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확행, 생활인 하루키의 지극히 사적인 일상 [도서]

글 입력 2020.04.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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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쯤 신조어 하나가 한국을 휩쓸었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의미하는 줄임말 ‘소확행’. 이제는 표준어만큼이나 익숙한 지위로 사람들의 단어장에 자리 잡은 이 단어가 어디서 등장한 것인지는 알고 있는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사실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고 꽤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개념 내지는 행위가 명확히 저 어구로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다. 1986년에 출간된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이것이 바로 하루키가 든 ‘소확행’의 구체적인 예시이다. 그 사소함과 사적임을 바탕으로 볼 때, 소확행의 사례는 얼마든지 변화무쌍하게 변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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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행복은 많다. 행복감, 충족감, 만족감의 정도로만 따져본다면 음식이나 직물 따위에서 발현되는 것보다 그 크기가 훨씬 큰 행복의 근원지는 따로 있다. 이를 테면, 내 집 마련, 드림카 소유하기, 등단하기, 대기업 취직하기 등등. 그러나 이 행복들에 도달하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테고, 또 그 행복들은 분열과 자괴감을 반복하는 고군분투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겨우 ‘쟁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서 정량적으로 그에 대한 보상이 성과로 돌아오리란 보장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룰이다. 모쪼록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거대하고도 아득한 행복, ‘거아행’ 정도가 되겠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행복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며 살아간 다. 소위 ‘대박’으로 치하될 수 있는 ‘거아행’을 연달아 성취해낸다면 쉽게 행복에 안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는 ‘거아행’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히려 상처 입고 행복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대조적으로 비교적 현실적인 사물이나 습관들을 달리 바라보기만 해도 얻을 수 있는, 작지만 사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 유행을 끈 이유는 아마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을까 싶다.

 

번아웃 되지 않고 생활을 정상적으로 지탱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행복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 기본적인 하한선을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입는 옷, 먹는 음식 등을 통해 확보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확행’이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꽃>의 문장처럼 위 같은 행위들이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지금, 우리는 대상을 명백히 인식하며 좀 더 쉽게 행복도를 충전할 수 있지 않을까.  ‘소확행’을 처음 거론한 하루키의 여러 에세이집을 탐독하는 것은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못지 않게 한 번 읽어볼 만한 여러 개의 잡문집들이 있다.


 

중간 중간 세탁기를 돌리기도 하고, 전화를 받기도 하고, 다른 책을 읽다가 돌아와도 좋다. 수필가 하루키는 관대하니까. 책을 읽는 동안 파안대소할 일은 거의 없다. 대신 잔잔하게, 자주 웃는다. 어제와 엇비슷해 보이는 하루지만, 책을 덮고 나면 기차 식당칸에서의 식사처럼 우리는 ‘어디론가 확실하게 옮겨져’ 있다. - 정이현 (소설가)


유독 그에 대해서는 ‘스물 몇 살 이후로는 읽지 않았는데’ 하며 말문을 여는 분들이 많은 것 같지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를 싫어하는 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무라카미가 썼다 해도 공장 방문기 같은 것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보기 좋게 당한 느낌이다. 깜짝 놀랄 만큼 재미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 신형철 (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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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발간된 5권의 에세이집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세트’에는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와 『랑게르한스섬의 오후』를 함께 수록한 단행본, 각각 다른 시기에 <일간 아르바이트 뉴스>, <주간 아사히>, 잡지 <하이패션>에 연재한 에세이들을 모은 작품집들이 있다. 비채에서 발행된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무라카미 라디오 특별 세트』역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에세이집일 것이다. 이 중에 어느 것을 뽑아 읽어도 하루키가 일상을 바라보는 유쾌하고 각별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지 있는데,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포인트를 짚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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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자이 미즈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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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Anzai Mizumaru


 

하루키의 에세이집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자 주요 소재가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이다. 미즈마루와의 만남이 마치 “운명 같았다”고 하루키가 회고하는 것처럼 실제로 둘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부터 관심 분야, 인생의 가치관, 주량까지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만큼 미즈마루의 그림은 하루키의 일상을 가장 ‘미즈마루다운’ 동시에 ‘하루키답게’ 표현해낼 수 있었다.


