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리송한 현대미술을 이해하려면. (2) 현대미술이란? [시각예술]

글 입력 2020.04.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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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인간은 동시대를 살아가야 하는가


 

현대미술과 근대미술은 엄연히 다르다.

 

Modern Art를 지칭할 때 Contemporary Art가 포함될 수는 있지만, Contemporary Art만을 지칭할 땐 Modern Art를 이야기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Contemporary Art는 temporary, 이 특정한 시기를 con, 함께한다는 뜻으로, 현재의 이 시기, 동시대의 무엇을 함께하는, 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미술을 의미한다. 1편에서 근대의 시작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와 같이, 현대미술 역시 현대미술이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순간, 그 이전의 미술과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무엇인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미술이 등장했다는 것인데 과연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무얼까? 현대미술이 등장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땐 어떤 문제가 야기될까?

 

신문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늘 존재해왔고 미술에서도 예외는 없다. ‘난 현대미술엔 관심 없어’ ‘그 이전의 미술을 계속하고 싶어’ ‘내가 만족하고 있으면 문제없는 거잖아?’ 라고 말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한국화 서양화 조소 등 장르를 불문하고 대학교에서조차 전공생들을 대상으로 현대미술 이전의 것들을 계속해서 가르치고 있다. 이를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 이를 계속해서 해나감으로써 어떤 의미를 쟁취할 수 있을까? 정말 지속해도 괜찮은 것일까? 굉장히 철학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그만큼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우주적인 관점에서 따지고 보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다. 우주 역사 130억 년 중에 기껏 80년 정도 먼지 같은 존재로 살아간다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업적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아주 미미한 것이며, 우리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실은 별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생각하고 또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생각하는 것도 생각의 틀에 의한 것이며 언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보통의 인간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로서의 언어가 있기에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언어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인간은 언어가 없다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인간은 이 세계의 제도 속에서 내가 그 제도를 운용해나가면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으로 이야기하면 제도가 인간들로 하여금 그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을 하지 못하면 가치 판단 또한 할 수 없다는, 그렇기에 가치를 판단하게 해주는 것이 언어이고 제도가 나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세상과 시스템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의 차이도 바로 제도의 문제이다. 근대미술의 제도로서 보는 세계와 현대미술의 제도로서 보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내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느냐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의 정도가 아니다. 인식의 틀이 바뀌면 인식 자체가 바뀐다는 뜻인데, 근대미술의 시대에 사는 인간하고 현대미술의 시대에 사는 인간을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자체가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안에 함께 있지만, 현대미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과 근대미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하고는 구성하는 세계가 다르고 구성하는 세계가 다르다는 건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내가 지금 마주하는 시공간이 같으니까 너와 내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이 여겨지지만 같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다른 세상이 구성되기에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일까? 동시대란 곧, ‘어떤 시대’가 그 시대와 같은 시대인데, 그럼 그 ’어떤 시대’는 어떠한 시대일까? 바로 첨단, 생각의 끝인 시대일 것이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거쳐왔던 모든 경험치의 끝에 도달한 시대, 인류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이해한 세계에서 구성한 가장 첨단의 세계와 내가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 되는 순간 나는 과거의 세계가 아닌 그 시대를 사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2천 년 전의 사고방식으로 지금을 살아간다면 과연 동시대를 살아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여자들의 경우, 가정에서 딸이라고 차별하고 남자 형제만 예뻐라 한다면 당연히 기분이 상하겠지만 200년 전만 해도 이는 당연하였기에 기분이 상하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변했고 그렇기에 지금은 차별당하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제도, 시스템 때문에 세상을 보는 입장이 달라졌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 것이다.

