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사의 부재, 시선으로 예술가의 생을 담다 - '고흐, 영원의 문에서'

불친절한 스크린, 그만큼 참신했다
글 입력 2020.01.0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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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친절한 이정표


 

아마 이 영화가 당황스럽다면 그 이유는 서사의 부재에 있을 것이다. 두 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 너머에서는 별다른 서사가 전개되지 않는다. 반 고흐의 전기 영화라는 점을 알고 착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서사가 부재할 줄은 몰랐다. 기름기 하나 없는 영화였다. 기존의 전기 영화들과 반 고흐라는 이름을 내건 각종 컨텐츠들이 반 고흐의 인생을 제3자의 관점에서 ‘각색’하는 입장에 가까웠다면,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의 전기성을 어찌 보면 가장 잘 살린 케이스라고 할 법도 하다. 서사 없이, 별다른 미화랄 것도 없이 고흐 개인의 인생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상영이 시작하자마자 영화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5분, 10분 정도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이 작품에서 기승전결이 뚜렷한 플롯과 내러티브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이내 깨닫고 잠깐 동안 집중력이 흐트러지곤 했는데, 다행히도(?) 미궁 속으로 더욱 빠져들지 않고 안전하게 스크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미술사니, 미학이니, 학문적으로 탐구하려는 태도는 버려둔 채 한 예술가의 시선을 관망하고자 노력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난 후에 이 영화가 반 고흐의 ‘예술혼’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서 보여주었다고 호평하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사실 스크린은 어디까지나 비현실의 영역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제아무리 실감날 지라도 현실의 사건과는 명백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화면에 등장하는 반 고흐는 말 그대로 배우가 연기하는 충분히 물화된 사람이다. 예술혼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고흐의 것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가장 큰 의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술가 개인의 시선을 염탐할 수 있도록 관객에게 ‘눈’을 제공한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면, 철저히 제3자의 시각에서, 철저히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배우의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배우 본인의 시선에 카메라가 동일하게 앵글을 맞추어 마치 주인공에 빙의된 듯한 연출이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은 많지 않았다. 내 기억 상으론 그랬다. 하지만 분명히 반 고흐를 관망적으로 촬영해서 관람객인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흐 본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촬영 기법이 상당히 독특했던 게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추측한다. 고흐가 충격을 받거나 그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사건들이 발생할 때, 고흐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내면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화면 역시도 흡사 지진이 난 것 마냥 어지럽게 흔들리곤 했다. 또한 컷에 담긴 인물들의 목소리를 마치 환청이 들리는 것 마냥 에코 효과를 극대화해 들려주기도 했는데, 이러한 연출과 맞물린 어지러운 촬영 기법이 주인공인 고흐의 시선으로 작품을 관람하게 해줄 수 있었다고 느낀다.

 

또한 작품 중간 중간에 과거의 장면들을 재빠르게 교차시켜 삽입함으로써 격앙되고 어지러운 분위기를 표현하기도 했는데, 영화에서 교차편집이 이루어지는 많은 순간들이 그렇듯 ‘이 컷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라는 뚜렷한 안내 없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 현재에 해당하는 장면인지, 과거에 해당하는 장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에 화면을 바라보기가 조금 버거웠다. 불친절한 연출이었다. 전기 영화에서 이런 연출 방식을 사용하는 사례는 흔하지 않다. 신선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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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기 영화의 진부함을 떨쳐낸 연출


 

감독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간 반 고흐의 생애를 관람객들과 함께 향유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훌륭하게 관철시켰다. 상당히 불친절한 방식으로 말이다.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기존의 전기 영화들은 주인공의 삶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영화 전반에 작품 제작자의 해석이 지나치게 반영되어 오히려 ‘이것이 전기 영화구나.’ 와 같은 생각을 관객에게 심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되는 위인이 이룬 업적들을 작품의 주된 사건으로 설정하여 위인의 위대함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시 말해 스크린 외부에 존재하는 현실의 사건들을 스크린 안으로 그대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처럼 역사의 위인들의 삶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대체 이런 졸작이 어디서 나왔느냐, 볼 가치가 없는 작품이다.’ 와 같은 혹평을 내리지 않는다. 어찌 되었건 실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의 업적을 웅장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므로 그렇게까지 박한 평은 내리지 않는다. 그들의 비판은 실제 사건을 작품 내부에서 임의로 ‘왜곡시켰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실질적으로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은 비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건들이다. 모든 전기 영화는 이렇듯 그것이 전기 영화라는 이유 때문에 작품의 근본을 현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부했다. 이미 결론이 난 이야기들을 미화하거나 웅장하게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렇지만 이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한 연출 기법을 선택함으로써 기존의 전기 영화가 지녔던 진부함에서 탈출했다. 사실 이 작품 역시 빈센트 반 고흐라는 실제 화가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만큼 전기 영화로서 지녀야 할 근원적인 속성 자체는 지우지 못했으나, 적어도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러한 영화의 성격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관객의 시야를 어지럽혀 놓았다. 연출 기법의 상이함을 통해서, 그리고 서사를 없앴다는 과감한 시도를 행함으로써 참신함을 얻었다. 관람객은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고흐가 예술가로서 이룬 업적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기가 힘들다. 스크린은 정신적으로 기댈 곳을 마땅히 찾지 못한 와중에 창작욕을 억누르지 못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한 개인의 모습을 비참하게 보여주느라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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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선의 확장, 라캉의 응시 이론과 함께


