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딱한 세상 관찰,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글 입력 2020.05.1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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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세 번째 에세이 번역서가 출간됐다. 바다 출판사, 이다희 번역. 나는 2018년 출간한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김명남 옮김, 바다 출판사)을 읽고 난 이후 내내 월리스의 열렬한 팬이다. 집에 국내 출간된 번역서 다섯 권(에세이 세 권, 연설집 한 권, 소설 한 권)을 다 가지고 있고, 원서로 된 그의 평전 한 권도 있지만 이건 '영어 멀미'가 나는 바람에 열 장 이상 읽지 않았다. 월리스의 진수는 에세이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기존의 번역본과 겹치지 않는 다섯 편의 에세이를 읽을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일이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속 작품은 문학, 미국 문화, 정치 등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를 모아 종합적인 모습으로 작가 월리스를 소개했고, 스포츠 산문집 <끈이론>은 테니스를 애타게 사랑한 월리스를 보여준다. 그러면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에서는 그의 어떤 면모가 두드러질까? 축제, 영화, 문학 등 에세이 주제는 제각각이다. 내가 읽은 바,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건 월리스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와. 이를 바라보는 그의 치밀하고 집요한 불평불만이다. 이 사적인 에세이들은 사적이기 때문에 재밌고 독창적이지만, 그와 함께 이 자의식이 뻗어나가는 지평의 한계도 눈에 띈다. 글솜씨와 함께 작가 개인은 미국 동부의 백인 남성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것이다. 첫 번째 에세이집(<재밌다고들 하지만 (...)>)에서 볼 수 없었던 내밀하고 더 날 것의 월리스를 만난 기분이다.

 

 

"여기서 '특별한' 것은 바로 소외로부터의 휴가다. 이곳에서의 현실이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잠시나마 사랑할 수 있는 기회." 25쪽.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는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 주의 지역 축제를 취재한 르포형 에세이다. 월리스는 일리노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주로 뉴욕에서 활동했다. 잡지 <하퍼스>의 제안으로 지역 축제를 취재하기 위해 일리노이를 다시 찾은 그의 감회는 상당히 암담하다. 모든 걸 관찰하고 빠짐없이 기록하려 하면서도, 이 축제, 중서부라는 지역, 중서부인들의 모습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월리스의 시선이 축제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를 기막히게 포착한다. 버터와 설탕으로 절여진 음식, 어린이 미인 대회, 가축 전시, 옥수수 농사, 경악스런 놀이 기구와 그걸 돈 주고 타는 사람들. 너무나 미국적인 모습이다. 화자인 월리스는 이 모든 게 익숙하면서도 진저리 난다.


월리스의 괴로움은 너무나 사적이기에 어찌 보면 하찮고 우습지만("나는 매우 예민해서 차멀미, 비행기 멀미, 고소공포 멀미 등을 하며 동생은 내게 "인생 멀미"를 한다고 말한다" 37쪽.) 현실을 가감없이(가차없이!) 관찰해 더 정확한 진실을 통찰한다. 만약 그의 고향 친구가 읽는다면 매우 불쾌해할만큼 매정하게 지역 축제와 중서부인을 묘사하긴 했지만, 월리스에게는 경험에서 나온 근거가 있다. 그가 일리노이에서 보낸 세월과 그렇게 보고 느낀 감각이다.("미안하지만 이건 다 사실이다. 난 케이마트족과 고등학교에 다녔다. 어떤 사람들인지 안다."75쪽) 미국 중서부가 어떠한 곳인지 알고 싶다면 영상으로 직접 보여주는 많은 영화들보다도, 이 에세이 한 편을 읽는 걸 추천하고 싶다. 자신감 넘치는 미국의 괴상한 아이러니를 악몽처럼 흡수하는 이 에세이는 공포스럽고, 흥미롭고, 아주 우습다.



"작가의 선택은 결국 폭주하는 이기주의나 열정적인 헌신, 모래 놀이터 전부를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유아적인 욕망, 혹은 이 세 가지 모두를 나타내게 된다." 122쪽


 

"린치가 천재인지 바보인지 때로는 잘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린치가 매혹적인 이유다."(140쪽) 두 번째 에세이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는 월리스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 탐방 일지이자, 데이비드 린치 작가론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린치의 광팬"이었다고 고백하는 월리스는 잡지 <프리미어>의 제안으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촬영장을 취재할 수 있었는데, 이 현장 모습과 그의 영화 비평이 어우러진 이 글은 린치가 그에게,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계에 어떤 존재인지 훌륭하게 해석한다.


