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 - 연극 '엘리펀트 송'

코끼리가 아닌 마이클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 안착하기를
글 입력 2019.12.1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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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수록 익숙해지는 공연이 있는가 하면 볼수록 낯설어지는 공연도 있다. 보통은 전자일 확률이 높고, 후자인 공연은 웬만하면 첫 관람 때 별다른 독특함을 느끼지 못해 재관람에 실패하곤 한다. 그러니 ‘볼수록 낯설다’라는 감정 자체가 희귀한 셈이다.


나는 무언가에 한 번 사로잡히면 그 대상이 닳아 사라질 때까지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나는 내 이런 성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의 설렘, 슬픔, 애정, 이 모든 감정들이 너무나 익숙해져 질려버릴 때까지 파고들기 때문에 종국에는 내가 왜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잊곤 하기 때문이다. 열정이 소진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거 카테고리 안에 집어넣는 편이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꾸준히, 지나치지도 적지도 않은 애정으로 사랑하는 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볼수록 낯설어지는 공연을 관람할 때면 참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 대사가 이렇게나 울림이 큰 대사였나, 이 장면이 이렇게나 슬픈 장면이었나, 이 조명이 이렇게나 의미 깊은 연출이었나, 하는 깨달음이 차곡차곡 모이는 기분. 같은 대사와 같은 연출, 같은 무대, 심지어 같은 배우로 관람하더라도 점점 감정의 깊이가 깊어져 눈물을 보이고야말 때. 이런 작품의 경우, 보통은 첫 관람 때 ‘이게 무슨 내용이지?’하며 어리둥절한 채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두 번째 관람부터 조금씩 대사와 장면이 읽힌다. 그리고 볼수록 새로워진다.


볼수록 새로운 공연 중 하나가 바로 연극 ‘엘리펀트 송’이다. 놀라운 점은, 이 작품에는 첫 관람 때부터 사로잡혔다는 점이다. 공연에 점점 흥미를 잃어가던 중 만났던 작품이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좋다!’고 외치며 나왔던 기억이 있다. 90분 내내 무대를 꽉 채우는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진실과 눈물. 커다란 이야기를 정제하고 또 정제해 정수만 남겨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공연, 연극 ‘엘리펀트 송’이다.

 


시놉시스


"진실은 곧 알게 될 거예요."


캐나다 브로크빌의 한 병원.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두고 의사 로렌스가 돌연 사라져버린다. 유일한 단서는 그가 마지막으로 만난 환자 마이클의 증언뿐. 병원장 그린버그는 행방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마이클을 찾아오지만, 마이클은 수간호사 피터슨을 경계하며 알 수 없는 코끼리 얘기만 늘어놓는데...


치밀하게 엇갈리는 세 사람의 대화가 가리키는 진실은 대체 무엇일까.

 



코끼리에 대해서 아세요?



이 극에는 총 세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코끼리(인형)가 등장한다. 미스터리한 환자 마이클, 병원장 그린버그, 수간호사 피터슨, 그리고 우리의 귀여운 코끼리 안소니까지. 안소니는 이번 시즌에 들어서는 캐스팅 보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고도의 성장을 보여 준 배우(?)다. 마이클 배역에 맞게 안소니 역도 세 마리의 배우가 돌아가며 연기를 한다. 발바닥에 각기 다른 무늬가 새겨져 있어 안소니의 발바닥을 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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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반까지 마냥 귀엽던 안소니는 결말로 갈수록 점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극이 끝난 후에 로비에 진열되어 있는 코끼리 인형들을 보면 또 다시 눈물이 차오를 정도다.


그런데 왜 하필 코끼리일까. 곰 인형, 강아지 인형, 고양이 인형 등 보편적인 봉제인형들은 거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의 동물들이다. 하지만 코끼리 인형은 그다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동글동글하지도 않다(물론 안소니는 귀엽다.). 왜 하필 코끼리일까.


“코끼리는 엄마 뱃속에서 22개월이나 지내요. 상상이 가요? 엄마 뱃속에서 22개월. 진짜 부럽다.”


극 초반, 로렌스의 행방을 묻는 그린버그에게 마이클은 코끼리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임신 기간이 22개월이나 된다는 말부터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말까지. 따지고 보면 모든 대사가 복선이지만 그린버그는 그 뜻을 알 턱이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마이클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어를 코끼리로 위장했을 뿐, 결국은 마이클 자신의 이야기다. 사랑 받고 싶다는 욕구, 나를 위해 울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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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두 분이 아이를 갖게 되면요, 그 아이를 1분 1초도 놓치지 말고 사랑해주세요.



마이클이 바랐던 것은 그저 사랑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아이들은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을 양분으로 자란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받아야 한다. 사랑의 선행 조건은 사랑이다.


하지만 어린 마이클에게는 사랑이 부재했다. 공허한 관계들로 유년기를 채운 마이클은 사랑받는 법을 몰랐다. 그러니 마이클이 주위 사람들과 안소니에게 퍼붓는 사랑이 마음 아플 수밖에 없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누군가의 언어를 훔치듯 이야기한다. ‘사랑해’ 혹은 ‘사랑했어’가 아닌 ‘사랑한대’라는 인용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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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감정에 ‘진정한’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웃음이 아니라 울음으로 표현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기쁜 일에 같이 웃어주는 것보다 슬픈 일에 같이 울어주는 게 참된 사랑이라는 말. 유년기, 자신 앞에서 길게 울며 죽어간 코끼리를 보고 마이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코끼리가 눈물 흘릴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죽은 코끼리를 생각하며 눈물을 떨구는 다른 코끼리들이 생각났을 터다. 그리고 내 죽음에 울어줄 코끼리 한 마리만 있다면 평생을 아름답게 봉합하리라, 다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연극 ‘엘리펀트 송’에서 표현하는 사랑은 독 그 자체다.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연극이 끝난 후 머릿속에 가장 강하게 남는 대사는 딱 한 줄이었다.


"안소니가 사랑한대."


마이클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 안착하길 바라며.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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