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환절, 과도기, 리모델링, 2020년, 나 [사람]

일주일의 하루는 유튜브를 봤고 다른 하루는 sns를 했다.
글 입력 2020.05.3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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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따뜻해서 그런가, 이번 봄은 추웠다. 생각 없이 나왔다가 후다닥 들어가서 외투를 챙겨 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훌쩍이며 다녔다. 온도를 잘못 맞추는 까닭이다. 아침에 날씨를 검색하고 옷을 맞춰 입는데도 춥거나 더웠다.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왜 이렇게 춥게 혹은 덥게 입었냐고 놀란다. 머쓱 웃는다.


원체 까탈스러운 성격인 것 같긴 한데, 둔해서 계절 바뀌는 것도 늦게 알아챈다. 넋 놓다가 계절이 바뀌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이 시간에도 해가 떠 있네? 익숙한 일상에서 낯섦을 발견했던, 생경한 경험을 즐기게 됐다. 지난 시간을 가늠해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난봄이 아쉽기도 하고 새 여름이 반갑기도 하고.


가늠을 끝내면 몇 번 되새김질해본다. 저번 계절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뭘 먹고 입었는지. 이번 봄은 너무 추워서, 겨울이 끝나고 바로 여름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봄에 일어난 많은 사건 사고들 때문에 정신없이 지나간 걸지도 모른다. 세 계절이나 남았지만, 사람들은 올해를 완전 버리는 해로 여겼다. 해학의 민족답게, 2020년이 아직 안 온 셈 치자고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슬쩍 '좋아요'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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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누워있다. 올해는 반이 가기 전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울었다. 인간사 새옹지마라던데, 올해는 좋은 일은 금세 나쁜 일들에 묻혔다. 아니 나쁜 일들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다. 나쁜 일들은 정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뇌리에 강렬하게 박히지만, 금방 관심에서 잊힌다.

 

씁쓸하다. 스물넷하고 반년을 살아오면서 불합리에 정말 많이 화냈지만, 바뀐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실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하고 항의하고 했던 적은 없으니까 뭔가 씁쓸해할 권리도 없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현실에 대해 무력감에 휩싸였고 절여있는 냄비 인간이 됐다.


이제 학교에 복학하면 졸업반에 가까워진다. 고학년, 고학번, 화석, 꼰대 등으로 정의되는 시점이다. 군대만 다녀왔을 뿐인데도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게 서글프고 억울하다. 스물 중반 딱 가운데. 아이유 팔레트 가사처럼, 애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때. 학교에서는 어른 취급을 하고 사회에서는 막내 취급을 하는 뭔지 모를 나이다. 스스로 어리다고 인식하고 있고 준비가 덜 됐는데도, 사회로 등 떠미는 기분에 야속하기만 하다.


20살에서 느꼈을 법적 독립과 달리 이제부터는 진짜 독립을 준비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취업인데, 안 그래도 취업이 어려워지는 시기에 코로나까지 겹쳤으니 쓸데없이 걱정만 늘어났다. 코로나로 아파하는 사람들과 고생하는 사람들보다, 취업 걱정이 앞서는 내가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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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우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요소는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정말 많았다. 외면하려 들어도 불어난 뱃살처럼, 불쑥불쑥 존재감을 알린다. -그럴 때마다 괜히 짜증 나서 뱃살을 때린다.- 그런 이유에서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평소 무슨 일을 하든 의욕이 없었지만, 눈에 띄게 더 의욕 없어졌다. 아 하나 있었다. 핸드폰을 아주 열정적으로 들여다봤다. 내가 봐도 한심한 나는 유튜브가 열렬히 사랑하는 유튜브 최적형 인재였다.


문득 계절감을 깨달았던 것처럼, 전원을 켤 때마다 보이던 스크린 타임이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의 하루는 유튜브를 봤고 다른 하루는 sns에 썼다고 굳이 굳이 알려줬다. 망할 아이폰. 유튜브는 그렇다 쳐도 의미 없이 들락날락하는 sns에서 하루를 썼다.

