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름을 잃은 사람들 [사람]

이름을 지키지 못하면 기억을 잃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글 입력 2020.04.08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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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산업을 디즈니라는 거대 자본이 지배하기 전, 2000년대 초반까지 '애니메이션 영화'하면 단연 '스튜디오 지브리'였다. 그중에서 지브리 역사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영화의 줄거리가 제목에 담겨있다. 센과 치히로가 사라진 이야기.


주인공 치히로는 이사하던 중 길을 잘못 들어 정체 모를 터널 앞에 도착한다. 치히로는 계속 불안한 듯 빨리 돌아가자고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터널 끝, 처음 보는 마을에 들어선다. 사람 하나 없는데 음식은 잔뜩 널린 이상한 마을. 엄마와 아빠는 음식을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치히로는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황급히 돌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돼지로 변했고, 건너온 길은 물에 잠겨 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마을이 정령들로 가득 찬다. 치히로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계약을 맺는다.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불리는 계약. 그렇게 치히로가 얻은 호칭 같은 이름이 '센'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센'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 마침내 자신의 진짜 이름을 지키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영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 이름, 세계, 기억. 이름을 지키지 못하면 기억을 잃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명찰.jpg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이 생긴다. 이름은 모든 관계의 출발점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름을 말하고, 상대의 이름을 묻고, 서로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의 일부처럼 보이는 것을 잃은, '센' 같은 사람들이 있다. 힌트를 하나 던져볼까. 이 글을 읽을 당신도 아는 사람이고, 나도 아는 사람이고, 우리가 모두 아는 사람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이 존재를 안다. '엄마'.


당신이 세상에 탄생하고, 당신의 '엄마'는 이름을 잃었다. 당신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탓할 이유도 없고. 다만 당신의 '엄마'가 그의 이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떨까. 이 마음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아니라 '김애자 씨'를 모시고.

 

(말투를 최대한 그대로 옮겨 와, 인터뷰에서 일부 비문은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내 이름이 싫어도



사랑 애 愛. 아들 자 子. 딸에게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른다니. 남존여비를 대놓고 드러내던 때답다. 애자 씨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한다. 그래서 물었다. '엄마'라는 호칭 대신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냐고. 나는 애자 씨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렸다. 해바라기, 화분, 빨간색. 그런데 답이 의외였다.


애자 씨: 그래도 이름 쓰는 게 나을 거 같아.

나: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 왜?

애자 씨: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은 것 같아. '엄마'가 살아있는 것 같잖아.

나: 그럼 나 글 올릴 때도 이름 써도 돼?

애자 씨: 그래.


인터뷰는 애자 씨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자세로 진행됐다. 기다란 쿠션을 등 뒤에 받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시선은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 고정하며. 그래도 애자 씨는 이야기할 때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애자 씨: 화장품 가게에 적립시키려고 보는데 똑같은 이름이 되게 많은 거야. 또 어디를 가는데, 동일 이름이 많은 거야. 아, 난 내 이름 별로 없는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애자 씨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약간 빨라졌다. 들뜨면서도 긴장했다는 신호였다. 하긴 인터뷰해도 되겠냐고 물었으니 '엄마' 인터뷰인 줄 알았을 거다. 자신의 이름이 누구 엄마, 누구 아내로 바뀐 지 20년은 더 되었으니까.


 

 

나는 애자 씨를 닮은 듯해


 

나: 그럼 그때 뭐가 제일 재밌었어?

애자 씨: 뭐?

나: 그냥 학교 다닐 때. 재밌었다며, 애들이랑.

애자 씨: 다 재밌었는데? 그때도 노는 걸 좋아했나 봐.

나: 그래…. 그런 것 같아.


애자 씨는 웃음으로 한 텀 쉬더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애자 씨: 막 고무줄놀이 하고 그러면 '엄마' 제일 잘해서 깍두기였어.

나: 아, 너무 잘해서 깍두기야?

애자 씨: 어. 이쪽에도 해주고, 저쪽에도 해주는 거. 공기놀이도 잘하고.

나: 공놀이는 안 했어?

애자 씨: 공놀이도 했지. 야구 같은 거 하다가 남자애가,
나보다 한 살 어린 애가 나한테 까불어서 배 위에 올라가지고 팼어. 조팼어.


아, 애자 씨는 강원도 출신이다. 조패다는 '조지다'의 방언.


나: 조팼다고?

애자 씨: 그래서 걔, 나만 보면 막 피해 다니고 그랬어.

나: 웃기다. '엄마'도 성깔이 있네.

애자 씨: 멱살 화-악 잡았어, 그때. 뒤흔들어버렸어.

나: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애자 씨: 울었어, 걔가. 울면 진 거야.

나: 울어서 끝났어?

애자 씨: 어.

나: 근데 걔 엄마나 아빠가 뭐라 하지 않았어?

애자 씨: 걔 쪽팔려가지고 얘기했겠니?

나: 아,


이때 애자 씨의 벨 소리(이선희의 만남)가 울리고, 인터뷰가 10분가량 중단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흐름이 끊겨서 딱히 질문을 못 던지던 때, 애자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애자 씨: 질문할 거 적어와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사실 질문 정해놓은 거 없고, 큰 틀만 있어. 사실 '엄마'라는 이름이 생긴 후로, 이름도 아니고 호칭인데 이름처럼 됐잖아. 이번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여태 누구의 '엄마'로 살았으니까 이젠 김애자 씨의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한 거였어. 그래서 그냥 어떤 방식으로든 애자 씨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 아니야. 뭐든.

