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치유와 구원의 글쓰기
글 입력 2019.11.02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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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중 유일하게 봄을 좋아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에 떨다가도 봄을 떠올리면 버틸 힘이 생겼습니다. 얼어붙은 땅이 녹으면 풀냄새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 냄새가 살갗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을 잊게 했습니다. 풍성해진 나뭇잎과 만개하는 꽃잎 사이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을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걸음을 자주 멈추며 봄날의 풍경을 눈에 담았습니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계절처럼 한 사람만을 좋아했습니다.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보다도 다정했습니다. 꽃을 보려고 멈추듯이 그를 보기 위해 걸음을 자주 멈췄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었던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봄날, 우리는 이별했습니다.

 

그해 봄은 산송장처럼 지냈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희망 없는 날들을 보냈습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일이 벅찼습니다. 저는 그대로 멈춰 있지만, 세상은 개의치 않고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따뜻한 봄바람이 매우 성가셨고 철없이 만개하는 꽃이 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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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럴 때면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싶었습니다. 영영 지워버린다면 아프지 않을 테니까요. 여전히 여기에서 살아 있다고 절박하게 외쳐도 목소리는 닿지 않았습니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존재의 부재를 견뎌야 했습니다.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삶의 뻔뻔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앞에서 온몸으로 저항해야만 했습니다. 어렴풋한 실루엣을 다시금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냈고,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잡고서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놓아버린다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봄이 지나가고 어느덧 겨울이 왔습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공원의 조각들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였습니다. 단 한 줌의 감정도 제 안에 남아있지 않는 날이 올까요. 언젠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칠 수 있을까요. 그날의 나는 조금은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말투로 말하고 있지 않을까요.

 

겨울이 찾아오자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눈, 코, 입 중에 어떤 것도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굶주린 채 누군가를 찾아 헤매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내왔습니다. 저는 대체 누구를 찾았던 걸까요.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몽유병자처럼 무의식적으로 써내려 갔다. 작품을 통해 폭풍우처럼 격렬한 격정에서 구제되었고, 일생일대의 고해를 하고 난 후처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실패를 견디지 못했던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집필했던 것처럼. 그건 갑작스럽게 끝난 사랑의 매듭을 짓기 위한 일종의 제의였습니다. 일생일대의 고해를 하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괴테처럼 격렬한 격정에서 구제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글쓰기가 갖는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베르테르’라는 인물을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여 자아를 투영하거나, 의식의 흐름대로 모든 감정을 쏟아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빈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일기장을 가득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쓰는 일만으로 쉽사리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정처 없이 주변을 맴돌다가 문장의 숲을 찾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달래기 위한 문장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는 문장을 모으고 또 모았습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이해받았다는 기쁨과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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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이젠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 『몸의 일기』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주인공은 열두 살 때 보이스카우트 활동 중 숲에 홀로 남겨져 극한의 공포를 체험한 다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자기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첫 일기의 첫 문장은 “이제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였습니다.

 

저 또한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적었습니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라고.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고, 삶의 허전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으로는 감정 기복, 심각한 두려움들, 몸이 느끼고 반응하는 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사랑과 깊은 우울을 활자 안에 녹여내는 일을 성실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해의 순간이었던 글쓰기가 차츰 애정의 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훔치고 싶은 문장을 잊어버리기 위해 애쓰기도 했고, 인물의 교묘한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소설을 읽으면서 사고의 흐름을 하나씩 뜯어보았습니다. 솔직하게 쓰는 일에 용기를 얻으면서도 나를 드러내는 두려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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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트인사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삶의 글쓰기를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바꿔 놓은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4개월간의 활동을 통해 글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지 않으면 삶이 완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내면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덩어리를 정제하여 꺼내 놓는 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여지도록 만드는 일, 조금은 느린 속도로 어른이 되게끔 하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조금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우고 싶을 만큼 아픈 기억도 나의 일부이며, 나를 소진해야 하는 글쓰기에 가장 필요한 재료이기도 하기에.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썼던 사적인 글부터 많은 독자에게 읽혀도 무방한 책임감 있는 글까지. 마음껏 읽고, 마음껏 쓰는 일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날을 위해 오늘도 주문을 외우듯 반복해서 적어봅니다.

 

“이젠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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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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