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모름으로써 알아가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수평의 축》
글 입력 2020.05.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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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류는 쉴 새 없이 세상을 개척해왔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고 닿지 않는 곳에 닿고자 했다. 역사는 언제나 인간에게 무용한 것을 유용하게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상에 인류가 지배하지 못할 곳은 없다는 듯이 인간은 발길 닿는 족족 거침없이 자국을 남기고 깃발을 꽂았다. 그곳의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자만과 속단의 표식이다. 인간은 모든 곳에 갈 수 있으며 또한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은 그 비현실성을 스스로 부정하려는 듯 거침없이, 때론 폭력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 인간이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 집단 내에서도 직접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있듯이,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외 세상이 있다. 자연이 그러하다. 자연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지배하여 인간의 법칙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인류 역사를 거듭하며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인간은 자연을 모른다.


완벽히 알 수 없는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그것을 대상화한다. 그 표현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류는 인간의 관점에 입각하여 철저히 자신과 자연을 분리하고 자연을 인간의 프레임에 가뒀다. 특히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다. 자연을 예찬할 때도 그들은 아름다움을 찬양, 즉 ‘찬미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아르카디아’만이 그들의 자연이었다. 동양의 경우, 인위가 가해지지 않고 인간의 예상과 무관하게 시시각각 변하며 주체로서 행위 하는 자연을 상정했으나 이 역시 숭고한 가치의 표상이라는 프레임에 가둬지기 십상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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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획전시 ‘수평의 축’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으로 시작된다. 자연과 인간이 마주하는 수평선에 하나의 축을 세움으로써 둘이 평행한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해당 전시는 닿을 듯하면서도 온전히 합일될 수 없는 자연과 인간의 위치를 인간의 관점에서 인식하고 규명한다. 자연에 대한 대상화에서 탈피하려는 시도이자, 탈피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는 시도이다. 자연과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수긍하고 그 간격에 맞지 않는 축을 억지로 끼워 넣는 움직임을 경계하는 동시에 자연을 둘러싼 최대한 다양한 맥락을 고려한다. 인간의 관점이 개입하여 조정할 틈도 없이 자연 스스로 촘촘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서울관의 소장품으로 이뤄진 전시는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된다. 자연의 부분을 재현한 ‘부분의 전체’, 비물질적인 현상과 경험을 부피를 가진 형체로써 가시화한 ‘현상의 부피’, 장소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장소의 이면’의 세 섹션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순차적으로 제시되어 자연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인식을 일깨운다.


첫 번째 섹션, ‘부분의 전체’에서부터 관객은 인간이 자연의 부분밖에 볼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전시 초입에 크게 설치된 제니퍼 스타인캠프의 장대한 영상 작품에서는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 과일과 식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서로 부딪치고 넘실댄다. 꽃들은 피어나고 이파리는 살랑인다. 생명감으로 가득한 화면은 서양에서 흔히 묘사되는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에 가깝다. 관객은 자연의 극히 일부분을 마주하며 인간의 수사로 되풀이되었던 여물은 자연의 모습에 친숙함을 느끼다가도, 인간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화면에 거리감을 느끼며 조금의 틈을 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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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어지는 작품은 에이샤-리사 아틸라의 ‘수평-바카수오라’이다. 역시 영상 작품으로, 실제 가문비나무의 크기를 똑같이 재현하기 위하여 나무를 촬영한 영상을 가로로 길게 눕혀 6채널로 표현했다. 초입에서 확대되기 시작한 심리적 거리감은 자연 가장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고자 한 작품에서 역설적으로 더욱 심화된다. 그것을 담은 것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카메라이자 프레임이며, 담긴 것은 작가가 제한적으로 포착한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떤 것을 목표하면서도 목표를 완전히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는 전시의 목적에 그 자체로 한 걸음 다가선다.


해당 섹션은 자연에 대해 인간이 갖는 시야의 한계를 자각함과 동시에 부분을 확대하고 또 다른 부분들과 접목하여 이해를 확장하고자 한 양면적 시도의 공간이다. 수년에 걸쳐 하늘의 모습을 기록한 바이런 킴의 캔버스 회화 연작은 하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고 하루하루가 다른 하늘의 양태를 ‘변화’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대응하여 매일 다른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낸 각각 다른 주체로서의 하늘의 존재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인간을 감싸고 있으나 모든 인간이 부분만을 볼 수밖에 없는 하늘이라는 소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다시 한번 일으키면서도, 더욱 넓은 지평에서의 자연에의 이해를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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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을 보는 제한적인 시각을 의식하고 그것을 확장하려는 첫 번째 시도에 이어, 두 번째 섹션 ‘현상의 부피’에서는 정형화된 프레임 속에서 여태 자연으로 인식조차 되지 못했던 비물질적 요소들을 부피를 가진 실체로 새롭게 경험 및 인식하고자 한다. 첫 번째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관을 나온 후 두 번째 전시관을 들어서기 이전의 공간인 복도에 놓여 있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사각 구체’는 직육면체의 스테인리스 황동 거울이 서로 접착되어 구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입체 작품이다. 부분(직육면체)은 전체(구체)에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형태를 이룬다. 부분에의 인식은 헛된 일이 아니나, 전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순간 관객은 더욱 찬란한 빛을 마주하게 된다. 첫 번째 섹션과 두 번째 섹션을 잇는 역할을 하는 해당 작업은 이전에 인식한 한계를 타파하지는 못하더라도, 새로운 인식으로써 한계까지의 범위를 최대한 넓히고자 하는 시도 즉 두 번째 섹션에서의 시도 역시 충분히 가치 있음을 강조한다.