 

퍼거슨은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데, 어후 내가 훌륭한 예시였다. 인생 낭비도 좀 신박하게 하던가 맨날 진부하게 낭비한다. 유튜브는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매번 알고리즘으로 적당히 흥미로운 것들은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린다. 서서히 점유율을 높이고 기어이 스크린 타임 1위를 차지하고야 말았지.


먹고 자고 하는 시간을 뺀다면 요즘 내 인생은 유튜브와 SNS로 요약할 수 있다. 과연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의미 없는 것에 시간을 쏟고 있었다. 유튜브 영상 30분 보는 건 자동차 6km를 운전하는 것과 같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 난 차도 없는데 일주일에 288km 정도를 운전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유튜브에서 봤다. 완전 인간쓰레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사실 조금 맞는 것 같다.


이따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지나왔는지 궁금해서 글을 되새김해본다.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생각이 변화하고 그랬는지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지난 나는 총명했고 지난날들은 꽤 당당했던 것 같다. 생각이 많았고 나름 적당히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이렇게 무기력해질 줄이야. 현재가 살짝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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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에 건져진 계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외압 때문이다. 집 리모델링이 게으른 여유와 한심한 사치에 대해서 빠져나오게 해줬다. 집안 물주님과 세대주님의 평생 숙원이자 염원이었던 리모델링이 거의 완성된 것이다.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내 방에 새 가구를 장만하고 이전 것들을 다 버렸다. 옷도 버리고 낡은 가구도 버리고 그냥 방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항상 옷이 없다 없다 했지만 내가 가진 옷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그런 걸 못 보고 지나쳤다. 계절감에 둔했던 것처럼, 내가 가진 것들과 내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배려심 많은 성격이 아닌데도, 좁은 공간에 사용하지 않는 것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었다.


한 연예인의 우스갯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비싼 집을 샀는데 쓸데없는 물건들에 방을 양보하고 있었다고, 나도 모르게 잡동사니 월세를 대신 지불하고 있었다는 말이 유쾌했다. 날 정신없이 했던 것들에 대해서 버리고 치워서 공간을 만들었다. 버리는 행위에서 뭔가 쾌감을 느꼈다. 눈앞에 거슬리고 있던 것 치워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미니멀 라이프에 열광하는가 싶기도 하다. 당장 방 자체가 깨끗하고 너르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몸 뉠 곳이 넓어지니 마음도 넓어졌다. 인류가 쌓아 올린 빅데이터에 대해 신뢰도가 올라갔다. 점점 고지식하고 꽉 막힌 오지랖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공감하는 거 보니 나이가 들고 철이 든 걸까? 그들 말에 의하면 조금 성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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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방과 몸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먹으면 바로 설거지하고 일주일에 한 번 청소, 이불 빨래, 설거지, 쓰레기 바로 버리기. 적당한 운동과 걷기. 최소한의 물건들. 감탄했다. 몸이든 뭐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꽤 기분 좋다는 것과 이 정도의 물건만으로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신경 쓸 게 없어서 편했다. 무소유의 미학?


이대로 끝맺으면 미니멀라이프에 대해서 홍보하고 추천하는 글이겠지. 환절에 둔했던 것처럼, 내 모습이 환절이었다고, 과도기의 모습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정확한 나이와 곧 취준을 해야 한다는 것, 고정관념과 기대 역할들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다. 정작, 정작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나의 자아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뒤늦게 인식했다는 이야기다.


암흑기라고 자조하며 의욕이 없다고 느꼈던 요즘을, 지난시기를 마무리 짓고 이후 시기를 준비하기 위한 과도기라고 여기게 됐다. 제일 먼저 신경 쓰게 했던 낡은 것과 거슬리는 오래된 것, 안 쓰는 것 따위를 치울 것이다. 만용과 치기, 근시안, 고정관념들. 물론 내가 사랑하는 유쾌한 졸렬함은 그대로 둘 것이다. 지난날의 자아는 떠날 준비를 마치고 미래의 자아가 입주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

 


[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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