린치의 팬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숭배하지 않는 월리스는(그가 실물로 만난 린치는 나무에 오줌을 싸는 사람이다.) 자신의 좋음에 대한 이유를 찾고, 이를 설파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단점을 먼저 나서서 오목조목 짚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예술가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리하고 철학적이며 예술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남다른 에세이다.   서양의 선/악 이분법에 기준에 예술 작품을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게 허술하며, 진실로, 노골적으로, 순수하게 악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린치는 현대의 예술적 영웅이라는 월리스의 글은 흥미롭고 재밌다. 하지만 읽는 내내 나를 근질거리게 한 대목은 지성이 번뜩이는 비평이 아니라 그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 부분이다.


 

전 과제에 대한 퍼트리샤 아켓의 생각

 

"빌과 밸새저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과연 프레드(혹은 피트)가 어떤 종류의 여성혐오를 보이느냐는 거예요. 여자와 데이트하고 잠자리를 하고 다시는 전화하지 않는 사람이냐, 아니면 데이트하고 잠자리를 하고 죽이는 사람이냐? 그런데 정말로 탐구할 가치가 있는 질문은 이거죠. 이 두 종류가 과연 얼마나 다른가?" (179쪽)


 

월리스는 이 발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켓의 생각은 저 인용구만 있을 뿐이고, 작가는 바로 다음 소제목 '11a. 데이비드 린치가 우리로부터 원하는 게 없다는 점은 장점일 수 있다'로 넘어가 린치 파헤치기에 몰입한다. 월리스가 얼마나 온갖 것들에 대해 수다를 떠는 지 생각해보면(그는 LA에서 벌룬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는 걸로 한 페이지 가량의 주석을 만드는 사람이다) 상당히 예민하고 분명 탐구해볼 만한 주제인 아켓의 발언에 한 마디 말이 없다니 기이한 일이다. 의도적인 침묵/회피를 충분히 의심해볼 만하다. 월리스가 이 아켓의 발언에 침묵하는(한 마디 말도 안 덧붙일 거라면 왜 굳이 에세이에 삽입한 걸까?) 행동은 후에 린치의 영웅성을 논증하는 과정과 엮여 작가가 세상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는지 드러낸다. 높은 확률로 미국 동부(뉴욕!)에 거주할 법한 백인 남성이다.

 

린치를 옹호하는 월리스의 주장은 이렇다.



"그러나 린치의 영화가 끔찍함/사악함/변태적임에 어떤 표면적 '판단'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영화가 비도덕적, 부도덕적, 심지어 악하다는 주장은 가장 야비한 형태의 개소리다. 그 논리가 엉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요즘 영화를 볼 때 가정하는 도덕적 전제들이 얼마나 빈약한지 나타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많은 영화인들이 린치에게서 '도덕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진짜 이유는 우리가 린치의 진실을 도덕적으로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며, 우리는 영화를 볼 때 불편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 린치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악이 그들을 착용한다. (...) 그리고 린치는 이런 세상을 탐험하고자 한 대가를 비평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호되게 치른다. 왜냐하면 우리 미국인들은 우리의 예술 속 도덕 세계가 깨끗하게 그려지고 정확하게 구분된 말끔하고 정리된 세계라야 좋아하기 때문이다." (196-200쪽)

 

 

깨끗한 도덕관에 신물이 난 나머지 악을 너무 반가워하는 듯 보이는 이 대목은 월리스가 린치에게 감명받은 이유를 독보적으로 해석하지만, 그가 하도 선악을 들먹이며 린치를 추켜세우는 바람에 나는 언짢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로스트 하이웨이>를 보진 않았지만, 월리스가 말하는 줄거리에 아내 살인이 나오는 걸 보아 린치가 표현했다는 '악'이 어떤 방식일지 감이 온다.