이 공간에서는 자연이 아닌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을 자연의 범주로 아우르고자 한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적당함’을 바란다. 적당히 살아 있어야 하고, 생명력을 가져야 하고, 인간의 활동을 침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죽어있어서는 안 된다. (보기에) 정적인 자연은 자연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며 다른 꽃이 피어나길 바라면서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만 바뀌기를 바란다. 그러나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들도, 죽은 듯이 정적이고 가만한 사물들도 또한 자연이다. 인간의 시점에서 봤을 때 살아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어쩌면 살아 있다.


한스 하케의 ‘아이스 테이블’은 얼음이 녹고 다시 얼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조형 작품으로 동결이라는 정적인 자연 현상을 실체화한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자연의 움직임을 인위의 영역으로 끌어와서 새로운 지각으로 경험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조형 작품인 팀 프렌티스의 ‘부드러운 비’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알루미늄 막대로 모빌처럼 형상화한 작품으로 전시관 바깥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속절없이 떨어지고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비라는 자연현상을 일시 정지의 상태로 멈춰놓음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부드럽게 내리는 비는 인간의 딱딱한 프레임 속에 굳어 관조의 대상이 되고, 엄연히 세상에 머무르고 손으로 만져지는 자연의 일부로 재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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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원의 ‘넓이’ 시리즈는 다양하게 관찰된 공간 속의 상황을 색면으로 표현한 회화 연작이다. 단순히 커다란 색면으로 보이는 화폭은 사실은 무수한 선들의 집합체이다. 색의 연속은 자연 현상 중 계절의 변화를 연상케 한다. 무수한 선을 긋는 수행적인 태도가 수반된 이 작품은 시간과 상황, 장소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야 넓히기’ 과정의 현현이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지는 방식처럼 주체성이 없는 단순 배경처럼 인식될 수 있으나, 그 안에는 관객이 차마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교차가 있다. 물론 색면들은 자연을 모두 담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는 화폭의 너비만큼 주어진 자연과 인간 간의 간격을 받아들이고, 자연에 귀 기울임으로써 얻어낸 이야기의 선들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묵묵히 채워나간다.


시야의 제한을 인정한 후, 고개를 돌려 시야를 확대했다. 그다음은 그 시야 안에 있는 자연에는 무엇이 있으며 그것은 어떤 경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아볼 차례다. 마지막 섹션인 ‘장소의 이면’에서는 주어진 장소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을 잠시 차치하고 주목되지 않았던 비이상적 역사와 상황을 직시하며 더 많은 공간을 자연에 포함하고자 했다. 원성원과 한성필의 사진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찰나를 포착하여 회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인간에 의해 해석된 장소 그 이면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라는 매체에 불가항력적으로 담길 수밖에 없는 인위성과 자의성을 드러낸다.


로랑 그라소의 ‘무성영화’는 스페인의 코르도헤나라는 해안 군사지대를 촬영한 영상 작업으로, 평온해 보이는 해안 풍경을 비추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그 주변의 군사시설물들로 시점이 옮겨진다. 안온한 장소에 감춰져 있는 전쟁의 역사와 현재를 암시하는 동시에 언뜻 보이는 잠수정의 모습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충돌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르카디아’적 자연으로 보일 수 있는 장소의 이면을 소름 끼치도록 평안하게 드러낸다. 장소는 기억을 갖는다. 할퀴어진 상처를 담담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없어지지 않으며, 잊지 않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밤 고요한 대답으로 모두를 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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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시종 관객의 직선적인 이해에 제동을 걸며 걸음을 멈추게 하고 시선을 굴절시켜 작품을 한 번 더 바라보게 한다. 첫 번째 섹션에 놓인 데이비드 내시의 ‘줄무늬의 달리는 사람’은 이러한 제시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관객은 제목을 읽기 전엔 뿌리가 세워진 통나무를, 제목을 읽고 나선 줄무늬의 달리는 사람을 인식한다. 관객이 틀릴 수 있음을, 더 나아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전시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자연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완전하고 충분하게 만들려고 하는 인간 역시도 자연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피력한다.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맞닿고자 하든, 평행관계를 인정하고 떨어져 있든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은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을 이해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전시의 목적은 그렇게 실현된다. 인간이 이해할 수도, 개척할 수도, 정복하고 지배할 수도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 인식함으로써 수평의 축은 세워진다. 축 너머의 세상에 결코 닿을 수 없는 무력한 인간에게 주어진 일은 무엇인가. 모름을 인정하고 앎을 쌓아가야 한다. 부분을 확대함으로써, 현상을 지각함으로써, 이면을 포괄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야 한다. 설사 그 사이가 모름으로 채워지더라도 자연과의 간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정한 거리와 차이를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 현실 때문이다.


너그럽고 온화한 자연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이전에 너그럽고 온화하지 않은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알고 싶지 않은 세상과도 함께 한다. 미지의 평행선을 끝없이 달리면서도 잊지 않고 축을 세우며 더 알아가야 한다. 매일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의 예상치 못한 반짝임에 기뻐하기 위해선, 그 이면에 있는 슬픔을 풍화시키지 않으리라는 단단한 다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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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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