 

“미즈마루 씨는 내 속에 잠재한 ‘세상에 도움은 전혀 안 되지만 이따금 저쪽에서 멋대로 불어오는, 그다지 지적이라고는 하기 어려운 종류의 별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컬러풀하게 이해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입니다. 나한테는 소울브라더 같은 사람입니다.”

 

- 안자이 미즈마루,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中 하루키의 말



미즈마루의 저서인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의 제목은 그가 지향하는 일러스트를 적확하게 나타내는 문구이다. 그러나 이때의 ‘대충’은 성의 없음을 뜻하는 게 아니라 ‘힘을 뺀 채’, ‘정답은 없이’에 더 가까운 의미이다. 나도 따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이 간단하고, 무심하며, 어딘가는 성겨 보이는 선들. 대상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하지도 않았고 심오한 감정을 응축하지 않은 그림들은 작은 것에서 확실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소박하고 단단한 하루키의 생활과 닮아 있다.


그리 거창하지도 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글을 읽고 삽화를 보며 감각을 느끼는 이들로 하여금 비교 불가한, 고유의 풍족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런 둥근 만족감이 가득히 발현되는 상태에서는 구태여 거창한 것, 위대한 것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에세이집 각 꼭지의 첫 문장을 떼기 전에 미즈마루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길 권한다. 글을 쓰는 하루키와 대화하듯 유쾌한 상상력을 펜으로 담아낸 그의 그림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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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Anzai Mizumaru


 

 

#2.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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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zai Mizumaru


 

평소 음식을 다룬 콘텐츠들을 특히 좋아한다. 재료가 지닌 날 것의 질감, 조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보글보글’, ‘조물조물’ 규칙적인 소리, 완성된 음식의 먹음직스러운 양감과 윤기를 복합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영상이 가장 최적의 형태라고 생각해왔지만 하루키의 잡문집에 담긴 음식 묘사는 매체의 형태를 뛰어넘을 만큼 생생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군침이 돌게 한다. 하루키의 음식을 주제로 여러 레시피 책들이 출간된 것은 공감을 사는 그의 먹거리 묘사 능력에 대한 방증이 아닐까 싶다. 물론 노벨상 후보로 자주 거론되는 대소설가인 그의 문장력 역시 이에 한 몫하겠지만 무엇보다는 매 끼니의 식사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먹는 행위에 대한 짙은 애정 때문이다.

 

 

“막 튀겨낸 도넛은 색깔이며 향기며 바삭한 느낌이며 뭔지 모르게 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선의로 가득 차 있다.” - 『무라카미 라디오』中

 

* 참고로 하루키가 추천하는 브랜드는 ‘던킨’이다.


“신주쿠의 술집에 굉장히 맛있는 두부를 내놓는 집이 있는데, 나는 그곳에 처음 갔을 때 너무나 맛이 좋아서 두부를 한꺼번에 네 모나 먹고 말았다. 간장이나 양념 같은 것은 일체 치지 않고 그냥 새하얀, 매끈매끈한 걸 꿀꺽 하고 먹어치우는 것이다. 정말로 맛있는 두부는 쓸데없는 양념 같은 것은 칠 필요가 전혀 없다. 영어로 말하면 ‘Simple as it must be’라고나 할까?” - 『작지만 확실한 행복』 中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부엌에서 물을 끓여 커피를 만든다. 이윽고 아내가 일어나서 프라이팬을 달구어 팬케이크를 굽는다. 오늘이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므로 냉장고 안에 남아 있는 것을 하나하나 요령 있게 처분해야 한다. (...) 토마토 먹을래요?하고 아내가 묻는다. 토마토가 잔뜩 남아 있어 나는 먹겠다고 말한다. 토마토를 잘라서 소금과 레몬즙을 끼얹고 향초를 잘게 썰어 그 위에 뿌린다. 커피와 팬케이크와 토마토 샐러드. (...) 냉장고에 아직도 뭐가 남아 있어? 하고 나는 묻는다. 스파게티하고 토마토 캔, 마늘, 올리브 기름, 달걀, 포도주 반 병, 참치 통조림 그리고 쌀이 조금 있어. 그러면 점심은 생각할 것도 없이 참치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가 된다. 결국 철수전이란 그런 것이다. 괜찮다.” - 『먼 북소리』 中

 


그 밖에도 여유 시간이 생기면 종종 교외로 차를 끌고 나가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거나 혹은 그리스 스페체스 섬에서 장작불에 구운 정어리, 간장과 파를 넣어 구운 스테이크, 로마 재래시장에서 장을 본 후 식탁에서 선 채 먹는 연어와 찬밥 등 여행지에서의 이국적인 음식들로 채워진 에피소드들은 여러 권의 에세이집에서 등장하는 단골 에피소드다.

