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카메라 조명에 드리워진 그림자, 그 속의 아역배우는 [사람]

글 입력 2020.03.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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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를 볼 때마다 유독 시선을 끄는 연기자들이 있다.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함, 당돌함, 귀여움 등을 연기로 승화시키는 촬영장의 독보적인 존재, 아역 배우들이다.


아역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사실 대중의 관심을 끌 법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인 배우들의 스캔들, 개인사 등등 클릭하고 싶은 수많은 자극적인 기사들 가운데서 아역 배우들의 입지는 찾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아역 배우들의 귀여운 용모와 어리숙한 말투가 대중의 울적한 기분을 달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여론이 조명하지 않는 곳에서 아역 배우 시절을 거쳐 성인 배우로 자리매김한 몇몇 배우들과 현장에서 아역의 실상을 또렷이 지켜본 이들은 꾸준히 그들이 어떠한 존재로 여겨지는지 고백해왔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 관찰의 부재로 인해 목격자로서의 발언은 고발이 되지 못했다. 그저 사회를 구성하는 무수한 사실 중 하나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카메라 조명이 꺼진 뒤 아역배우들은...


 

 

서신애는 성인 배우들도 꺼린다는 빗속 장면 촬영을 감행했다. 빗속 장면은 살수차를 동원해 물을 뿌려야 하기 때문에 성인 배우들도 곤욕스러워하는 촬영이다. 서신애는 우박만 한 물줄기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연기를 해내 박광수 감독의 찬사를 받았다. - 영화 <눈부신 날에>


이 장면은 충청남도 태안 구례포에서 6월 초 촬영된 것으로 바닷물에 수영하기는 이른 날씨여서 아역배우들은 7시간이 넘는 장시간 동안 추위와의 싸움을 병행해야만 했다고. 이에 극 중 ‘백동수 역’에 여진구는 “촬영 도중 바닷물을 먹었는데, 너무 짜서 촬영이 끝나고도 혀에 감각이 없었다”고 말했고 ‘여운 역’에 박건태는 “생각보다 바닷물이 너무 차서 추위와의 싸움이 힘겨웠다”며 당시 힘들었던 상황을 밝혔다. 또한 물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촬영했던 ‘양초립 역’의 신동우는 촬영 도중 저체온증으로 인해 탈진 상태에 이르러 휴식이 주어졌지만 이내 촬영에 다시 임해 주어진 촬영분을 마치는 연기투혼을 발휘해 시선을 끌었다. - SBS 드라마 <무사 백동수>


백혈병 환자 역이라 머리를 밀어야 했는데, 추운 날 야외에서 면도기로 머리를 밀었다고. 머리에서 피가 흘러 울었지만 빨리 찍어야 해서 그냥 닦아내고 바로 찍었단다. - 배우 유승호의 회상


 

