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가 이야기하는 역사에 소수자의 역사도 있을까? [공연예술]

글 입력 2019.11.07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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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1980년 영국 학교의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준비 반 8명의 학생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헥터와 어윈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헥터는 학생들에게 ‘일반교양’을 가르치는데, 학생들과 시에 대해 토론하고 영화의 장면을 재현하는 등 수업의 주제도 방식도 자유롭다. 앎을 이끌어 내 지식을 전달하고, 문학을 심장으로 느끼는 법과 그것을 ‘인생의 해독제’로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야말로 시험이 아닌 인생, 삶을 위한 교육을 하는 ‘이상적인’ 교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어윈은 오로지 대학 합격을 위한 교육을 한다. “뻔한 답안은 점수를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어떻게 하면 대학 관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답을 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를 뒤집어 ‘흥미로운 이야기’로 재창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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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정반대인 두 교사가 공동 수업을 하게 된다. 수업 중, 홀로코스트를 시험 문제에 나올 만한 ‘쓸모 있는 지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생긴다.

 

수업에는 유대인인 포스너가 있지만 어윈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거리를 두고 보라고 말한다. 또 ‘히틀러가 정신 나간 미친놈이 아니라 지도자였다면?’과 같은 질문들에 ‘좋은 지적’이라고 답한다. 헥터는 그것을 ‘좋은 지적’이라 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건이 언어로 축소되고,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의미를 손상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자꾸 ‘좋은 지적’이라고 그러시는데요. 좋은 지적이 아닙니다. 선생님, 진실입니다. 선생님께는 홀로코스트가 시험에 나올 법한 토픽일 뿐이겠지만요.” - 스크립스

 


쓸모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그것은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이며 진실이다. 역사가 반복될 때, 그것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진실을 봐야 한다. 헥터는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넘겨주려’ 한다. 여기까지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선과 악의 대립이다. 전인교육을 하는 헥터는 선, 입시교육을 하는 어윈은 악. 하지만 <히스토리 보이즈>는 이 인물들의 모순성을 그린다.

 

헥터는 ‘달리는 오토바이’라는 강제적 공간에서 학생들의 성기를 만지는 성추행범이다. 어윈은 학력을 위조하기도 하고, 학생들에게는 모든 지식을 시험과 합격에 사용하라고 가르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지만, 학생들은 이 교육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는 긍정적 영향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히스토리 보이즈>는 인물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도록 묘사하며 인간의 모순과 불안에 대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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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들의 모순과 불안에 크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나에게 헥터는 그냥 성추행범이었고, 학생들은 ‘영국에서 교육을 받는 남자’로서의 힘을 가진 권력자로 보였다.

 

극은 헥터가 오토바이를 타다 사망하고 “넘겨줘라. 때로는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학생들에게 책을 넘겨주며 끝난다. 학생들은 헥터를 좋은 선생님으로 추억하며, 서로에게 그 책을 전달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소수자였다면 그들이 당한 성추행을 묻고 헥터를 좋은 선생님으로 추억하며 그의 교육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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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보이즈>의 한 배우는 토크쇼에서 학생들은 헥터와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라고 말한다. 헥터가 성기를 만지는 대신, 헥터의 수업에서는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자유롭게 웃고 떠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래는 동등한 권력을 가졌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인종, 성별, 지적 수준으로 봤을 때 이미 사회적 권력 구도에서 우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거 아닌가 싶다.’라는 의문이 들 때 ‘그런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프루스트 같은 천재 소설가가 될지도 모르지.’라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교장이 여성인 비서를 성추행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비서를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아니라 헥터를 학교로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교장을 협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자신들이 겪은 상처도 그렇게 덮을 수 있는 권력이 있는데 포스너의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특성과 린톳의 성별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하자는 어윈의 말에 포스너는 유대인으로서의 상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다. 린톳 선생님도 모의 면접에서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남자들의 무능력에 주석을 다는 일이야. 역사는 양동이를 들고 남자들 뒤를 쫓아가면서 청소해주는 여자들인 거라고”라면서 여성으로서 역사 속에서 지워져왔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린톳은 교사이기 전에 여성이기에 그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학생들은 린톳이 등을 보일 때마다 조롱하는 표정을 지으며 무시한다.

 

헥터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고통에는 그토록 예의를 차리면서 본인이 하는 행동은 학생들에게 고통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히스토리 보이즈>라는 극 자체도 그 고통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가볍게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며, 아름답게 마무리된다.

 

헥터의 “왜 그냥 그 수용소들이 전무후무한 비극이었다고 비난하면 안 됩니까?”라는 말도 더 깊이 생각해보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인의 입장에서 ‘전무후무한’ 비극이었다. 유럽의 식민 지배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정말 ‘전무후무’했을까 의문이 든다. <히스토리 보이즈>가 이야기하는 역사에 여성, 유색 인종 등 소수자의 역사는 포함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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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모순적이고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에 헥터의 성추행이 조금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헥터는 성추행범이지만 교육적으로 봤을 땐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아름답게 추모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추행 또한 명백한 사건이며 진실이다. ‘좋은 면도 있었어.’라고 말하는 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거리를 두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헥터가 ‘넘겨줘라’고 이야기해봤자 무엇을 느낄 수 있겠는가. 또 학생들이 젠더 권력, 인종 권력으로 성추행이라는 사건을 ‘장난’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을 보며 ‘미투 운동’이 현재 진행 중인 지금,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고 있는 나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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