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를 놓아준 도시 [여행]

이렇게 여유로웠던 파리
글 입력 2020.04.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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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기 위해서 학교를 빼먹었다. 수업만 빠진 게 아니라 시험도 가뿐히 넘겨버렸다. 오직 여행을 위해서! 생전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동행하는 이가 없어서 그런지 첫 일탈에 대한 설렘도, 두근거림도 없었다.


홀로 하는 여행도 해봤고, 많은 여행을 해본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여기저기 다녀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여행은 처음이었다. 오직 한 장소를 방문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여행. 한 장소에 가기 위해 비행기 표를 사고,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대해서만 알아보았다.


그 장소는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유럽 여행에 대한 로망이나 기대치는 없는 편이었지만, 파리는 달랐었다. 파리의 로맨틱함이나 에펠탑 같은 랜드마크 때문도 아니었다. 파리는 언젠가 꼭 가보고 싶던 오르세 미술관이 있는 장소였다. 오직 그 이유가 나를 파리에 방문하게 만들었다.


홀로 세 시간이면 충분히 볼 미술관 때문에 3박 4일의 여행을 택했다. 미술관을 제외한 여행과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렘과 기대는 0에 수렴했다. 그래서일까? 여행의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심지어 큰 틀을 정하지도 않았다. 정말 무계획의 여행. 파리는 언제고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따라가기 버거운 수업에 지쳐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그때의 생활에 지쳐있던 건지 계획을 짜기엔 너무 무력한 상태였다.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척척 들어맞는 일은 역시 없었다. 겨우 한 시간 연착된 비행 편 탓에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도로는 러시아워를 맞닥뜨려 버렸고, 그나마 버스 안에서 짰던 루브르 박물관 방문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수업을 듣고, 전날 밤을 새운 금요일 저녁 도착한 파리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도쿄의 주말 밤보다 길거리에 사람이 많았고, 베트남 도로의 오토바이보다 자동차가 많았다. 여행의 시작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그냥 평소처럼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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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일리커피

 

 

그저 지나가다가 익숙한 브랜드의 카페에서 멈춰 선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점원은 별로 친절하지 않았고 분위기가 좋은 카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은 너무나 향기로웠고 '맛있는'커피였다. 생각보다 추웠던 파리를 마주한 나를 녹여주기라도 한 듯이, 커피 한 잔은 냉소적이었던 나의 태도를 바꿔주었다.

 

처음으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나 홀로 탈출한 여행을 즐길 마음이 그제서야 생겼다. 숙소에 도착해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그들의 계획에 따라 화이트 에펠을 보러 갔고 길을 잃어 몇 시간을 헤매며 걸었다. 그래도 마음엔 조급함이 없었다. 도시에 대한 기대도, 계획도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 기간 동안 매일 늦잠을 잤다. 너무 설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던 오르세를 방문하던 날은 심지어 12시까지 늦잠을 자버렸다. 그래서 더 여유 있게 미술관을 봤는지도 모른다. 점심도 거른 채 미술관을 향해 갔고, 미술관에 들어가서는 배고픔도 잊고 마네의 작품들을 보는 것에 집중했다.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고도 나가기가 아쉬워 같은 장소를 홀로 몇 번씩 배회했다. '미술관 다음에는 무언가를 해야 해', 혹은 '어딘가를 가야 해'라는 마음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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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르세 미술관

 

 

가장 궁극적인 목표였던 오르세 미술관의 감상을 끝내고 나온 뒤, 나는 한결 더 여유로워졌다. 혼자 여행할 때,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듯 자연스레 예약한 3시간가량의 시내투어의 일정을 제외하고는 완전한 자유였다(사실 투어도 취소가 가능했으므로, 완전한 자유나 다름없었다). 일단은 배가 고파서 빵을 먹기로 했다.


친구가 추천해 준 대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그리고 센 강을 따라 거닐었다. 기대는 없었지만, 일상의 탈출이 되어준 파리로의 여행. 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쌀쌀한 11월의 말의 공기는 겨울인듯했지만 춥지는 않았다. 센 강은 아주 아름답지도 않았고, 한강만큼 크지도 않았다.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낯선 도시에서 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던 걸까? 센 강 변에 떨어져 있던 낙엽들은 을씨년스럽기는커녕 길거리를 더욱 조화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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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센 강을 따라 걷던 길거리

 

 

전혀 나를 아는 사람이 없고, 나도 아는 사람이 없고, 처음 와보는 장소였지만 왠지 익숙했다. 내가 '여행'을 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은 기분이었다. 파리는 아주 특별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일상에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을 주는 여유 그 자체였다.


홀로 하는 여행을 '나를 찾는 여행'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도 이전에 했던 기운 넘치는 여행에서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의욕적이고 씩씩한 상태로 여행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일상 속 많은 날들에 지쳐있고 권태로움을 느낄 때, 그런 일상에서 탈출해 잠시 동안 나를 놓아줄 수 있는 여행도 때로는 필요했다.

 

신나는 노래만이 나를 기운 나게 하는 것이 아니듯, 은은한 커피향으로 시작된 이 여행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나에게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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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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