 

음식에 대한 장면들을 유심히 보길 권하는 것은 단순히 음식이 좋아서, 그가 무척 글을 잘 쓰기 때문은 아니다. 하루키의 책에서 등장한 요리들에 관하여 엮은 에세이 『하루키 레시피』(차유진 저, 문학동네, 2014년)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요리를 은유의 도구로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주인공들이 겪는 사건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바로 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요리라는 일상을 통해 더욱 또렷하게 보여준다. (...) 나는 하루키가 만들어놓은 환상의 세계, 문지방, 우물 들과 우리가 그렇게 괴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먹는 데 너무나 집중하는 주인공들 때문에 그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국에 밥 말아서 꼭꼭 씹는 사이에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차유진, 『하루키 레시피』 中


 

우리는 하루에 적게는 한 번, 많게는 네 번씩 식사를 한다. 하지만 3첩이라도 갖춘 제대로 된 집밥 한 상을 제 손으로 준비하는 일은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참 지난하다. 반찬 하나하나는 지나친 정성과 세심한 손길을 요구하며, 정기적으로 장을 볼 수 있는 힘과 체력까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러 의무에 치이다 보면 자연스레 간편식, 인스턴트로 내 입 하나를 때우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컵라면, 컵반, 편의점 도시락에 우리의 혀와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식생활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지대한 즐거움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을 책임지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지친 하루를 보낸 당신이 하루키의 문장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국에 말은 밥을, 두꺼운 샌드위치를 꼭꼭 씹어 먹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확실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외에도 고양이에 관한 에피소드 역시 눈에 띈다. 오랜 시간 동안 고양이를 키워왔으며 운영했던 재즈 바의 이름을 기르다 잃어버린 고양이의 이름 ‘피터캣’ 에서 따왔고,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고양이에 관한 동화책 「후와후와」를 출간한 이력이 있으며, 소설 『해변의 카프카』에서 말하는 고양이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짙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처럼, 고양이를 소재로 한 에세이에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사랑스런 시선이 담겨 있다.

 

달리기 역시 꾸준히 등장하는 주목할 만한 소재이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키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 (나에게 있어서는 글쓰기) 메타포이기도 하다”라고 밝힌 것처럼 달리기에 대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는, 언뜻 유명 작가의 지위에 올라 여유롭게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는 듯 보여지는 하루키의 삶 속에서 작가로서의 긴장과 성실성과 같은 직업 의식을 엿볼 수 있다.

 

*


유행어가 1020 세대를 넘어 다른 세대로 확장되는 동안 ‘소확행’은 인테리어 소품이나 작은 악세 서리, 비싸지 않은 취미 용품들을 광고하는 카피와 홍보 문구들에 상업적으로 이용되었다. 단어가 닳아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발되었지만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에서든 제법 잘 어울리며 소비 심리를 자극했다. 뻔한 단어가 되어버렸음에도 아직까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건 그만큼 현대인들에게 행복을 보장해줄 존재가 간절하게 필요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확행’은 너무나 행복해지고 싶지만 너무나 행복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들에게 일종의 동아줄이 되어 행복을 저버릴 때마다 마음을 다잡게 해준다.

 

앞서 이 글이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소확행을 알아보고자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지금까지 하루키의 에세이집을 통해 그가 ‘소확행’을 추구하는 방식과 사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시는 예시에 불과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의도치 않게 행복과 자꾸만 멀어지는 그대이 하루키의 에세이를 통해 ‘소확행’을 마음 속에 품은 채, 기회가 된다면 ‘소확행’을 실현해볼 용기를 냈으면 할 뿐이다. 하루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든, 참고하여 변주하든, 아예 독창적으로 맞춤형 소확행을 고안해내든 내가 행복하다면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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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이미지로 사용된 그림은 ⓒAnzai Mizumaru 입니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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