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키스 하면 안되는 너와 나의 거리

모든 관계에 해당되는 '적당한' 거리
글 입력 2020.03.0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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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다. 할 수 있는 것이 갑자기 많아졌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그런 스무살들이 강의실에 즐비해 있었다. 교수님이 첫 강의를 들어오셨다. “거리를 두어야 좋아지는 관계도 있어요.” 순간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각자의 관계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와서 박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트레스 밖에 주지 않는다. 가끔 한 번씩 정신 차렸다고 느껴지거나 불쌍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지금까지 왔다. 나 말고는 누가 친하게 대해주겠나 싶다.

가만히 있는 나에게 와서 박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종 벗어나는 상상을 한다. 상상일 뿐이다. 이렇게 살아왔다.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 사람을 끊어내라는 소리를 듣는다. 말처럼 쉽지 않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싸움을 시작하는 것만 같다. 무섭다. 가만히 지금처럼 지내면 싸우지는 않을 거다. 오늘도 참는다. 넘어간다. 이제 그런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끊어버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에 윽박질렀다. 이제는 거리를 두는 게 어떻냐고 입을 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도 그렇지 않으며, 모든 이야기를 말한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언어라는 수단으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요동친다.

‘미운 정’이라는 단어가 현대국어에까지 살아남은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반면에 내가 오롯이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같이 지내온 시간이 연속적인 것처럼, 어느 한 순간을 분절해낼 수 없는 것처럼,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를 분절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서는 이 관계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거리’, 나와 이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는 몇 m일까, 몇 cm일까, 몇 야드일까?

나는 세세한 레이어를 가지고 있다. 심리적 거리라고 칭해지는 ‘층’이다. 내 삶을 보는 누군가, 나를 중심으로 1층, 2층, 3층으로 나눈다면, 1층은 속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친한 사람, 2층은 친한 사람, 3층은 보통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분할 때는 101호에 사는 사람, 102호에 사는 사람, - , 108호에 사는 사람까지 전부 다른 거다. 모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구분되어 있다는 거다. 101호에는 더 많은 말들을 할 수 있기도 하고.

피곤해 보이더라도, 내가 나로 존재하는 나의 방법이다.

버스를 타면 하차하는 문 바로 두 칸 뒤,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좋아한다. 북적북적한 버스에서 안쪽 깊이 앉아 있는 나는, 내 목적지에서 사람들에게 연신 “잠시만요, 잠시만요!”를 외쳐야 한다. 간혹 지하철역과 연결된 정류장에서 내리게 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교통카드를 꺼내면서 일어난다. 하차 버튼에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와 있다. 앞사람을 따라 내리기만 하면 된다. 한산해진 버스가 내 등 뒤를 지나간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을 시기도, 좋지 않을 시기도 있다. 나의 시기도,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어떤 시기에 위치한 나는 유난히 공격적일 수도 있다. 나에게 오래된 사람일지라도, 지금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시기가 아닐 수도 있다. 상황이든, 성격이든, 그 어떤 이유를 부착하든 간에.

매일 하는 스킨십에 무뎌 질 수도 있고, 실증이 날 수도 있다. 그럴 땐, 잠시 간격을 두는 것이 어떤 지. “시간을 갖자.”라는 말.

또는,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스킨십은 어디까지인지. 왜,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불쾌한 사람이라면 연인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그런 이야기처럼, 도저히 ‘어떤’ 사람과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나와 키스하지만 않으면 참 좋은 친구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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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ors Involved in the Fear of Kissing (Lisa Fritscher). 2019.09. Very Well Mind

 


또는 향수병이라는 것, 새삼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가족-친구-한식의 존재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는 먹지 않던 컵라면이 외국에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시 나에게 멀어지는 컵라면. 그런 것들도 있는 거다. 물리적 거리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나와 컵라면 같은 관계도 있는 거다.

어떤 것과의 사이가 0이 될 수는 없다. 0은 일치를 의미하니.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산다. 내가 오늘도 무리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러 사람의 인생을 살 수는 없으니. 거리는, 존재할 수 밖에 없으니.

교수님은 조용한 틈을 타서 계속 말씀하셨다. “저는 혼자 살게 된 순간, 엄마를 사랑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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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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