위 사례들은 아역 배우들이 현장에서 필요했던 순간만큼이나 무수한 사례 중에 꼽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 가지 사례를 읽어보기만 해도 아역 배우들이 얼마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근로자로 고용할 수 있는 최저 연령(15세 미만인 자)을 규정하고 있으며 특수한 경우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급한 취직인허증을 소지할 경우 고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이때의 취직인허증은 본인의 신청에 따라 ‘의무교육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만 직종을 지정하여 발행이 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15세 이상 18세 미만인 자의 근로시간은 1일 7시간, 1주에 35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1일 1시간, 1주에 5시간을 한도로 연장할 수 있기는 하다) 이 같은 법 조항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되는 분명한 사실은 아동 청소년이 정신적인 측면, 신체적인 측면 모두에서 국가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어린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제목에서도 강조했듯 아역 배우는 한시적으로 소비되는 보조 출연자의 개념이 아니라 엄연히 전문 배우임을 이 글은 전제하고 있다. 응당 프로 배우라면 본인에게 주어진 연기의 난이도가 어떻든 내색 없이 소화해내 관객들에게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아역 배우 역시 성인 배우와 동등한 수준에서 고된 촬영을 감내해야 한다고 자칫 오해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인정과 존중은 위 사례들과 같이 비인간적이고 혹독한 근로 환경을 견뎌냈을 때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위 조항들이 무색할 정도로 아역 배우들은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수면권, 휴식권 등 아주 본능적인 욕구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의무 교육을 제대로 받고, 초과 근무에 시달리지 않을 거란 기대는 불가하다. 2010년 한국청소년연구원이 발표한 「청소년 연예인 근로권·학습권 실태 분석」에 따르면 아동 연예인 39명 중 35.9%가 하루에 7시간 이상 일했다고 밝혔으며, 41%는 밤이나 주말에도 일했다고 답했다. 이뿐만 아니라 학교에 다닌 아동 연예인 8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47.6%의 아동 연예인이 일주일에 반절 이상 수업에 빠진 적이 있다고 답했으며 각각 34.1%, 19.5%의 아동 연예인이 숙제할 시간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밝혔다. 이 통계 수치를 더욱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응답 연예인 중 65.9%가 학교 수업 참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4년 7월, 청소년 연예인 보호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시행되었다. 15세 미만 대중문화예술인은 밤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야간 및 새벽 시간대에 원칙적으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주당 활동 시간 역시 총 35시간 이내에만 가능했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드라마와 영화 역시 냉정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거대한 자본이 투입된 상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투자액만큼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방영 일정까지 차질 없이 작품이 완성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현장에서 일하는 감독, 연출, 배우 모두 밤낮 가릴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열악하고 집약적인 노동 환경에 익숙해 있던 성인들은 이 법의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100% 가이드라인을 지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결국 불명확한 용역의 범주와 시간 계산 관련 가이드라인의 부재, 벌칙 조항이 없다는 법의 허점과 결합되어 또다시 아동 청소년 연예인의 노동 환경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2019년 3월 문화체육관광부의 주도로 마련된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표준 부속합의서’ 역시 반드시 표준계약서대로 -즉, 대중문화예술인의 기본권 보장을 엄수하는 계약서대로- 이행해야 한다는 강제 사항은 없기 때문에 실효성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자신이 아역 배우 시절 받았던 대우를 회상의 형식으로 고백하는 것 역시 성공적인 성인 연기자가 되었을 때야 공개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성인 배우로의 변모를 시도한 수많은 아역 배우 중에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는 손에 꼽는다. 그 이면에서 학창 시절과 의무교육이라는 극단적인 기회비용을 치른 채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가야 했던 수많은 아역 배우들은 지금 어떤 말을 가장 하고 싶을까. 과연 그들이 상실했던 경험과 시간은 언론이 붙이는 ‘연기력 투혼’이라는 수식어, 감독의 칭찬, 대중들의 귀여움 등에 견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집>에서 뿐만이 아닌, 우리 사회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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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발표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의 촬영 수칙이 공개되어 잔잔히 화제를 몰고 왔다. <우리집>은 부모님이 이혼할까 봐 늘 걱정하는 초등학생 하나가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게 싫기만 한 유미, 유진 자매를 어느 여름날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와 마음을 나누는 영화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의 세 명의 주연은 모두 아역 배우들이다. 2016년 6월에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전작 <우리들>의 주연 4명 역시 아동 청소년이었다. 윤가은 감독이 <우리들> 촬영 당시 아역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느끼고 부족했던 부분을 바탕으로, 또 미안했던 감정을 담아 제작사 ‘아토(ATO)'와 함께 <우리집> 촬영 수칙을 만들었다. 이 글이 말하고 싶었던 모든 내용을 담고 있으니 꼼꼼히 읽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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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첫 번째 본론에서 미처 논의를 전개시키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아역 배우들이 외모에서부터 연기력 혹은 자신이 맡은 배역의 비중에 따라 수많은 가치 평가를 당할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거나 혹은 그런 경험을 가진 이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년 시절 절대자와 같이 느껴지던 어른의 ‘예쁘다’, ‘잘하네’, ‘왜 이렇게 못하니?’, ‘너 참 귀엽다’ 등등의, 그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툭 던져버린 말들이 우리 가슴에 얼마나 짙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 윤가은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목적 지향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연기 현장 속에서 오가는 말들을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실제로 촬영하면서 아이들에게 많은 부분을 느꼈다. 아이들에게 기운 주고 싶은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예쁘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기준에 의한 예쁨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예쁘다고 생각해 말했던 상황이었다. 우리는 아이들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인데 그런 말도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 생각보다 다양한 고민을 한다고 하더라. 가뜩이나 어렸을 때부터 배우라는 꿈을 키운 아이들인데 의도하지 않아도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갈수록 깨달았다."

 

"아역 배우들에게 하는 말이 가장 어려웠다. 가치 평가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현장이다 보니 우리의 목표는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고 배우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정말 모든 것이 지켜질 수 있는 현장도 아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촬영을 강행해야 할 때 더위도 좀 더 참아야 하고. 좀 더 쉬고 싶은데 한 번만 더 가자고 할 때도 있었다. 그 상황이 아역 배우들에게 너무 힘들 거란 걸 알고 있는데, 아역 배우들이 참고 있는 게 보인다. 그때가 정말 미안해서 미쳐버리는 순간이다."

 

- 조지영 기자, "윤가은 감독, "'우리집' 아역배우 위한 촬영 수칙, 사실 100% 못 지켜 부끄럽다"", 스포츠 조선, 2019

 


이 글을 준비하던 중 발견한 <우리집>의 촬영 수칙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잦아든 뒤에 묘한 씁쓸함이 찾아왔다. 윤 감독의 촬영수칙을 다룬 기사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을 향한 섬세한 배려’가 돋보였다고 호평했다. 기본권을 보장하는 일이, 미성숙한 아이들을 그 자체로 바라보며 하나의 개체로 존중해주는 일들이 왜 ‘배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려야 하는 것인지. 그것은 어린 나이에 이미 직업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아역 배우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그들의마땅한 권리이다.

 

*

 

아역 배우들이 보호받는 촬영 현장들은 윤가은 감독과 제작사 아토, 즉 오래 고민을 거듭한 주체들의 주도로 형성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집>에서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연기 현장에서 아역 배우들이 기본권을 보장받고, 전문 배우로서 존중받기 위해서는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해결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어른들일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강제할 수 있는 정당한 권력을 가진 국가가 아닐까.

 

지금껏 아역 배우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법안이 수차례 발의되었고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번번이 좌초되어왔다. 지금 이 글에서는 너무 쉽게 해결책을 촉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역 배우들이 ‘어린이’ 답게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언젠가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거란 사실을 나는 안다.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구원은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 그런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반성한다면, 조금 양보한다면, 행동하길 노력한다면 반드시 그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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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대표 이미지로 사용된 방송 화면의 출처는 MBC <해피타임> NG 스페셜입니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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