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섯 개의 선지, 하나의 정답 [사람]

글 입력 2020.03.0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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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 한 달 전부터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나마 내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국어’ 과목에 대해 수험생들을 상대로 학습의 도움을 주는 일이다. 비록 수능을 친지 몇 년이 지나 그 감각들을 잊고 살기는 했지만, 수업을 위해 다시금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그토록 매달렸던 시험지들을 마주해보니 잠들어 있던 시험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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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를 준비하던 그 시절을 떠올려 보면, 나는 수능 형식의 시험에 대해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고 내신 시험보다 훨씬 접근하기 쉽다고 여기곤 했었다. 실제로 그 생각은 아직까지 바뀌지 않았다. 모의고사, 수능 시험은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을 문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의 제기가 발생하지 않게끔 논리정연하고 빈틈이 없어야 하며, 시험지에 실려 있는 지문을 올바르게 독해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즉, 자신의 배경지식이나 상식보다는 독해 능력이나 추론 능력, 어휘 수준 등에 의해 점수가 좌우되는 것이다.(이 판단은 오롯이 ‘국어’ 영역에 대한 것이다)

 

그에 반해 내신 시험은 어떤 과목도 모두 ‘암기 과목’처럼 바꾸어 버리는 특성이 있다. 시험 문제를 만드는 학교에서 ‘정답’으로 가르쳤던 것들, 이를 테면 문학의 경우 여전히 학자들도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도 특정 해석이 정답인 양 가르쳤던 것을 그대로 문제의 문항으로 출제하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개입이 불가능해지고 학생들은 오직 하나의 정답만 붙들어 매고 달달 외워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학교의 각 교사들은 자신들이 가르친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시험 범위 안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대개는 그 적정선을 지키는 편이지만, 시험 문제는 간혹 변별력을 위해 치사하게 느껴질 만큼 세부적인 내용에서 출제되기도 한다. 즉, 학생들이 외우기 어려워하거나 놓치기 쉬운 허점을 노리는 데에 치중하여,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용임에도 시험 문제로 출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내신 시험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암기한 학생에게는 정직하게 좋은 성과가 주어진다는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공부를 해 봤자 남는 게 없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근원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고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당시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투자를 그만둘 순 없기에 결국 무의미한 공부를 지속하게 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였다. 나는 동기 부여를 위해 끊임없이 내게 암시를 걸었다. 그래, 굳이 안 외워도 되는 것까지 나는 신경 써서 좋은 점수를 받았어. 이대로 유지한다면 나는 좋은 대학교에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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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다음은?

좋은 대학교에 가게 된 ‘나 자신’은 좋은 사람인가?

지난 3년간 내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욱여넣은 지식 중에

제대로 된 배움 하나라도 있었나?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치열하게 수험 생활을 거쳐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학교에 오고 나서 위와 같은 회의적인 생각이 자주 들게 되었다. 그리고 좁은 학교를 벗어나 좀 더 큰 세상을 마주하고 보니, 세상에는 내가 그동안 들고 팠던 공부보다 훨씬 흥미롭고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를 했다’는 것은 후회스럽지 않았지만, ‘공부만 했다’는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 당시에 공부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스럽게 느껴졌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우리를 지도했던 어른들에게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학원에서 가르치는 열아홉 학생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머릿속에 차오른다.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정답’을 갈구하는 것들이다. 선생님, 이 시 구절은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아요? 이건 뜻이 뭐예요? 어떤 수사법이에요? 분명 의문의 형태로 발화되지만 학생들의 질문은 학문적 호기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정답인지 ‘확인’하는 작업인 것이다. 더 유감스러운 점은 그 질문을 받은 나 또한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인된 해석’, ‘정석적인 풀이’에 의존하여 답변을 해야 된다는 점이다.

 

답변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문득 내가 학생일 때 만났던 여러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어떤 분들은 내가 질문을 던졌을 때(내가 던졌던 질문들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자신 있게 정돈된 답을 딱딱 알려줬었고, 어떤 분들은 고민을 하다가 확인을 해봐야겠다며 답변을 미루기도 하였고, 또 어떤 분들은 내가 물어본 것 이상으로 여러 정보를 전해주기도 하였다. 나는 그 때 학생들이 원하는 답만을 깔끔하게 내놓은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라고 여기고, 바로 답하지 못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길게 설명을 하는 선생님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여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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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내가 그 위치에 서보았을 땐, 정해진 말만 재깍 대답한다고 해서 훌륭한 자질을 갖춘 선생님인건 아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의 질문에 충실히 답변하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내가 그렇지 못한 선생님들에 대해 지녔던 인식이 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고민하거나 대답을 미루는 것은 단순히 그 내용에 대해 잊어버려서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설명이 공식화된 설명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안 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설명이 너무 긴 선생님들은 조금이라도 학생들이 지식을 폭넓게 접했으면 하는 마음에 말을 덧붙이다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늘어졌을 수도 있다.

 

대학교에 와서 전공 수업을 들으며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위에서처럼 ‘자신의 말이 틀릴까봐’ 걱정할 필요가 대폭 줄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 국어 시간에는 ‘신라면’이라는 단어를 [실라면]으로 발음하는 게 옳은지 [신나면]으로 발음하는 게 옳은지에 대해 배울 것이다.(이것은 예시를 위한 것으로, 실제로는 두 발음 모두 가능하다) 반면에, 대학교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전자처럼 발음하고, 다른 사람들은 왜 후자처럼 발음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묻고 연구한다. ‘그건 틀리고 이게 맞다’식의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그래? 이건 어때?’라는 식의 열려있는 사고의 장을 맞이했을 때, 내가 받은 것은 가히 충격이라고 이를 만한 것이었다.

 

*

 

3년 동안, 어쩌면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학생으로서 해야 할 몫을 해낸 것에 대한 보상일지 나는 졸업 후 넓은 세상을 맛보며 그동안 경직되었던 사고를 조금씩 유연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3년 만에 입시의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학생들을 보며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그렇기에 학생들의 처지에 공감하며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수능의 경우에는 내신보다 덜 경직되어 있는 편이며, 암기의 방식으로 준비하는 시험 형태가 아니다(암기 과목의 경우는 암기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내신과 비교했을 때 수능 문제의 전체적인 유형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학생들이 수능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공부를 해도 특유의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이 정답이 아닐까봐 드는 불안감에 지배 당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의 불안이 입시 준비만을 하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고 내재화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교육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나. 적어도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대학을 간다’라는 선지와 ‘대학을 가지 않는다’라는 선지를 두고, 마치 우리는 시험 문제를 풀 때처럼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에 체크를 하는 것 같다. 인생은 누군가 채점해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물론 대학교에 진학하는 경험은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많은 혜택을 부여하기도 하고, 대학교라는 공간은 또한 다양한 사람과 생각을 만날 수 있는 넓고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그 길만이 정답처럼 여겨지는 풍조를 우리는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그 풍조 속을 들여다보면 보이는, 깊게 뿌리박힌 닫힌 사고를 우리는 인지해야하는 것이다.

 

 

[박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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