 

린치가 영웅적으로 보여준다는 '악'이 대체 뭘까? 반도덕적 영화들은 우리의 도덕 관념의 허위/위선을 건드리는 도구로 다양한 폭력의 재현을 사용한다. 살인, 폭행, 사기...문제는 이런 '악적인'폭력을 재현할 때 어떤 사람이 폭력을 행하고 어떤 사람이 폭력을 당하느냐이다. 린치는 악을 통해 우리의 도덕 관념을 불편하게 한다고 하지만, 사실 악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기존 도덕 관념에 의지한다. 살인은 나쁘다는 전제. 특히 (뚜렷한) 원인 없는 살인은 근원적인 사악함을 드러내며, 이런 내면을 표출할 수 있는 건 아내(여성) 살인이다. 하지만 정말 여성 살인이 영화를 보는 여성 관객에게 자신의 내면에 잠재한 흥미진진한 변태성을 일깨워줄까? 여성 살인이 누군가에게 내재한 악이 되려면, 여성을 죽이는 게 어렵지 않음에도 사회적 도덕 관념이라는 가치를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참고' 있어야 성립된다. 할 수 있으나, 하지 않는 행동을 누군가 대신할 때 우리의 변태스런 치부가 드러난 듯 부끄러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린치의 작품 속에서 악을 착용하는 사람, 이 작품의 진실함과 노골성에 감탄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지 분명하다. 월리스와 같은 백인 남성이다.

 

월리스는 린치 작품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린치의 영화는 왜 이렇게 백인 위주인가?

 

아마 린치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화면에 백인과 흑인을 함께 두면 자동적으로 정치적 전압이 생긴다.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긴장이 생긴다. 그런데 린치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도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긴장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긴장에 대한 영화이기는 해도 이 긴장은 언제나 개인 안에 그리고 개인 사이에 존재한다. 린치의 영화에는 어떤 의미 있는 집단도 유대 관계도 없다. 때때로 협력 관계는 나타나지만 이런 관계는 집착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다. (...)어쨋든 이런 종류의 것들이야말로 린치의 영화에 담긴 진정한 정치, 자아/외부, 이드/객체의 원초적인 정치다. 철저히 종교와 어둠의 정치지만 린치에게 이것은 성서나 피부색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177-178쪽)


 

하지만 이런 지적은 놀라울 정도로 인종 문제만 건드리고 있다. 인물들을 모두 백인으로 만들면 '비정치적'일까? 어떤 개인은 의심없이 보편적 개인으로서 존재하고, 어떤 개인은 정치적 상징성을 띄는 존재로 재현되는 걸까? 흑인이 백인을 죽이거나, 여성이 남성을 죽이는 건 보편적 악을 재현하기에는 너무 특수하고, 정치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삶이 정치적 영향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린치적 살인을 저지르는 일, 예컨대 남편이 자꾸 샌드위치에 땅콩 버터가 아닌 케찹을 바른다는 이유로 목에 칼을 꽂는 영화는 우리 내면의 보편적 자의식을 상징한다고 보기엔 더 정치적으로 섬뜩하다(개인적으로는 꼭 보고 싶지만).


린치 영화에서 흑인은 거의 나오지 않고 여성의 린치적 행동은 기껏해야 아주 히스테릭하게 구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도덕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말 어떤 '사악한' 행동을 참고 있는 건 누구인가? 자의식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완벽한 개인으로 무대에 설 수 없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무의식을 탐험하는 린치 와 동참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치적 전압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 집단을 배제하는 건 감독의 재량이지만, 이를 '비정치적'행동이며 자아/외부, 이드/객체의 원초적 자아 구조가 진정한 정치라고 옹호하는 월리스의 행동은 비겁해 보인다. 이는 아켓이 콕 집어서 린치의 '여성 혐오'를 언급했고, 월리스도 분명 그 말을 글로 옮길 만큼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행동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그 수다스런 입을 다물고 방관자에 입장에  있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세 번째 에세이 '무엇의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에서 존 업다이크의 유약한 남성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걸 생각하면 월리스가 여성 문제에 아주 무감각한 것만은 아니었다. 업다이크를 'GMN위대한 남성 나르시스트'라 칭하며 그의 나르시스트적 면모를 단두대에 올린다.


