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신이 오리의 이름을 지을 땐 어땠을까? 이랑의 이야기 책, 오리 이름 정하기 [도서]

글 입력 2019.12.0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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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내내, 주말이 되면 도서관에 가곤 했다.

 

익숙한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도서관으로, 친한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도착해 열람실을 휘젓고 다니다가 배고파질 즈음이 되면 800원에 팔던 육개장 컵라면을 먹고 오는 과정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그때 우리가 도서관에 갔던 이유는 판타지 소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유치하고, 초등학생인 나의 정서에는 매우 좋지 않은, 자극적이기만 한 양산형 판타지 소설들도 많았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그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까지 그 어디서도 읽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령, 몬스터라는 존재, 차원 이동 등의 판타지 클리셰들이 그때의 나에게는 매우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와 소설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이후 조금 더 다양한 책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어떤 책이 나에게 더 좋고 더 맞는 책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극적인 양산형 판타지 소설과는 멀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새로운 이야기, 접하지 않은 이야기를 보면 처음 판타지 소설을 읽어내려 가며 묘한 흥분감에 휩싸이던 그때처럼 기뻐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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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의 『오리 이름 정하기』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의 기쁨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켜 준 책이다. 이랑은 영화감독이자 음악가, 에세이스트, 만화가, 선생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예술인이다.

 

이랑이 만들어 내는 예술을 안에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리 이름 정하기』도 그렇다. 이 책을 ‘이야기책’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책에 들어간 작품들은 각각 단편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고, 시나리오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작품들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건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새롭다. 누군가는 새롭다고 이야기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새롭다. 익숙한 배경으로 시작했다가도, 전혀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좀비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연인 두 명이 느긋하게 성관계를 하고 자신들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좀비와 싸우거나 자신의 집에서 상황이 바뀌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함께 좀비가 되기 위해 집을 나서기로 한다거나, 한없이 자비롭고 전지전능해야 할 신이 나쁜 상사처럼 권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색다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이외에, 현실을 바탕으로 유쾌하게 풀어나간 이야기들도 있다. 옆집 사람이 들고 간 자신의 택배를 찾기 위해 그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인물의 이야기도 있고, 성차별적인 제작사 대표에게 일갈을 날리는 인물의 이야기도 있다. 기존의 소설에서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인물들의 통쾌한 행동들에 대해서 읽어 내려가면서 이따금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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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야기가 색다롭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까지의 ‘이야기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이야기가 비약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재미있음' 때문에 이런 생각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처럼 문법에 따르지 않은 이야기 진행이 비약이 아니라 이야기의 자유로움이라고 느껴질 수 있게 하는 힘이 이랑의 『오리 이름 정하기』 속 이야기에 있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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