 

현대미술이 만들어지고 등장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을 만든 사람은 단순히 현대미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꾼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줄곧 세상을 바꿔왔는데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과도 같다. 개인은 스마트폰이 단순히 개인의 편리만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고 그렇기에 세상은 전과는 다르게 구성되며 다른 세계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물론, 모두가 새로운 세계, 스마트폰이 만든 세상에 흡수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구식 휴대폰을 쓰며 ‘나는 옛것이 좋아’ ‘구식이 더 낭만적이잖아’ ‘내 취향은 복고야 정감 있잖아’와 같이 나름의 여러 이유를 들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여러 이유로 합리화할지라도 변해가는 첨단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것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낭만적인 것이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 여겨질지라도 결국 그저 퇴폐적인 것뿐이다. 첨단을 좇지 못하고 최후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미술도 그렇다. 현대미술이 등장한 다음에 과거의 미술이라는 것은 뒤처지게 되었고 그 과거의 미술은 새로운 세상을,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는 힘을 이제는 잃었기 때문에 도태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미술로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의미 있는 것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제도 자체의 결함 때문에 다음 세계로 넘어가려 해도 넘어갈 수 없는 순간이 생기는,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짜인 미술의 틀 안에서는 더 이상 내 생각을 펼칠 수 없으니 새로운 틀을 짜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새로 짜인 틀이 현대미술이다.

 

근대미술의 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과 현대미술의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지난 1편에서 이야기했듯, 미술의 출발은 ‘내 생각을 표현한다’이다. 그 이전의 그림은 내 생각을 표현한다 가 아닌 이미 구성된 세계를 모방하여 재연한다 이다. 하지만 재연, 모방, 복사의 시대는 끝났고 미술이라는 것은 주체의 의식을 표현하는 자아 표현의 수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때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는, 작가는 자신만의 생각이 있지만, 형식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형식은 형식대로 존재하고 내용은 내용대로 따로 존재하니, 형식에 내용을 집어넣는 꼴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해 근대미술은 따로국밥이었다. 밥 따로 국 따로. 근데 사실 따로국밥도 뱃속에 들어가면 모두 섞이기에 결국 똑같은 것인데, 이를 처음 눈치챈 이가 현대미술을 만들어냈다. 형식 따로 내용 따로일 수 없다는 것을,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를 수 없음을,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없음을 처음 안 사람이 현대미술을 만든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이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바뀌고 사회 체계가 바뀌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도 바뀌었기에 아주 중대한 사건이다. 비단 미술계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푸코가 그랬고 사회적 담론에서는 마셜 맥루언이 그러했고 미술에서는 앤디 워홀이 그러했다.

 


 

현대미술의 창시자 앤디 워홀


 

현대미술은 앤디 워홀로부터 시작됐다. 물론, 현대미술을 워홀 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 전부터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 답답함을 느끼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시도해왔고 그 정점을 이뤄 틀을 만든 것이 워홀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뒤샹이 현대미술의 시초가 아니냐 하기도 하지만 뒤샹은 워홀의 ‘나는 뒤샹에게서 영향받았다’라는 말 한마디 덕분에 후에 재발견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이 워홀이 얼떨결에 대박이 났다, 얼떨결에 현대미술을 만들었다, 현대미술을 통해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틀렸다. 워홀은 이민자 2세로 태어나 몹시 가난한 삶을 살았고 가난을 극복하고자 디자인을 했다. 그가 뉴욕에 왔을 땐 예술가가 아닌 디자이너로 일하러 온 것이었고 디자이너로 무지막지한 성공을 거둔 후에 미술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고 공부한 다음 미술계로 들어오겠다고 선언을 하고 들어온 것이다. 

 

그는 이미 떼돈을 번 후에 미술계에 발 디뎠고 끊임없이 기괴한 행적들을 보였다. 기괴하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한 예를 들면, 워홀은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모든, 유명한 셀럽들이 모이는 파티엔 항상 참석했다. 그런데 후에 워홀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워홀을 보긴 보았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도, 그의 집에 가본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워홀이 죽고 난 다음에야 유산 정리를 위해 집이 공개됐는데 그 거대한 집에 티비 하나와 쇼핑 팩 채로 뜯지도 않은 물건들만 온 집안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 워홀은 죽음조차 극적이었다. 총격을 받고도 살아난 그였는데, 단순 폐렴에 걸려 입원해, 개인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죽었다. 전혀 죽을병이 아니었음에도, 죽을 기미가 없던 사람이었는데 죽어서였을까, 워홀이 죽고 난 다음 워홀 관련 신화는 더욱 증폭되었다.


