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이 두려웠던 '오베라는 남자'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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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베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색깔은
소냐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녀없이,
세상의 다채로운 색깔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작 p. 68
영화는 주인공 오베의 아내 소냐의 부재와 함께 시작한다.
116분의 러닝타임 내내 영화는 계속해서 소냐를 비추지만, 이는 그가 그리워하는 그녀와의 행복했던 과거,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회상일 뿐. 그녀는 이미 죽었기에 우리 관객은 살아있는 소냐의 모습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렇듯 소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그녀의 무덤을 통해 충분히 자각하고 감상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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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영화를 총 3번 보았다. 연이어 본 것은 아니고 몇 년에 걸쳐 보았는데,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땐 두 남녀의 아름다운 로맨스와 더불어 이웃들 나아가 세상과 연대, 유대, 교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이르는 사랑에 관한 너무나도 뻔하지만 그렇기에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영화라고 생각했다.
문제의 주인공과 그를 곁에서 돕는 이웃 또는 친구라니. 퍽 익숙한 소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부류의 영화가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이를테면 익히 알려진 <인턴> <언터쳐블 1%의 우정> <세인트 빈센트> 등등.
하지만 최근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그것들과 <오베라는 남자> 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대개 이런 소재의 영화라면 주인공의 성격과 그가 가진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기에 앞서 그가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어쩌다 그런 특징을 갖게 되었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그러한 설명을 생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꽃집 종업원에게 꽃이 두 다발에 70크로나인데 한 다발엔 왜 35크로나가 아닌 50크로나냐고 소비자보호원에 고발하겠다며 호통치는 오베의 모습을 영화의 첫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생략한 척한다. 그렇지만 실은, 영화 전반에 걸쳐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며 그의 성격 형성 원인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마저 본인 눈앞에서 잃어버린 것에 그치지 않고 집까지 불타 없어져 버렸는데 그가 세상에 대해 다소 적대적이고 강박적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단순해 보일 수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도로의 담배꽁초를 줍고 차고지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자전거 주차 금지 구역과 분리수거장과 놀이터를 정돈하는 것이, 지역 주민회장을 맡아 차량 진입 금지와 같은 규범과 규칙을 만들고 몇십 년간 철저히 준수해온 것이 단순히 그의 자기만족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한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는 데에는 수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적용될 터, 오베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융통성 없는 성격에는 분명 더 많은 인과관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우선순위로 삼고 무엇을 추구할지. 저마다의 선택은 다를 것이다. 가장 지키고 싶은 것, 다시 말해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도 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부가 인생의 목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명예가 최우선의 가치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겐 사랑이 무엇보다 잃고 싶지 않은 아주 간절한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속 오베가 가장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모두 여읜 오베에겐 가족이, 사랑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부모를 잃었던 것처럼 소냐를 잃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불운의 사고로 아이마저 잃은 상황에서 소냐는 그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하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니던가. 바라던 것은 꼭 이루어지지 않고 피하고 싶었던 일은 꼭 일어나기 마련이다.
오베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테다. 그렇기에 그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매만질 수도 없는 불완전한 추상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완전한 환경을 만들어서 모든 것을 규범과 규칙 아래에 두고 위험 요소를 없애, 불안감을 최소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는 오베의 최후의 수단이자 발악이 아니었을까.
이웃을 향한 오베의 부정적인 시선은 그가 정말 사회 부적응자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사랑하는 대상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지켜야 할 것을 최소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랑하면 지키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라, 그렇게 규범과 규칙에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던 인간의 자살 시도라니? 자살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와 순리에 어긋나는 행동 아닌가. 소냐와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독한 원칙주의자인 남자에게 정해진 규칙도 규범도 없는 불완전한 사랑이라니?
사실 규칙과 규범은 그리 중요했던 것이 아니다. 이 남자에겐 ‘사랑’과 그로 인해 ‘지켜내야 하는 것들’이 중요했던 것이다. 규칙과 규범은 이를 위해 수단이었을 뿐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비로소 생각해본다.
내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은 무얼까.
[강안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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