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증오의 분출, 바뀌지 않는 본질 - '안녕하세요, 무평읍'

"그러니까 네가 잘못하긴 했다는 거네?"
글 입력 2020.01.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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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뚜렷한 메시지


 

“전체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정당한가?” 본 작품의 시놉시스 마지막에 나오는 문구다. 예상했던 것처럼 집단의 금전적 이익을 위해 한 개인의 삶을 말살하고 이를 묵인하는 인간의 잔인함을 부각하는 작품이었다. 러닝타임 내내 앞뒤가 다른 인간의 이중성, 자본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폭발하는 집단의 정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메시지가 뚜렷한 덕에 연극의 기승전결을 안정적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정돈된 플롯을 보여주는 작품을 관람한 탓인지 공연이 끝난 후 머리가 지끈거리거나 온갖 복잡한 추측이 난무하는 등의 혼란이 없었다.

 

공간적 배경은 무평읍이라는 가상의 마을이었고 덕만과 옥희를 포함한 마을 주민 몇 명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된다. 덕만은 오래 전 옥희라는 어린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돈과 출세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옥희를 배신하고 마을 내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부부의 딸과 결혼한다. 수십 년 후 옥희는 대부호가 되어 마을에 돌아온다. 그때 마을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상태였기에 마을로 돌아온 옥희 여사에게 마을 발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특히 어린 시절 친분이 있었던 덕만을 내세워 어떻게든 기금 마련에 관한 물꼬를 트기 위해 노력한다.

 

어느 날 옥희는 마을 사람들에게 덕만을 죽이면 2천억을 마을에 기부하겠다는, 귀신도 듣고 까무러칠 제안을 한다. 당연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초반에는 우릴 살인자로 만들 셈이냐며 옥희를 비난한다. 덕만의 상점에 찾아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평소에 샀던 것보다 더 비싼 생필품을 외상으로 사가며 가게의 매출을 올려주기도 한다. 덕만의 아내도 걱정하지 말라며 덕만을 위로하지만 그의 불안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어느 시점에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자신을 반드시 죽이리라는 공포에 휩싸이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매일을 누군가에게 쫓기며 살아가는 듯한 그를, 달아난 옥희의 표범으로 묘사하며 표범을 잡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교차시켜 무대 위에서 보여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답게 직유를 사용하는 방식도 정석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표범은 사람들의 총에 맞아 죽었고 덕만 역시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이 해당 장면에서 암시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사람들은 비싼 물건을 외상으로 사고, 온갖 사업을 구상하고, 비싼 취미활동을 즐기는 등 사치를 부리기 시작한다. 덕만은 사람들이 점점 두려워진다. 그 많은 외상 빚을 자신을 죽임으로써 얻는 2천억을 통해 갚으리라는 공포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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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낙인찍기”의 예외성


 

증오는 단기간에 나타나기도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 나타나기도 한다. 상대방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더라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증오심을 품을 수 있고 사소하게든 그렇지 않든 모종의 계기가 쌓여서 오랜 시간에 걸쳐 상대방을 향한 증오심이 쌓일 수도 있다. 주목할 만 한 사실은 전자와 후자 모두 낙인 효과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증오심이 발현되면 누군가를 상대로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상대방과 내가 일상적으로 공존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과 함께 낙인 효과가 발생한다. 이 낙인은 일반적으로 당신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전달된다. 이것이 집단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즉 한 사람을 향해 절대 다수가 ‘이곳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구도가 발생하면 상황은 다소 심각해진다. 낙인이 찍힌 사람은 높은 확률로 해당 집단으로부터 격리되거나 방출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용납되는 때는 집단 내의 구성원 전반이 어떤 기준을 근거로 특정 인물을 배척해야 한다는 의견을 공유하고 있는 경우다. 배척의 기준은 집단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일 수도, 사회 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흥미롭게도 많은 경우 전자는 후자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실질적으로는 사회 보편이라는 말과 크게 상관이 없는데도 자신들의 판단이 사회 보편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이 만연하다는 뜻이다. 사회 보편과 같은 언어를 쓸 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낙인찍히는 상대방이 살인, 인권모독, 타인 기만(사기를 친다든지), 공금 횡령, 폭행 등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다. 당연히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쳐 제대로 배우고 자란 사람이라면 그런 행동이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므로 이렇지 못한 이를 처벌하는 것은 집단 내부에서뿐 아니라 사회 일반에서도 정당한 처사라는 결론이 만들어진다.

 

이후에 집행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전까지는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은 채 묵묵히 살아가던 사람도 공동의 낙인찍기 행위에 포섭되는 순간 존엄성을 말살당하고 그전까지도 증오의 눈초리를 심심찮게 받아왔던 사람 역시도 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연적인 양상을 띨 뿐 존엄성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모든 과정이 말 그대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진행된다면 집단이, 더 나아가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파렴치한 죄를 지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정의의 판결을 내린다는 것에 “당연하게” 동의할 수 있다.