 

"(...) 나는 이런 태도가 충격적이거나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다. (성기가) 꼿꼿하든 축 늘어져 있든 벤 턴불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명백하다. 그러나 그가 불행한 이유는 그가 개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는 이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223-224쪽)


 

월리스는 엄청난 에고이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 야비한 욕구에 기반한 단정이나 오만을 경멸한다. 늙은 업다이크의 작품은 더 이상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만큼 추태를 부렸기 때문에 월리스의 비딱한 눈에 띄었지만 과연 그가 GMN의 계열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월리스는 가랑이 사이 막대기가 갈 곳이 없어 불행해 하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분명 자아 유지를 위해 여성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재밌다고들 하지만(...)>의 김명남 역자의 서문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월리스는) 남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병적인 수준이었고, 결국에는 꼭 맞는 반려자를 만나지만 그 전에는 여자들에게 스토킹 수준으로 집착하고 이용하고 학생들과도 섹스했던 무절제한 남자였고, (...)"

 

그러면 이 흠결 있는 백인 남자의 책을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는 뭘까? 월리스는 인터뷰에서 논픽션을 쓸 때면 "약간 더 멍청하고 얼간이 같은" 자아를 취하게 된다고 말했다.(<재밌다고들(...)>10쪽) 확실히 월리스의 에세이에서 화자는 얼간이스럽다. 그는 모든 에세이에서 자기가 어떤 인물인지 드러내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했다. 월리스의 모든 주제는 자신의 월리스스러움이며, 그 월리스스러움이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계의 기괴함이다.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유려하게 연기하고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글을 쓸 때 계속 수정하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의 단점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긴 넋두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단점, 결함, 한계. 월리스는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것을 영리하게, 매력있게 보여준다. 그의 예민함은 그 자체로 글감이다. 과장된 우스꽝스러움, 도덕 관념에 대한 월리스의 집요한 태도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낯설어 하며, 그렇기에 어느 선에 서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전시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은 찾기 아주 드물다.

 

내가 월리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완벽한 인간이거나, 놀랍도록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가 엉망이기 때문에, 그가 온갖 중독에 시달릴 정도로 인생을 낯설어 했기에 사랑한다. 결국 자신이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사람은 될 수 없음을 알고 현대 사회에서 월리스로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유머러스하게 역설했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가 두려워 하는 게 많았음을 사랑하고, 그의 단점을 개성으로 만들만큼 뛰어났던 글솜씨를 사랑한다. 이런 팬심은 월리스가 마지막 에세이 '결정자가 된다는 것'에서 자신이 좋은 에세이를 결정하는 요소를 설명한 것과는 좀 다르다.

 

 

"'(...)물론 기막히게 아름다운 언어 예술이기도 하지만 '완전 소음'의 맥락에서 자유롭고 교양 있는 성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 본보기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자신의 오류 혹은 우둔함을 알아볼 수 있는 지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흡수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는, 그래서 용감하게 그다음 밝혀진 오류로 갈 수 있는 겸손이 있는 삶이다. (...)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281쪽)


 

월리스가 세상을 사유하는 방식을 본보기로 삼고 싶지는 않다. 그가 살면서 겪은 정신적 문제를 생각해보면(약물 중독, 알콜 중독, 섹스 중독, 우울증, 공포증 등...) 최대한 반대 방향을 향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12년 전 자살(집에서 목을 매달았다)로 생을 끝냈다. 남은 작품은 각국에서 번역되지만 작가는 이미 멀미나는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개성을 표출하는 작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단점을 숨기려 하지도 않으면서 멋지게 자기 할 말을 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월리스가 완벽하지 못함을 알고 있지만, 이 작가의 이름에 무한한 경외감을 느낀다. 고통도 우스울 수 있음을 역설하는 작가가 몇 안 되기 때문이고, 월리스는 과장스럽게 그 여정을 시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린치를 옹호한 그의 말을 빌려올 수 밖에 없다.

 

 

"무엇이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진실로 느껴지느냐, 전달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대박을 터뜨리느냐 하는 것이다. (...) 그가 표현주의자로서 순진하건 병적이건 포스트모더니즘 방면으로 엄청나게 세련되었건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블루 벨벳>이 내 안에서 대박을 터뜨렸고 현대의 예술적 영웅성의 한 사례로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194쪽)


 

그가 에고이스트로서 순진하건 병적이건 포스트모더니즘 방면으로 엄청나게 세련되었던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라는 이름이 내 안에서 대박을 터뜨렸고 현대의 예술적 영웅성의 한 사례로 내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반갑고 그리운 사람으로.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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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gate95
    • 제 앞에 사람대신 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마다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분석적 태도와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지만 글 전체에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배여있습니다. 월리스의 글도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월리스의 글의 특징을 담아내는 필진님의 글도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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