 

이때 대부분의 관객은 반 고흐라는 화가의 명성을 외적으로 인지한 상태일 것이다. 생전에는 그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해 고된 삶을 살았지만 죽은 후에 재능을 인정받은 비운의 화가 정도로 말이다. 여기에 고흐의 대표 작품 몇 가지와 그의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지니는 의의 정도를 배경지식으로 가진 상태에서 영화를 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관객들은 지극히 관람객으로서의 시선을 지닌 채 영화를 감상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내가 알고 있는 반 고흐라는 인물의 생애를 얼마나 ‘실감나게’ 영화가 ‘서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작품은 서사 없이 고흐의 시선을, 흔들림 없이 편안한 촬영 기법이 아니라 힘껏 흔들리고 불안정한 촬영 기법을 통해 한 개인의 감정적인 동요를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나를 포함한 관객들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라캉의 응시 이론에 따르면 세계 속에 있는 대상 역시도 상징계의 주체를 바라볼 수 있다. 이전의 휴머니즘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시선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라캉에 의하면 세계가 주체를 바라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시각 도식에 따르면 주체는 대상의 지배자일 뿐 아니라 대상의 응시 아래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기존의 휴머니즘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주체의 시선을 위해 대상이 이미지로서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일방적인 것으로 규정했다면 라캉의 시각도식에서 양자의 관계는 상호긴장적인 관계로 변모한다. 대상이 빛의 점에 위치할 때 이 대상의 응시가 주체를 바라보면 주체는 재현의 주체가 아니라 재현의 피사체로 변모한다. 이러한 이미지 스크린을 두고 대상과 주체가 대결한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체가 재현하는 시선, 즉 주체가 자신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면서 재현하는 점이 있다. 주체는 이 재현의 지점에서 대상의 세계를 바라보는데 이때 대상의 세계는 아주 무한한 실재의 세계다. 그래서 실재의 세계의 모든 것들을 재현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기에, 주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서만 실재를 포착한다. 이것을 이미지의 형태로, 재현의 질서 안에 포함시킨다. 이렇게 주체를 위해 배열된 이미지로 가득한 세계가 상징계다. 하지만 동시에 주체는 대상의 세계에서 응시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대상이 상징계 속에 존재하는 주체를 바라볼 수 있는 역의 관계가 발생한다.

 

그런데 실재계가 상징계의 주체를 직접 바라본다면 주체는 파괴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응시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이미지 스크린이다. 그래서 라캉에 따르면 이미지 스크린이란 실재계의 대상 응시를 주체에 매개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재계의 위협을 막거나 완화시키기 위한 장치고, 일반적인 작품들은 이 스크린을 이용하여 상징계로 다가오는 실재계의 위협을 막고자 한다는 것이다.

 

전기 영화의 일반적인 구조를 설명하는 데에 라캉의 이론은 퍽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관객인 우리가 보편적인 전기 영화를 감상할 때, 영화 안에서 마주하는 세계는 상징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본 영화가 관객에게 드러내는 세계는 실재계에 해당한다. 우리의 배경지식처럼 포장된 무언가를 가미시키지 않은 채 매우 불친절하게 한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장되지 않은 반 고흐를 만나면서 관객은 다소간 혼란에 빠진다. 관객을 위한 이미지 스크린은 특유의 정신 사납고 어질어질한 연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영화가 너무 어렵다, 영화를 똑바로 감상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등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이러한 혼란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전기 영화를 전기 영화답게 만들지 않았고 스크린이 막을 내린 뒤에도 마치 두 시간짜리 꿈을 꾼 것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와중에 관객의 시선은 확장된다. 배경지식과 기존의 앎으로 점철된 시선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할 뿐인 상태의 인물이 선사하는 감정의 동요를 접하며 비로소 인물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수준까지 이른다.

 

이런 점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지만 다시 관람할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되는, 그런 영화다. 그래도 나는 서사가 명백한 영화를 선호해서 그렇다. 한바탕 사나웠던 꿈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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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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