력을 잃는다.


녹록지 않았던 삶의 굴곡을 두발로 단단히 걸어오며, 그가 세운 윤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것은 신기하게도 생명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이었다. 그의 정원에서 길 잃은 동물들은 안식처를 찾았고 사람들의 생채기에는 새살이 돋았다. 서사에서 에메렌츠를 사랑하지 않는 이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눈의 여왕이었으며, 그녀 자신이 확실함 그 자체였다. 여름에는 첫 번째 체리였고, 가을에는 영근 밤, 겨울에는 화톳불에 익힌 호박, 봄에는 관목의 첫 봉오리였다. 에메렌츠는 깨끗했고 논란의 여지없이 우리 누구나가 항상 되고자 했던, 가장 선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다. 영원히 이마를 가리고 있던, 호수의 얼굴을 하고 있던 에메렌츠는 그 누구로부터 그 어떤 것도 청하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어떤 짐이 있는지 전 생애에 걸쳐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모두의 짐을 짊어졌다. 그럼에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낼 법 했을 때, 그녀의 삶에서 유일한 불명예스러운, 병이 그녀를 더럽힌 순간, 나는 사람들이 그녀를 발가벗길 수 있게끔 방송출연을 위해 방송국으로 갔고,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러나 소설은 에메렌츠를 단면적인 ‘성녀’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종잡을 수 없는 에메렌츠의  행보에 ‘나’는 불안하고, 굳은 고집과 맹렬한 비판에 상처 입는다. 에메렌츠는 간편한 태도로 무장한 세계에 불화하는 사람이다. 죽어있는 말보다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믿고 허울 없는 외침 대신 직접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상정한 윤리에 믿음이 갔다.


그의 사랑은 속없는 낙관이 아닌 단단한 결실과도 같다.

 


에메렌츠에게도 이제부터 신중해야 한다는 나의 인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미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고, 언젠가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그리고 내가 그것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남긴 흔적의 더미 속에 더 많은 그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모든 곳에 현존하는 그녀가 그 어떤 곳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나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절망에 빠뜨렸다.



‘나’와 에메렌츠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에메렌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역사를 ‘나’에게 고백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나’는 에메렌츠가 자신에게조차 열지 않았던 닫힌 문 너머의 숨겨진 비밀마저 응시하려 한다. 그 위험한 시도가 모든 것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문이 에메렌츠라면, 우리는 모든 수고와 두려움을 기꺼이 감수하고 문고리로 손을 뻗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런 힘을 가졌다.



[곽성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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