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티끌처럼 나부끼지만 깊은 바다 같은 존재를 꿈꾼다 – 티끌 같은 나

글 입력 2020.04.2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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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은 내게 ‘고전’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였다. 푸슈킨, 체호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내가 여태껏 접해 본 러시아문학은 모두 고전에 속하는 작품들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쓰인 소설이었다. 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기에 이 작품이 기대됐다. 더군다나 처음 본 러시아 여성 작가였고, 띠지 문구에 ‘러시아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기에 굉장히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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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는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중단편 선집이다. 「티끌 같은 나」, 「이유」, 「첫 번째 시도」, 「남이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어느 한가한 저녁」 총 다섯 편의 소설이 엮어졌다. 소설들의 분량은 제각각이다. 표제작인 「티끌 같은 나」는 다섯 편 중 가장 분량이 많다. 그래서인지 서사 서술이 가장 충분하다고 느꼈고, 책을 읽을 때도, 다 읽고도 가장 마음에 남았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모두 여성 인물이다. 이들의 삶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는 사랑과 욕망이다. 소설 전반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마치 책 표지를 봤을 때의 느낌과 같았다. 어느 겨울 러시아를 여행했을 때 느꼈던 차갑고 회색빛의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티끌 같은 나’라는 제목은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여성들을 함축하는 말이었다. 주인공 여성들은 티끌처럼 나부끼고 있었고, 소설에서 희망의 밝은 빛은 찾기 어려워 보였다.
 
내 편견 속 러시아는 마초 문화가 강한 나라였다. 소설들의 배경은 1900년대 중후반이다. 시간과 공간을 고려했을 때 소설 속에서 묻어나는 가부장적 분위기와 고정된 성 역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그러한 견고한 시대에 고정된 틀 속에 있지만 균열을 내고 혹은 이를 벗어나려는 여성 인물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책의 표제작 「티끌 같은 나」에서 안젤라는 가수가 되고 싶어 성인도 되기 전에 모스크바로 상경한다. 하지만 이내 가수가 되려면 자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안젤라는 악착같이 돈을 번다. 그러다가 니콜라이라는 부자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되는데, 돈 많고 나이 많은 니콜라이와 내연 관계에 빠지게 된다. 급기야 니콜라이는 아내를 두고 집에서 나와 안젤라 이름으로 별장도 사주고 함께 산다. 안젤라의 선택은 도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안젤라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안젤라는 꿋꿋이 살아간다.
 
안젤라의 선택은 계속된다. 니콜라이의 아이를 낳았다면 안젤라는 어쩌면 평생 벌지 않고도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젤라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노력 없이 안락한 삶을 선택하는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수라는 꿈을 안고 계속해서 꿈을 좇는다. 소설의 마지막 무렵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니콜라이를 떠나는 선택도 안젤라의 한결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선택이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욕망을 가장 중시 여기고, 그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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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시련과 좌절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킬리만자로의 눈이 흐릿해지고 조금 녹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으니 자신에게 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여전히 벅찬 희망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하늘은 어둡고 해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티끌 같은 여성들은 때로는 삶의 풍랑에 떠밀려지고 나부끼기도 하지만 목표를 잃지 않는다. 그들은 변함없이 꿋꿋이 살아갈 테고 삶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문득 책 띠지에 쓰인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pre-feminist)’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나이대가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그려내기도 했지만, 작가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굽혀지지 않는 ‘욕망’이라는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는 달에 의해서만 동요될 뿐이니까…….

 

 
「티끌 같은 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다. 티끌이라는 미미한 존재와 비교하면 바다는 너무나도 깊고 커다란 존재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도 안젤라가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비록 지금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안젤라의 포기하지 않는 삶은 계속될 것이고, 그녀는 티끌처럼 나부끼지만 깊은 바다처럼 잔잔한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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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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