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겨울에 풀어보는 여름 이야기, 초여름을 닮은 "보희와 녹양" [영화]

어른의 시선에선 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글 입력 2020.01.03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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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을 닮은 성장 영화 <보희와 녹양>



2019년. 지난 한 해 스크린에서 나를 사로잡은 서사는 '청소년'이었다. <벌새>와 <메기>를 필두로 여성 감독이 큰 강세를 보인 작년의 영화들 중에서도 특히, '어린 여자 아이'와 그들의 이야기는 유독 나의 관심을 끌었다. <미성년>, <영하의 바람>, <우리집> 같은 영화들을 주의깊게 보곤 했다.


특히 <영하의 바람>은 직접 감독님을 뵙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는데, 겨울의 매서운 혹독함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불어닥치는 작품이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작품을 좋아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수록 따뜻한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올해 가장 차갑게 느껴지던 영화를 떠올리다 겨울과 정반대 편에 있는 초여름을 닮은 성장 영화를 떠올렸다. <보희와 녹양>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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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희와 녹양은 14살,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우량아와 미숙아로 처음 만났다. 보희는 섬세하고 여리지만 녹양은 거침없고 털털하다.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이들이지만 마치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춘 듯 퍽이나 잘 어울리는 이 친구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동성인 부모가 없다. 보희에겐 아버지가, 녹양에겐 어머니가 없다. 둘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는 건 서로가 가진 빈자리에 대한 정서적 유대인 걸까? 어느 날 보희는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던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고, 녹양과 함께 아버지를 찾기 시작하는데…….


영화는 아버지를 찾으러 여러 어른을 만나는 과정에서 보희와 녹양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란 상황에 처한 사춘기 남학생인 ‘보희’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청소년에게 사회가 제공해야 할 올바른 젠더관, 책임감 있는 어른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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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화두는 동성부모의 역할이다.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보희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런 의문이 든다. 아들에겐 아버지가, 딸에겐 어머니가 꼭 필요한 것일까? 주변의 둘러보면 흔히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딸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의 초기 성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의 모습을 길잡이 삼아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마치 이것이 이상적인 삶의 형태인 양. 물론 동성 부모의 존재가 결코 중요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아이들이 접하는 첫 어른이며 우리 사회가 성에 대한 특정한 관념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곳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끼치는 영향력은 무척 크다.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며 불안에 떨거나, 엄마와 함께 여탕에 함께 간 것이 마지막이라며 성우와 함께 간 목욕탕에서 쭈뼛대던 보희의 모습은 동성 어른의 부재가 성장기 소년에게 끼친 영향이라 볼 수 있다. (보희에 비해 녹양은 할머니가 계셨으므로 녹양이 성 정체성과 확립과정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크게 그려지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보희의 삶을 채우는 건, 어머니와 친구 녹양, 그리고 누나 남희와 남희의 남자친구 성우다. 특히 성우는 동성의 어른으로서 보희에게 남자들이 사회화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제공한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관심을 가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보희의 자아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주는 셈이다. (개인적으론 성우가 나쁜 어른으로 그려지지 않은 점이 가장 좋았다.)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빈 자리는 성우, 어머니, 녹양과 누나 남희로 인해 채워진다. 영화의 후반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집안 모습은 정형화된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이라는 가족의 프레임을 벗어난 일종의 대안 형태를 제시하는 셈이다. 즉, 아이의 성장에 있어서 동성 어른의 존재는 필요하나 그 대상이 굳이 동성 부모일 필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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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론은 다시 ‘사회가 제시해야 할 올바른 젠더관’이라는 화두로 연결된다. 작 중에선 보희라는 이름이 여자 이름으로 주로 인식되며, 보희의 별명은 성적인 비속어로 불린다. (영화에서 확인하시라) 그리 심하게 영화에서 가부장적인 젠더 패러다임이 발견되지는 않지만, ‘남자다워지고 싶다’는 보희의 대사나, ‘나보고 기집 애랑 닮았다고 한 거야?’와 같은 성우의 대사 등 스쳐 지나가는 짧은 단면들을 통해 ‘여성스러움’과 ‘남자다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보여준다.


청소년은 사회적으로 정체성을 확립해나가고 인생의 주요 가치관을 성립해나가는 시기에 있기 때문에 이들이 특정한 형태로 형성된 성 정체성을 학습하는 것은 그리 건강하지 않다. 더불어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보희가 혼란을 겪는 일 역시 단편적인 사회의 시선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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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건 보희가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이다. 영화의 초반 부 보희는 강물에 제 발로 들어가 몸을 담근다. 한 걸음, 한 걸음 심연 속으로 들어가 기어이 물에 잠기는데, 이 장면은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난 후 똑같이 반복된다. 겉으로 보기에 자살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사실 실질적인 묘사가 아니라 보희의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는 허구적 묘사다. 자신의 생각을 벗어난 현실을 처음 마주하는 아이가 겪을 혼란을 깊은 물 속, 심연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보희는 천천히 강에서 수영을 한다. 조금씩, 조금씩, 팔과 다리를 내저으며 물 속에서 나아가는 보희의 모습은 깊은 심연을 천천히 걸어나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물 밖으로 나온 보희를 기다리는 건 보희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의 손길이다.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에게 보희는 개명하지 않겠다, 조용히 읊조린다. 아버지의 흔적, 자신에게 있어선 상처였던 이름을 지우지 않는 것은 결국 보희가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겪었던 결핍을 나름대로 극복해냈다는 의미를 지닌다.


단순히 자신의 입장만 볼 수 있었던 아이는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삶의 궤적을 만나고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세상은 별천지지만, 보희에겐 어머니가 있고 녹양이 있고, 성우와 남희가 있다. 두 아이의 생일 날 왁자지껄 모인 이들은 보희에게 아버지를 대신하는 대안적 존재이며, 보희를 지탱하는 존재들이다.


작의 마지막에서 보희는 혼자 방에 들어와 녹양이 만든 영상을 조용히 바라보는데, 그 안에는 둘이서 아버지를 찾아 다니던 과정, 주변 어른들의 따뜻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모두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시선의 폭을 넓힌 보희,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건 많은 순간을 보희와 함께하며 이를 기록한 녹양이다. 두 아이는 미처 어른들이 보듬지 못했던 서로의 빈 틈을 함께 채워주며 성장해나간다. 어른의 시선에선 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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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초여름을 닮았다. 갓 돋아난 연둣빛 잎과 무성한 녹빛의 중간, 봄과 여름의 사이에 있는 곧 커다랗게 자라날 초여름의 나뭇잎을 닮았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영화다. 이 시기를 지나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명확한 답은 없었다. 영화는 주인공들을 시선으로 진행되기에 명확하고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하진 않는다. 그래서인지 스토리가 약간 산만한 감이 있을 순 있다. 다만 그들의 시선에서 솔직한 사회의 모습을 전달할 뿐이다. 가볍게 볼 수 있지만 우리 사회를 대하는 청소년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영화, 그래서 곰곰이 곱씹게 되는 작품이다. 한 겨울, 한껏 추워진 날씨에 여름의 정취로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영화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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