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view
SF영화를 보다 보면 막연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디스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공포가 생긴다. 영화 <아일랜드> 또한 복제 인간이 현실과 격리되고 통제되는 디스토피아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상상했던 2019년 7월 9일은 어땠나?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는 날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나지 않는 어느 과거의 날이 되었다.
<아일랜드>가 개봉했던 2005년을 언뜻 떠올렸을 때 지금과 다를 바 없었던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히 그때와 현재는 기술적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 또한 많이 바뀌었다. 유전자 변형으로 떠올랐던 줄기세포는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AI가 실생활에 널리 확산하였고 생각보다 (혹은 아직은) AI가 인간의 직업을 모조리 빼앗거나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하지 않았다. 더욱 사소하게 들어가면 1GB의 mp3도 메모리가 충분히 느꼈던 2005년과 달리 현재 128GB의 스마트폰 메모리는 항상 부족한 세상이 되었다.
미래에 대해 공상하는 소설 중에서 많은 것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런데도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하게 된다면 어떤 상상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모든 SF소설의 상상이 모두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2020년은 빅 브라더라는 존재조차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인식조차 못하는, 더욱 무서운 세상이 되기도 한 것같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인 상상에 한 스푼 더 이야기할 소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가 있다.
SF소설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는 과학 분야 팟캐스트 1위를 지키고 있는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의 원종우 대표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과학 전문가가 아닌 원종우 작가였지만 항상 과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자신만의 길로 과학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더 과장된 방식과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SF소설이었다.
그는 과학에 대한 막연한 상상에만 기대지 않았다. 윤리적, 철학적, 사회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덧붙여 놓아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사색하면서 침잠하게 한다. 그중 흥미롭고 철학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몇 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로봇만의 문명을 만들던 중이었던 것 아닐까
마이사가 잠시 뜸을 들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세 번째 전쟁은 정말 참혹했지요. 인류의 4분의 3이 죽었으니까요. 사회, 경제, 정치 시스템이 모두 붕괴하였고 자연도 끔찍하게 훼손되어 이전으로 돌아가기조차 어려울 만큼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을 해야 했죠. 인류가 과연 이 문명을 계속 이어 나가고 발전시킬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인류 문명을 억지로 부활시키는 대신 인류와 망가진 생태계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지우고 리셋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거의 모든 영역에 우리의 손길이 닿아 있었기에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한 세기 전의 일이죠.
_<인형들의 천국>, 117쪽
<인형들의 천국>은 지구를 망치기만 한 인간들을 모두 멸종시킨 후 안드로이드들이 만든 세계에 대한 소설이다.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이룩한 문명을 들은 후 외계 행성에서 온 외계인은 그들이 한 짓을 최악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들을 공격하고 외계인들은 지구를 떠난다.
소설을 읽은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제삼자인 외계인 마음대로 그들의 문명을 없앤 것인가였다. 역사책을 보면 인간들은 전쟁 등을 통해 많은 문화와 민족을 죽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민족들만의 자신들의 전통을 지켰고 그것은 역사로 기록되었다. 안드로이드 또한 거시적인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의 전쟁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의 문명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공격한 외계인 또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자신의 문명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깔려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다른 생명체를 대한다. 로봇들은 자신들이 자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자의식의 시작이 아닐까? 자의식이란 어쩌면 참 모호한 것인 것 같다. 소설 뒤 이어지는 후설 속 작가의 말처럼 그들은 인간의 자의식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결국 이긴 사람의 자의식으로 써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상상 속의 이 소설조차 자의식이 강하고 결국 안드로이드들의 세상도 ‘이긴’ 외계인이 쓴 역사서일 수 있다.
아직도 양자역학 스토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토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말에 동감했다. 그런데 그것조차 양자역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라니… 영화 소재로 쓰기 정말 매력적인 소재지만 그와 동시에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소재인 것 같다.
네? 제가 산타라고요?
일종의 비밀결사라고 할 바로 이 조직, 산타 신디케이트가 만들어진 바탕에는 산타클로스라는 존재의 역할과 그것이 어린아이들에게 주는 신비감과 경외감의 중요성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있다. 산타클로스의 전설이 시작된 이래로 수 세기에 걸쳐 인류는 산타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가졌고, 이후 나이가 들면서 그것을 상실하는 경험을 범지구적 차원에서 공유해 왔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실망감은 크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산타클로스의 전설을 믿었던 어린 시절의 감정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결과로 어른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자발적으로 암묵적인 결사체를 결성하고 산타클로스 개인이 해야 할 역할을 자신들의 아이들을 상대로 대신하게 되었다. 강력한 밈meme이 형성된 것이다.
_<산타 신디케이트>
<산타 신디케이트>는 25일에 되는 산타가 어떤 방식으로 전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초반에 산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따뜻하게 느꼈졌다. 그러나 소설에 대해 곱씹을수록 무서워 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르게 부모님들 스스로 산타를 자처했던 것이고 자신들은 산타 신디케이트에 소속되어있지 않은 것이 어쩌면 따뜻하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의 전통이나 그런 것들이 결국 굴러가는 이유가 사회의 구성원들 덕분인데 자신들은 그것을 모르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 어쩌면 나의 어릴 적 크리스마스와 겹쳐보여서 귀여워 보였던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더 생각해보면 이것은 조직적으로 특정한 날에 소비를 할 수밖에 없게끔 되어있는 사회 구조와 분위기를 고려하게 된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를 읽고 나니 막상 빅 브라더는 실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념이나 당, 조직같은 것보다는 아이콘화된 구체적 개인을 더 자연스럽게 신뢰하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중략) 이렇게 산타 개인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산타 현상의 사회적 가능성으로 환원 시켜, 조지 오웰이 빅 브라더를 내세운 것처럼 산타는 존재한다고 주장해버리면 이제 그는 실재하는 것이다.
_<산타 신디케이트> 후설 중 191~192쪽
예를 들어 한 20대가 크리스마스에 집에만 있으면 애인이 없냐면서 조롱하는 사람이 있기도 한다. 유머 글로 애인이 없는 크리스마스는 우울하게 그지 없다는 글이 심심치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커플이라면? 특별한 날이니 더 좋은 곳에 가게 되고 더욱 소비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에는 특정한 것을 위해 뒤에서 빅브라더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에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설도 소설도 가장 짧았던 <산타 신티케이트>는 현재 우리 사회가 은밀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조장할 수 있는지 가장 친근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결국 아이콘화된 산타는 사랑스러운 빅 브라더와 비슷한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무리하며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는 단순하고 얄팍한 과학 소설만을 적지 않았으며 과학 외의 다른 분야 또한 알아갈 수 있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보다 그것을 인간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당부한다. 왜냐하면 SF소설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 세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인간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