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토지 1부 1권을 필사하며 [사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나는 필사를 택했다.
글 입력 2019.12.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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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공부하다가


 

다시 연말이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이함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밖에 나가면 이곳저곳 연말 분위기가 가득한 공기에, 또다시 아쉬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조금 생기고 만다. 무언가 대단한 것의 시작점을 위한 준비과정인 양 결의에 찬 마음으로 새로 다이어리를 사고 집안에 잡동사니를 정리하다가 더 할 것이 없을까 고민만 하며 보내는 시기가 연말인 듯하다.

 

2019년이나 2020년이나, 결국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기에 특별히 대단한 뭔가를 아직 해가 가기 전에 해내리라, 해내고 말 거야 하는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저 내가 스스로에게 필요하다 여긴 것들을 꾸준히 공부하고 지속하며 내년에도 이어가야지, 그렇게 다짐했다. 필사 관련 서적을 읽는 것도 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처음 도서관에서 필사 관련 책을 읽고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를 한 이후, 나는 계속 필사를 주제로 한 다른 책들을 읽으며 꾸준히 글을 쓰고, 꾸준히 공부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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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 문장력 특강”은 김민영 외 3인의 숭례문학당 강사가 집필한 책이다. 책에서는 쉬이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분명하게 좋은 문장력을 갖추기 위한 필사의 필요성 및 필사 방법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책은 필사를 하면서 궁금한 점, 고민되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 및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다양한 예시들이 소개되며 혼자서 하는 필사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방법의 조언들 중 가장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어휘력 향상에 관한 것이었다. 에디터로 글을 기고할 때 외에도 요즘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어휘력 부족을 절감하고 되도록 다양한 분야의 글을 많이 읽어야지 생각하던 참이어서 다른 부분보다도 어휘력 향상에 대한 주제 글을 더 집중해서 읽어보았다.

 

책에서는 부족한 어휘력 향상을 위해서는 풍부한 어휘가 담긴 문장을 필사하는 것이, 특히 표현력이 풍부한 문학 필사가 좋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필사하기에 좋은 작가, 작품을 소개하며 저자는 박경리 작가의 “토지” 1권은 “수려한 우리말이 담긴 창고”이며 토지사전이 따로 출간될 정도로 “어휘의 바다”라고 할 수 있기에 꼭 필사하라고 독자에게 권유하기도 했다.

 

토지 1권 필사,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책을 읽던 당시는 12월 초였기에 과연 이 달 안에, 그러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책 한 권을 필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한편으론 돌이켜보니, 올해는 내가 간간이 시 또는 짧은 산문을 필사한 적은 있으나 책 한 권을 필사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 올해를 넘겨 내년까지 이어지더라도 한 번 필사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다시 찾았다.


 

 

토지의 시작을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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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토지는 풍부한 어휘가 담긴 작품이기에, 익숙하지 않은 단어 및 경상남도 사투리가 많이 등장한다. 따라서 토지를 처음 읽는 사람이 필사를 함께 이어가는 것은 꽤 어렵고 지루하다 느낄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 작품 필사는 한 번 읽어본 책을 필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눈으로 읽은 것을 손으로 써 내려가면서 놓친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같은 부분도 새로이 느껴지면서, 새로이 깨닫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처음 읽은 후, 거의 십 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토지 1부 1권이었다.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토지”보다는 “토지를 읽는 나”에 좀 더 치중했던 것 같았다. 10년 만에 다시 소설을 마주하며 한 글자, 한 글자 필사를 하는 과정으로 좀 더 진중하게 그 안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보고 싶었다.

 

“필사 문장력 특강”에서는 필사를 단기에 빠르게 끝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하루에 5문장 이상씩,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일이 없을 때, 꾸준히 필사하다가 조금 힘들다 싶으면 그만하고 다음날에 다시 이어갔다. 빠르게 끝낸다는 마음보다 조금 찬찬히, 안에 있는 단어와 문장을 배우는 마음으로 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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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하며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소설의 시작이었다. 1897년의 한가위를 배경으로, 민족의 명절이자 축제가 펼쳐지는 나날이건만 모두가 즐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슬픔과 서러움의 한기가 사람들을,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 최 참판 댁을 감싸고 있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건만, 마음속 각자의 결핍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된다.

 

서로 사랑했지만 무녀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어지지 못한 월선과 용이, 어머니도 아내도 사랑한 적이 없는 냉혹한 성품의 최치수,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을 마음에 묻고 평생을 살아가는 윤 씨 부인, 그리고 구천이의 슬픔과 이를 지켜보는 최 참판 댁 몸종들의 이야기까지.

 

그 절절함과 고뇌, 괴로움, 그리고 욕망이란. 책은 분명 중학생 때 읽었던 것과 똑같은 작품일 것인데, 내가 받은 감상은 그때와 온전히 똑같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이 나이가 되기까지 시간이 그렇게 흘렀고 그만큼 내가 달라졌다는 것일까. 그래도 그때와 유일하게 같은 것은, 토지 1권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가고 안쓰러운 인물이 최 참판 댁의 유일한 자손이자 소설의 주인공, 서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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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서희에게 할머니는 엄하고 아버지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어느 날, 말도 없이 엄마가 떠났다. 제대로 말해주는 이 없고, 어른이 되면 온다는데 그러려면 몇 밤이 지나야 할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엄마 데려오라고 크게 외치고 우는 것 밖에 없다.

 

어린아이가 이유도 모르고 엄마와 헤어진 후 겪는 상실감에 대한 묘사를 적어 내려가며,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것 그 이상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위에 적었듯, 다른 아이들보다 마음이 자랐다 하고 지혜를 얻었다 해도, 결국은 결핍으로 인한 남들보다 빠른 성장이니까. 그리고 이후 이 결핍이 서희에게 차후 미칠 것들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더해질 뿐이다.

 

 

꾸준함 그리고 설렘


 

글자를 급하게 쓰면 악필(惡筆)이 되고 정성을 들여 쓰면 달필(達筆)이 된다는 말이 있다. 원래 악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분하게 모든 글자에 정성을 다해 써보고자 했는데, 아직 마음에서 빨리 쓰려고 하는 조급함을 완전히 덜어내지는 못했나 보다.

 

이번 필사의 시작은 어휘력 향상에 대한 기대 및 책 한 권을 필사한다는 것, 그를 주된 목표로 삼아서 이어갔다. 온전히 익혔다고는 할 순 없지만, 토지를 필사하며 눈에 익지 않은 단어를 살피고 문장 구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를 넘어 이번 필사로 처음 읽었을 때의 감성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담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필사 문장력 특강”에서는 어휘력은 하루아침에 늘지 않으며 정직하게 필사해야 모르는 사이 어휘를 축적하게 된다고 한다. 토지를 다시 읽은 후, 정직함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과정의 필요성을 느낀 동시에 이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필사하는 과정이 내게 어떤 감상을 줄 것일까 하는 설렘이 마음에 자리한다. 시간이 흘러 토지의 첫 권을 다시 읽으면 또 어떤 새로운 시선으로 책을 마주하게 될까.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기대와 설렘을 가진 채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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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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