 

문제는 항상 “예외”에서 발생한다. 상대방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 소위 정치질이라 불리는 절대 다수의 공격에 따라 죄인이길 강요받는다면 이때의 낙인찍기 행위는 굉장한 부조리로, 악마적인 집단성의 발현으로 해석될 것이다. 현대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주장하길 오늘날 이런 현상은 생각보다 일상에 만연하다. 당장 위에서 언급한 정치질, 즉 “일상적 정치”라는 행동만 해도, 말 그대로 정치인들이 정치 문제로 벌이는 싸움을 비롯해 직장 내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 일어나는 온갖 갈등들, 동일 직급의 사원들이 앞뒤로 나누곤 하는 미묘한 분위기의 대화들과 학교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껄끄러운 뒷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행동의 적용 범주가 아주 넓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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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쨌든” 명분 제공에 가담했다면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높은 확률로 어느 한 명 또는 집단의 크기에 비교했을 때 소수에 준하는 사람들이 배척되는 경우가 많았다. 누가 얼마나 어떻게 몰락하느냐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내가 목격하거나 들었던 사례에서는 대개 몰락하는 당사자가 실제로 저지르지 않았던, 저질렀더라도 몰락을 요구하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에 비해 스케일이 작았던 사건으로 인해 낙인찍기형 공격에 노출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사건의 스케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증오심 분출을 당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공동체적 증오심을 표현하기 위한 일말의 계기가 필요했던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표면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 원인은 구성원 전반이 동의할 수 있는 명분이 존재해서다. 앞서 말했듯이 공공연한 윤리를 어긴다거나 규범, 규칙을 위반하는 행위 등을 이유로 증오심 분출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이 상황에서 증오의 대상이 그런 종류의 행위를 않았음에도 온전하게 누명을 쓰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당한다면 잘못을 완전히 증오 분출의 주체에게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분출 주체가 내세우는 명분에 조금이라도 끼워 맞출 수 있는 여지가 증오 대상에게 있다면 문제가 매우 답답해지고 애매해진다. “그러니까 네가 잘못하긴 했다는 거네?”라는 말이 붙게 되는 순간 잘못의 스케일 자체가 간과당할 위험성이 커진다. 작정하고 상대방을 매장시켜서 어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목적성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더욱이 그러하다. 애석하게도 일상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증오 발휘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상대방은 조금일지라도 특정한 잘못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이 있긴 하다는 말이다. 잘못의 규모가 작건 크건 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나 등장할 법한 온정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포진해 있다면 애초에 일상적 정치라는 표현 자체가 부재할 것이다.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이 더 익숙한 사람들에게 온정은 적어도 후순위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이렇듯 계산기를 속으로 두드리면서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을 더 가져다줄지 고민한다. 만약 누군가를 집단에서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증오심을 수단으로 타인을 배척함으로써 이득이 되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이를 교묘하게 실행한다. 계산기를 두드린다는 대목으로 충분히 설명했듯이 이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잘못을 아예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표적으로 삼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그래서 일말의 사실을 바탕으로 부풀려낼 만 한 일말의 명분에 집착하고 명분을 정당화시키는 것에 심혈을 기울인다.

 

타겟은 명분 제공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가담했다는 사실만이 명백한 대상이다. 대상을 찾아내면 그 대상이 저지른 일을 빌미로 살에 살을 붙여 자신의 증오심을 키우고 상대의 잘못을 키운다. 십중팔구는 상대를 향한 강요와 협박, 생각의 주입으로 이어진다. 어쨌든 당신이 잘못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꽤 큰 잘못이다. 당신은 그런 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겠는가. 알고 보니 당신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고 소름끼치는 사람이다. 이렇게 살은 계속해서 불어나고 상대방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자신은 정의와 윤리를 배반했다는 명백한 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상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황하는 동안 다른 쪽은 자신들의 손을 직접 거치지 않고 언어뿐인 증오로 상대를 몰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의 수법은 별 것 없어 보이지만 참으로 잔인한데, 상대방의 죄책감을 자극함으로써 상대가 자발적으로 몰락에 이르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자신에게 유효한 사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죄책감과 자기혐오 때문에 격렬하게 저항하지 못한다. 그래서 상황이 매우 답답해진다.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통해 덕만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회의 결과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고 체념 섞인 말로 이야기하던 덕만의 모습도 이런 연유로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결국 덕만은 죽는다. 옥희는 약속했던 대로 마을 사람들에게 2천억 원을 기부하고 자신이 가져온 관에 덕만의 시체를 넣어 데려간다. 옥희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살인자라는 말을 내뱉지만 사람들은 그런 옥희의 말을 듣지 조차 못한다. 그들은 풍족한 재산을 바탕으로 사치를 누리며 살 것이다. 증오를 분출함으로써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새삼스럽지 않게도 금전적 이득이었다. 비록 자신들 역시 몇 십 년 전 옥희를 마을에서 내치는 데에 가담했지만 옥희가 죄인으로 덕만을 특정한 이상 본인들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들로서는 표면적인 정의도 성취하고 부도 성취했으니 해피엔딩이다. 그들의 치밀함에 답답함을 느끼고 기만당했다는 느낌을 받는 제3자의 관객만 배드엔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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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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