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좋아하는 마음'의 딜레마

글 입력 2020.05.3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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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내가 싫어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좋아하는 마음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렵게 생겨서 짧게 지속되는데, 왜 싫어하는 마음은 금세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오래도록 사람을 뒤흔드는지. 뉴스에는 좋지 않은 소식들만 쏟아지고 얼마 있지도 않던 '인류애'가 뚝뚝 떨어져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기보다 도망치는 편을 택할 때가 더 많다. 바깥에서 자극을 받을수록 익숙하고 안전한 나의 세상 안쪽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특별히 재미있지도 않은 온갖 게시물을 멍하니 본다거나, 유튜브 연관동영상을 끝없이 넘나든다. 벽돌깨기 같이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 없는 게임을 몇 시간씩 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 중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옛날에 좋아했던 것들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일이다.


학창시절 새벽까지 즐겨 듣던 노래, 팬카페까지 가입해가며 봤던 만화... 현재의 모든 게 지긋지긋할 때는 이상하게도 내가 놓고 떠나왔다고 생각했던 것들로 발걸음이 향한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여전히 익숙한 행복을 안겨주는 것들이다. 세상에 지칠 때 추억을 곱씹는 것은 꽤 건전한 해결법이다. 문제는, 그 '옛것'들이 지금 나의 가치관과 시선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비판할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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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초등학교 고학년~중학교 시절 일본 소년만화를 참 좋아했다. 모험과 함께 갖가지 역경을 헤쳐나가며 성장하는 주인공을 볼 때면 갑갑한 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어릴 때의 기억과 감정이 새록새록 생각나며 여전히 그 이야기들은 심장을 뛰게 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때와는 달라진 내가 새로이 발견하는 것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여성 캐릭터의 노출을 개그 요소로 사용하는 관행 같은, 여성혐오적인 면모가 턱턱 걸린다. 작품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일본의 군국주의, 전체주의를 묘하게 옹호한다는 걸 발견하기도 한다.


그나마 작품 내에서만 비판할 지점이 있는 거라면 다행이다. 최소한 욕하면서 비판할 지점을 언급할지언정 죄책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므로. 그때의 것들을 지금의 눈으로 다시 이야기하는 건 비평으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품 외부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좀 더 복잡해진다. 어떤 작품의 작가가 우익이거나 혐한 성향임이 밝혀졌을 때 그 사람이 창작한 작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좋아하던 노래를 부른 사람이 성범죄자가 되었을 때는 또 어떤가.


정도의 차이지 비슷한 상황은 수없이 많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다름아닌 그것을 만든 사람 때문에 다 망가져버렸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시절 좋아했던 것들을 다시 찾은 까닭은 지금 현실에서 잠깐 도망치기 위함이였는데, 그 도피처에서 또 다시 마주하게 되는 현실에 나는 자주 딜레마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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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는 상관 없는 이미지



물론 좋아했던 것들이 더 이상 예전에 내가 알던 그것이 아닐 때, 자연스럽게 마음이 뚝 끊어져서 다시는 그 작품 또는 사람들을 보지 않게 될 정도로 정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분리되는 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최근 크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전국민의 공분을 사고 은퇴하다시피 한 연예인의 옛 영상에 달린 댓글이 웃기고도 슬펐다. 앳된 얼굴의 연예인이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 영상 댓글란에는 영상 속 사람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이미 죽었다는 내용의 댓글이 많은 공감을 받고 있었다.


조회수가 꽤 높았던 그 영상에서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그 영상 속 연예인을, 그를 좋아하던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대상과 지금의 그 대상을 분리해낸 채, 좋아하던 것을 계속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시인을 언급하며 그 시인이 50대에 성범죄를 저질렀다면, 20대때 쓴 시들은 읽을 수 있는지, 읽어도 되는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읽을 수 없을 것 같고, 읽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시인은 내가 딱히 좋아하는 시인이 아니었기에 바로 결론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이었다면, 그리고 그 시인의 잘못이 나에게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였다면, 나는 마음 속으로 대답을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머리로 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세상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해 도망쳐온 곳에서 위안을 받는 작품이나 사람들이 사실 그 세상을 끔찍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하다. 어디까지가 '취향 존중'의 영역일까. 어디까지 눈 감을 수 있는가. 또는 눈 감아도 되는가. 개인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고, 판단내리고 행동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소비가, 나의 도망이, 내가 '흐린눈'을 하고 즐기는 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에 또 끔찍한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도 햔 번 생각이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 모든 것들이 무언가를 좋아했던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 가끔 화난다. 무책임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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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정한 시기에 좋아했던 것들은 인생 깊이 자리해 나의 일부가 되고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대표하곤 한다. 그것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망가져 있을 때의 상실감은 그래서 더욱 크다. 현실에서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만이 상처를 주는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도 좀 더 보탬이 되기를, 아니 적어도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큰 욕심인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소중하고 또 숭고하다고 믿는다. 좋아하기보다 싫어하기가 훨씬 더 쉬운 세상에서, 쉽게 지치는 세상에서 나는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좋아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정서와 가치관이 달라져 내가 좋아하던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판받을 지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최소한 그런 점을 웃으면서 마음껏 얘기할 수 있기를, 시간이 흘러도 좋아했던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게 부끄럽거나 죄책감 느껴야 하는 일만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김선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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