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짝사랑 연대기] 2장 : 너는 글을 통해 '뭘' 말하고 싶어?

글을 통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5.1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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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메시지


 

1학년 2학기에 처음 들었던 희곡 수업은 나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처음 뵌 희곡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희곡 작법서에 나오는 한 문장을 읽도록 시켰다.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없는, 간절한 ‘메시지’가 작가 안에 있다면 그건 그 작가에게 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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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 뒤로 이어졌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작가에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한다. 이걸 말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의 메시지. 그 신념이 앞으로 고난투성이인 글쓰기를 할 때 큰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교수님께서는 글을 쓸 때 꼭 자신은 이걸 말해야겠다는 자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써오는 것을 과제로 내주셨다.

 

빈 한글 파일 창을 켜고 나서, 내가 마주한 질문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섣불리 답을 써 내려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 인생의 궤적을 뒤질수록 답은 서서히 명확해졌다. 저때로부터 3년이 지난 나에게 누가 똑같이 저 질문을 한다면 내 답은 그대로다.

 

바로 사회적 연대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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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양한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일에 언제나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나의 목표다. 문학, 영화 드라마 등 어떤 콘텐츠에서 그들이 더 쉽게 희화화되고 더 자주 타자화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아주 어린 나이부터 듣는 동화에서는 계모와 마녀가 자주 나온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류에 벗어난 이방인, 타자라는 것이다. 정상 가족 시스템에 속하지 못한 계모, 과부거나 늙은 여성이 악마화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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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 계모는 ‘원래’, ‘당연히’ 그렇게 악했다는 결론에 ‘질문’하는 사람이 작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 속에서 납작해진 인물들을 궁금해하고 아무도 써주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게 나의 가치관이다. 여성이면 이래서 안 돼, 게이면 이래서 문제라니까, 장애인 치고 대단하다……. 등등 그렇게 쉽게 뱉을 수 있는 말 안에 있는 타자는 아주 쉽게 판단되고 정의된 존재다. 나는 그들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씀으로써 연대를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이런 가치관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그러자 어렵지 않게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읽었던 시는 밀양 송전탑 사건을 다루고 있는 시였다. 그 시를 읽고 난 뒤 국어 선생님께서는 밀양 주민들이 투쟁하고 있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틀어주셨다. 나는 같은 땅 위에 사는 내가 저렇게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사람들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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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그 배에 탄 친구들은 나와 동갑이었다. 그 배에 타고 있었던 게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 사진만 봐도 내 주변에 있는 것처럼 낯설지 않은 얼굴을 가진 그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고 배 안에서 질서를 지키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사무치는 밤에는 엉엉 우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게 되었다. 내가 스무 살이 된 해에는 강남역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죽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나 스스로 다짐했던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약속이 속에서 불길처럼 일었다. 나는 그이를 추모하는 시를 대자보에 써 학교에 붙였다.

 

두 번째 가치관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 나 자신은 절대로 나 스스로가 알아서 존재하고 성장해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은 스물네 살이 되는 시간 동안 켜켜이 받아온 사랑 덕이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을 해내기도 할 때 그 안에 있는 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곤 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데에는 내가 무슨 말만 해도 웃어주고 리액션해 주신 부모님 덕에, 내가 세이브더칠드런을 후원하는 이유에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 덕에, 새로운 시도를 해볼 때 덜 주저하는 이유에는 날 믿는다고 말해주는 친구들 덕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요한복음 13장 34절 ~ 35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가 믿는 신의 제자인 걸 나타낼 방법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데에 감동하곤 한다. 성경에서는 유독 나그네, 과부, 어린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시대 인구를 세는 ‘사람’의 범위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람들.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두 신념이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는 생각에 항상 이르곤 한다.

 

 

 

신념, 글을 쓰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



생각해보면 오라드리밍 프로젝트를 겁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신념 덕이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문학 내의 남성 중심적 체제가 여전히 강고하다는 걸 느꼈다. 우리들의 목소리와 고민을 담은 페미니즘 소설집이 이 세상에 꼭 내고 싶었다. 그 간절함이 나를 주저 없이 실천하게 했다.

 

(제가 기획한 오라드리밍 프로젝트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어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누군가 장난식 후원을 했을 때는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안 그래도 펀딩이 기간 안에 목표 금액에 못 달성할 것 같은데 –달성하지 못한다면 나와 팀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힘이 빠졌다. 게다가 이때는 우리 과의 교수가 수업 시간에 미투 운동을 조롱하는 발언을 하고, 제자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고발이 터져 더욱 절망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가짜 후원으로 인해 100%가 달성된 수치를 보며 나는 다 관두고 싶다는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나를 노트북을 켜고 타자를 하게 만든 힘은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였다. 상황을 알리는 글을 올리며 그 당시 나는 이 글을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그래도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하고 한 자 한 자 내가 왜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는지 글을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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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90년생 김지훈을 프사로 하신 분이 천만 원을 후원하셨더군요. 90년생 김지훈은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82년생 김지영을 남초 사이트에서 미러링한 작품입니다. 당신이 이렇게 장난식으로 후원할 수 있는 건, 이 프로젝트를 준비한 작가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준비했고, 어떤 마음으로 모였고 어떤 심정으로 글을 쓰고 서로 봐주었는지 당신은 모르고 그게 가늠도 가지 않기 때문이겠죠. 치졸하고 옹졸합니다.

 

당신은 아마도 평생 모를 겁니다. 우리 작가진들이 왜 여성들의 문학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는지, 우리가 고른 소재들이 어떤 경험에서 온 것들인지, 존경했던 작가의 작품에서 강간을 성적 판타지로 묘사한 장면을 읽게 될 때 기분이 어땠는지,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이 교수에게서 2차 가해를 당하고, 작가가 되고 싶다고 모였던 학생들이 당신들의 문학이 그런 거라면 우리는 작가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될 때 느끼는 감정들을 당신은 평생 모를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장난식으로 아니면 항의의 의미로 (프사를 90년생 김지훈으로 한 것부터가 의도가 투명하게 보입니다.)후원한 거겠죠.



많은 사람들이 연대의 의미로 저 글을 알리고 후원을 해주어서 우리는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내 친구는 저 글을 읽고 새벽에 나에게 이런 내용의 카톡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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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험 이후로 왜 교수님께서 글을 쓸 때의 신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는지 느끼게 되었다. 내가 정말 이걸 쓰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글은 사람들이 알아봐 주었다. 글은 결국 작가의 어떤 전하고자 하는 신념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담긴 신념이 만약 사람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것이거나 악한 것이라면 그걸 담고 있는 그릇은 녹아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오늘도 글을 쓰기 전에 이 글에 담을 주제에 대해 여러 번 곱씹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글에 담긴 신념 앞에서 나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인가 되돌아본다. 물론 나는 불완전한 사람이고 평생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믿는 신념을 계속해서 실천하기 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말을 쓰기 위해서 자판 위에 두 손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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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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