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슬픔이 담긴 역사를 공유하는 법 [영화]

글 입력 2020.04.1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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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영화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산다. 자기 나라의 승리의 순간, 관객도 그 승리의 순간에 함께 하게 된다. 영화는 관객이 2020년에 살아간다는 이유로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그 승리의 역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영광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그 역사를 보면서 다시금 우리 역사를 생각한다. 때론 감사를, 때론 슬픔을 공유하면서 그들의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그거 기도할 뿐이다.


그러던 오늘날 점차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실패, 패배, 항복이라고 일컬어지는 순간들을 담는다. 감독을 보면, 자국의 이야기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어째서 왜 그런 이야기를 다루려고 하는 것인가. 감독은 자국의 승리가 아닌 자국의 아픔을 공유한다. 그 아픔의 공유 속에서 관객은 어떤 시각으로 영화를 보는가.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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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샘 맨더스(Sam Mendes) 감독의 ‘1917’이다. 영화 ‘1917’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다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고 있는 이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담는다는 것 자체가 영화적인 흐름에 벗어난 것이 아닌가란 의문을 자아낸다. 그것도 완벽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아니다. 그저 감독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각색한 것뿐이다. 공식적인 기록이 없는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영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대부분이 각색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 영화 속 우리는 수많은 영웅을 만난다.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수많은 이들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인공이 아닐지라도 관객은 알고 있다. 주인공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서 싸웠던 다른 역할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하지만 결국 영화관에 나와서 관객에게 남은 영웅은 그저 주인공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스코필드를 영웅으로 받들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의 모습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한다. 자신이 아프더라도 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스코필드는 그런 우리가 원했던 영웅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 스코필드는 우리가 원하는 영웅은 아니다. 그는 전쟁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을 에린무어 장군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 명령은 본래 스코필드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이자 자신의 상병인 블레이크가 받은 명령을 같이 이행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블레이크가 죽게 되고 온전히 자신이 모든 고난을 가져야 했다. 그는 미션을 수행하기 이전, 아니 미션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블레이크에게 계속해서 이 미션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적군의 비행기가 추락하고, 그 조종사가 살 수 있음에도 스코필드는 그저 그가 죽게 두라고 말하지만, 블레이크는 그 사람을 살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영웅은 블레이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오직 사명로 일하는 모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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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에는 그 사명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임무, 자신의 곁에서 죽어간 친구의 모습, 가족의 살아오라는 메시지만이 그의 원동력일 뿐이었다. 영화의 앞부분에서 군대 훈장을 술과 바꿔 먹었다는 스코필드의 일화가 소개된다.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그런 일화들을 통해서 관객이 접한 스코필드는 그저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자이다. 자신의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은 그것이다. 그것이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뛰는 이유이며, 머리에 피가 흐르지만 참고 달려가는 것, 그뿐이다.


주인공은 앞서 말했지만, 영웅상의 인물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전해야 할 메시지를 전하고, 자신이 건네받은 메시지를 지키고자 살아남은 사람일 뿐이다. 그의 삶엔 타인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사명보다는 순전히 자신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자신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1600명을 살린 그들의 영웅임은 분명하며, 그는 주어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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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17’에서 많이들 불에 타는 교회 시퀀스를 최고의 장면으로 뽑는다. 그 장면이 주는 황홀함, 서글픔, 외로움, 고독함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장면임은 인정한다. 전쟁은 적이 누군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주로 옷을 보고서 서로를 구분했던 이들은 너무나도 밝은 빛 앞에서 서로를 파악하지 못한다. 너무나도 밝은 빛 앞에서는 그저 총구의 방향을 알 수 없는 사람일 뿐이다.