 


가치를 갖는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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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이 만든, 싸구려처럼 보이는 팝아트에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열광할까? 상업적이고 대중적이고 그렇기에 워홀이 아닌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테면 그 유명한 캠벨 수프 같은 건 미국인이면 누구나 항상 소비하는 일상의 ‘무엇’이었고 그 일상의 무엇을 ‘실크스크린으로’ 마구 찍어 대량생산했는데 왜 사람들은 이에 열광하고 엄청난 가치를 부여할까? 캠벨 수프가 보고 싶은 거면 슈퍼마켓에서 하나 구매해서 집에 두고 실물로 보면 되지 왜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것을 보아야 하나? 심지어 가격도 더 비싼데. 워홀의 이러한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워홀은 ‘나를 이해하려면 나의 껍데기만 봐라’라는, 미술사에 길이길이 기록될 말을 남겼는데, 이 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해하지 못할까?


워홀은 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엇’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구성해서 재질서화 해냈기 때문이다. 재구성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그냥 실크스크린일 뿐이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놓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읽었을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의식의 형태를 형체로 만들어놓은 형식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술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의식되는 것이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의 머릿속에, 의식 안에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미술이라는 게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작품이니까 작품이라 얘기하는 그 자체가 미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미술이 아니라 이를 창조해낸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것 생각과 느낌이 진정 중요한 것이다.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생각과 느낌을 끄집어낸 형태가 눈앞의 작품이며 그렇기에 미술이란 작가의 의식 안에 있는 것이 관객의 의식으로 간 것이고 그렇게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작품 자체가 미술은 아닌 것이다. 그럼, 눈앞의 작품, 물건, 형식 자체만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 읽어야지 된다는 합의 즉 제도를 작가와 관객이 공유하고 있어야 그 안의 내용이 보인다.

 

현대미술에서 작가와 관객이 합의한 것은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형식이라는 일치화이다.

 

다시 캠벨 수프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워홀은 실크 스크린으로 캠벨 수프의 형태를 찍었지만, 수프의 이름은 토마토, 베지터블, 미트 등으로 각기 달랐다. 작품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해보자면, 1. 실크 스크린으로 똑같이 찍었다. 2. 색상이 똑같다. 3. 이름이 다 다르다. 이렇게 세 가지로 나열할 수 있고 이것이 형식이자 내용이 되는 것인데 어떻게 형식이 내용이 되느냐 묻는다면, 삶의 어떤 세계와 유사성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친구의 외모가 예쁘다면 친구처럼 예뻐지고 싶은 거지 나의 정체성을 버리고 친구가 되고 싶은 건 아닌 것처럼, 우리 인간은 나는 나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친구가 명품 A사의 제품을 갖고 있다면 나는 B사의 제품을 갖고 싶은 것처럼 인간은 너와 내가 달라지는 방식으로 나를 주장하고 싶어 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주체를 드러내려 한다.

 

워홀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캠벨 수프로 표현했다. 제아무리 이름이 있다고 각기 다르다고 주장해봐야 똑같은 실크스크린 틀로 찍힌 똑같은 것들인데 서로 나는 너와 다르다며 이야기해봐야 보는 이에겐 그저 우스울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똑같은 시스템 안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데 나는 다르다고 외치는 이들의 모습을 캠벨 수프에 빗댄 것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는 것이 사실 따지고 보면 굉장히 쉽고 간단하다. 또한, 형식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리 구성되는 무한한 것이니 형식을 정해놓고 내용을 담을 때보다 할 수 있는 말이, 담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훨씬 쉽고 풍부해지고 복잡해지고 재밌어질 것이다.

 

앞서, 미술은 작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의식 형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의식 형태라는 것은 의식 형태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걸까? 그렇다면 70억 인구가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전부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의식 형태라는 것은 의식 형태의 방식으로 구성된 세계가 말이 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면 생각한다 라는 것이 생각이 되기 위해선 말이 되어야 한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하며 이를 우리는 진실과 마주한다고 얘기한다. 그렇기에 예술이란, 예술적 진실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네 말이 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된다는 것은 그 말이 진실과 진리에 가닿을 때만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게 내가 무엇인가 만들었기 때문에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무엇인가를 형식화시켜서 만들었는데 그 형식과 구성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가 내가 몰랐던 어떤 세계를 알게 해주는 진실에 가닿을 때만 의미를 지니고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바로 그 말이 의미가 있을 때만 가치로 환원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건 절대 중요하지 않다.


 

[강안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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