애자 씨: 기억도 없어.

나: 왜 없어? 

애자 씨: 아가씨 때 뭘 해서 기분이 좋았는지 어쨌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뒤이어 애자 씨는 열심히 놀지 못했던 20대가 후회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내 기억은 조금 달랐다. 애자 씨는 어렸을 때도 놀러 나가서 혼났다고 했는데.

 

애자 씨: 초등학교 때도 친구들끼리 소풍, 아니 그러니까 나들이를 하러 간 거지. 시골은 그냥 널린 게 유원지잖아. 지네들끼리 밥해 먹는다고 쌀 가지고 김치 가지고 가서 밥해 먹은 거야. 우리가, 냇가 같은 데 가서. 그렇게 몰래 간 적이 많아. 가지 말라고, '엄마'가, 아니 '할머니'가 동생 봐주라고 얘기했단 말야. 내버려 두고 도망가서 놀러 갔다 오고 그랬어.

나: 그럼 '할머니'는 뭐라고 해?

애자 씨: 저 사랑스러운 아이(어휘 순화)가 또 놀러 갔다는 둥. 그래가지고 '엄마'가 뭐라고 말대꾸를 했나 봐. 그래서 거기 초등학교 있잖아. 거기로 도망갔는데 '할머니'가 얼마나 성질이 났는지 나를 끝까지 쫓아오더라. 나 달리기 잘했거든.

나: 어, 그래?

애자 씨: '할머니'도 끝까지 쫓아 오더라. 바가지 들고. 그거 가지고 '엄마' 머리를 쳤어. 그래가지고 바가지가 반으로 쪽! 반으로 쪼개졌어. 그거 보고 둘이 막 웃었어.

나: 예능 같네.

 

이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을 깔깔거리던 애자 씨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대 때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지금도 연락한다며. 그들만의 모임 이름도 있다. 말이 많아서 '마', 그리고 허전해서 '야'를 붙인 '마야'. 일도, 노는 것도 함께하던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하며 흩어지자, 애자 씨는 공허함을 느꼈다. 혼자 시간 보내기 어려워하는 애자 씨는 덜컥 친구들과 같은 길을 걸었다. 그 선택으로 애자 씨는 '엄마'라는 가짜 이름을 얻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나: 노는 거 말고 또 뭐 좋아해? 아니면, 하고 싶었던 거나 지금 하고 싶은 거나.

애자 씨: 지금 방통대를 가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없어. 일을 안 하면 안 되고. 간호 조무사도 하나 따고 싶은데 시간이 안 되고.

나: 방통대 다니면 뭐 배우고 싶은데?

애자 씨: 사회복지사? 앞으로는 노인들이 더 오래 살잖아. 그 생각에 하고 싶고. 방통대 다녀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재밌을 것 같아.

나: 간호조무사도 같은 맥락 아니야?

애자 씨: 맞아. 그래서 해보려 그러는 거지.

나: 그럼 그거 말고, 유망 직종이어서 말고 그냥...

애자 씨: 배우고 싶은 거? 드럼!

나: 드럼 왜? 뭐가 재밌을 것 같아?

애자 씨: 드럼 스트레스 풀릴 것 같아. 막--- 두들기면. 그냥 신날 거 같애.

나: 노는 거 좋아하니까 잘 맞겠다. 음악이니까.

애자 씨: 그래서 요즘 노래 찾아 듣잖아. 그리고 사람이랑 어울리기 좋아하는 것 같아.

 

사람도, 음악도 좋아하는 애자 씨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나: 항상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거야?

애자 씨: 어.

나: 왜?

애자 씨: 그냥 뭐, '쟤는 잘 살고 있네.' 그런 느낌을 받고 싶은 거지.

나: 그러면 뭐가 좋아?

애자 씨: 좋은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된대잖아. 좋게좋게.


좋은 사람, 정확히는 좋은 삶을 바라는 애자 씨.

타자 연습도, 영어 공부도, 여행도 하고 싶은 애자 씨.

 

인터뷰를 하던 날, 애자 씨에게 영어 번역 어플 하나를 깔아주었다. 한국어로 단어를 치면 영어로 번역되어 발음도 들을 수 있게. 주변 사물 중에 하나를 한국어로 적어보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애자 씨가 고른 단어는 냉장고. 냉장고가 왜이렇게 기냐면서도 여러 번 누르고 따라하던 애자 씨. 애자 씨는 잘 까먹는다. 분명 내일이면 어플 설치한 것마저 잊을 수도 있다. 뇌는 쓰지 않으면 멈춘다. 스스로 연료를 넣어도 멈춰버린 뇌를 움직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애자 씨가 당장 일을 관둘 수 있을 만큼 풍족한 돈을 벌기란 지금의 나에겐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이 있다. 애자 씨가 매일 연료 넣는 것을 잊지 않게 알려주기. 그리고 '엄마' 대신 그를 살아 있는 이름으로 부르기. 애자 씨를 비롯하여 이름을 빼앗긴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한 번이라도 봤을 김춘수 시인의 <꽃> 첫 단락. 다음 단락은 이렇게 바꾸고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여기,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그의 이 열의와 환희에 알맞은

누가 그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도 나도

지지 않을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나로서 너는 너로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시 제목도 살짝 바꾸어보련다. 지지 않을 '불꽃'으로.

 

 

 

박윤혜.jpg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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