이 부분에서 감독의 전쟁에 대한 생각이 보인다. 전쟁은 서로를 목격해야만 이뤄질 수 있다. 결국 서로를 목격한다는 것은 서로를 일정한 시각에서 바라봄을 표현하게 된다. 그저 환한 불의 사람들처럼 총구의 방향을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던 두 남성에게, 그 총구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결국 모두 각자의 신에게 기도한다. 자신은 그 전쟁 속에서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교회가 불타고 있다. 신에게 기도할 수 없을 때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어지는 한 지하의 공간에서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성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이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전쟁은 총구의 방향 따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밖에서 총을 들고 있는 이들이 모두 가해자이며, 자신과 함께 밑에서 피신한 이들은 피해자에 불과하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외부의 공간은 국가의 이념에 똘똘 뭉쳐진 이들의 싸움이지만 결국 그들 모두 내면을 들어가면 안주머니에 자신의 가족사진을 넣어둔 이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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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영화 ‘1917’에서 교회 시퀀스보다 더 좋아하는 장면은 그 이후 진행되는 낮 시퀀스다. 이미 낮이 된 시점, 전쟁은 이미 진행 중이었을 거라는 좌절감에 빠져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누가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다른 이의 노래를 듣고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을 잡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노래를 듣고 있는 모든 동료의 얼굴을 비춘다. 그리고 다시 주인공, 스코필드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스콜필드가 아니라면 어쩌면 그 노래가 마지막이었을 사람들이었다. 스콜필드의 목적은 그들의 삶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가 살릴 수 있는 이들이다. 그로 인해서 하루의 삶을 더 얻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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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계속해서 평행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를 원테이크와 비슷한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서 ‘원 컨티뉴어스 숏’을 이용해서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된 평행선의 이야기, 혹은 자신을 숨기기 위한 내리막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에서 높은 곳을 올라가면 안 된다. 높은 곳은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용이하지만, 스코필드는 적을 죽이고서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계속해서 평행선과 내려감의 이야기를 찍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영화의 마지막 순간 카메라가 위를 향한다. 주인공도 위를 향한다. 적에게 자신이 가장 잘 보이지만, 그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다. 뒤로는 수많은 병력이 전쟁터로 나간다. 그의 평행선은 자신의 동료를 뚫고서 가야 하는 길이다. 그 뒤로 가로를 향해서 그들의 평행선을 향해서 뛰어가는 이들을 지켜볼 뿐이다.

 



전쟁영화


 

전쟁 영화는 상업적으로 관객들에게 잘 팔리는 티켓에 불과해졌다. 그 영화의 본질은 상실한 채 말이다. 그동안 전쟁을 다룬 영화들은 전쟁에 자신의 소스를 더 했다. 바로 가족이란 소스 말이다. 이는 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조건이며, 어쩔 수 없는 선행 조건이기도 하다. 가족 이야기는 전쟁의 끝 주인공이 살아남았으면 그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빠져나오게 해준다. 하지만 영화의 앵글이 그 뒤에 있는 병사들을 비추지 않았을 뿐, 그들도 그들의 스토리가 있다. 그들에게도 가슴 절절한 사연이 있다.

 

이 영화는 전쟁을 중단하라는 이야기를 다룬다. 처절하게 전쟁 중단 명령을 내린다. 어쩌면 오늘 하루만 쉬고, 내일 다시 전쟁이 진행될지도 모른다. 이런 전쟁 중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주인공만이 살아남는 것이 행복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가로로 뛰어가는 그 병사들이 모두 사는 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이다. 타인을 죽여 승리는 거두는 것이 진정한 승리가 아님을 시사한다.


우리는 너무나 승리의 역사를 갈망한다. 하지만 완전한 승리, 완벽한 승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감독은 이를 관객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전쟁 영화 임에도 불구하고, 이념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국가적 상황을 묘사하지 않는다. 슬픈 역사를 관객에게 공유한다. 승리의 역사를 더 이상 갈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나 그 승리에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다면 우리는 그 승리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해 피 흘림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웃으면서 끝나는 해피엔딩을 알고 있다.

 


[박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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