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Culture letter 06. 아름다워서 더욱 슬픈 이야기, 아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feat.가버나움)
글 입력 2019.10.20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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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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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하면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 ‘아이’는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고, 미디어 속에서만 만나는 것이 즐겁다는 다소 독특한 지론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아이들의 그 활발한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많은 곳은 학습된 방어기제로 피해버리고 공공 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다. 그런 나를 보며 우리 엄마는 늘 말한다. 왜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 너도 다 저런 적이 있었다, 조금만 곱게 마음을 써라. 뭐 그런 이야기들이다.

 

매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아이들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싫어했던 건 아이들이 아니라 그들과의 공존으로 인해 내가 겪어야 하는 약간의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미술관에서 뛰어다니고, 기차와 버스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고, 식당이 떠나갈 듯 울어 대는 ‘특정 아이들’로 인해 겪었던 불편함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아이들에게 나도 모르게 ‘성인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이에게 ‘아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지 않고 그저, 성인이 되지 못한 미성숙한 개체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이들에 대한 영화를 글로 써보자고 마음먹었던 건 지난 여름의 일이다. 독립 영화를 접하고 여러 작품을 보기 시작하면서 ‘여성’ 외에 나의 시선을 끈 사회적 정체성이 바로 ‘아이’였다. 우리 사회는 과연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마음은 여전히 철이 없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성인’이라는 구성원으로서 나는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 그런 궁금증이 일었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인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나는 ‘아이들’에 대해 그리 진지하게 고민해보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당면한 ‘청년’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하는데만 집중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아이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밖에 취할 수 없고, 그저 막연하게나마 이들이 매서운 현실의 벽에 내던져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만을 취할 뿐이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투명하고 연약한 지, 건강하지 못한 사회적 환경에서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주는 영화이다. 한국의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는 아직 내 안에서도 정리되지 않았기에 그저, 조금 멀지만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공유한 외국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슬픈 이야기에 슬픔을 더하는 아름다운 색감으로 가득 찬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환상으로 얼룩진 슬픈 현실 - <플로리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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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이 영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색감이 예쁘기로 정평이 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미국의 빈부격차, 그로 인해 벌어지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예쁜 색감과 잔잔한 감동’만’을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예상과는 다른 내용에 불편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효과는 바로 그 불편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마주할 때에만 불편해지니까.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인식해야 문제를 인식하고 나아갈 수 있으니까.

 

연 보랏빛이 쨍하게 감도는 건물이 있다.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 건너편에 위치한 ‘매직 캐슬’ 모텔이다. 마법성이라는 이름, 예쁜 색으로 칠해진 건물의 외관과는 다르게 이 모텔은 미국에 흔하디 흔한 싸구려 모텔이다. 그리고 이 모텔에는 22살 어린 엄마 ‘헤일리’와 그녀의 딸 6살 ‘무니’가 함께 살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다. 잔뜩 신난 무니와 친구들이 매직 캐슬의 건너 편 퓨쳐랜드 모텔로 달려나간다. 아이들이 신이 난 이유는 퓨쳐랜드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신나게 달려 간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아니, 새 차에 침을 뱉기 위해서! 조용히 계단을 올라간 아이들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차를 향해 침 멀리 뱉기 내기를 시작한다. 차를 향해 침을 뱉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아이들의 웃음 소리도 커져간다. 이 장면을 처음 본 사람들은 아마 당황스러울 것이다. ‘범죄’를 미화한 장난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은 어느 집 아이들인가’하는 의문도 들 것이다. 그 철없는 해맑음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지만 너무나 즐거워하는 표정엔 약간 어이가 없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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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이런 장면들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아이들은 하루하루 장난과 범죄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드는 ‘놀이’를 하고, 아이들의 부모는 이를 모르거나, 방관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저소득층이다. 무니의 엄마 헤일리는 전직 스트리퍼 출신으로 온몸에 문신이 가득하고 술, 담배, 마약을 일삼는다. 무니의 친구 스쿠디의 엄마 애슐리는 레스토랑에서 성실히 일하지만, 매일 매일을 살아 내기도 벅차다.

 

영화 속에서 자세히 묘사되진 않지만, 다른 아이들의 부모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사회의 저소득 계층으로 내려갈수록 아이들은 각종 범죄에 너무나 쉽게 노출된다. 매직 캐슬에 사는 아이들 주변에는 각종 욕설과, 폭력, 약물과 범죄가 만연하다. 아이들은 한없이 투명해서 해맑게 이것들을 받아들인다. 방화와 재물 손괴, 영업 방해 같은 일들이 아이들의 티없는 웃음 아래 ‘놀이’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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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주로 이런 모습이다. 웃기게도 아이들의 웃음은 너무 해맑고 예쁘고, 이를 보여주는 방식 자체도 색감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은 즐겁지만 마음은 불편한 모순 잔치가 이어진다. 이 찝찝한 평행선을 계속 따라 가다 보면, 도대체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냐는 의문이 든다. 그 의문에 답을 주는 대표적인 인물은 무니의 엄마 ‘헤일리’와 매직 캐슬의 매니저 ‘바비’다. 먼저 매니저 바비는 이 영화에서 그나마, 가장 ‘평범한’ 인물이다. 모텔의 총 관리자인 바비는 비록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그나마 가장 온화하게 바라보는 어른이다.

 

아이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호통을 치고 으름장을 놓지만 츤데레도 이런 츤데레가 없다. 여자 아이들에게 흑심을 품은 성인 남자를 끌어내 다그치고, 무니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 보호자 헤일리를 호되게 나무라고, 밀린 방값을 눈감아주고, 그래도 마음은 착한 아이들이라며 아이들을 감싼다. 양육권에 대한 존중이 관대한 미국의 문화를 감안하더라도, 바비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한 배려를 내보인다. 직접적인 행동을 할 수 없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채 최소한의 배려를 내보이는 바비의 모습은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성인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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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헤일리는 무니의 직접적인 보호자지만, 여러 면에서 사회적인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미성숙한 엄마로 묘사된다. 그녀는 변변한 직업이 없으며 노상에서 향수를 판 돈으로, 자신의 성을 판 돈으로, 성 매수자의 물건을 훔쳐 되판 돈으로 무니와 자신의 생활에 드는 비용을 충당한다. 아이가 사고를 쳐도 아이를 엄히 꾸짖지도 않는다. 무니가 있는 방 안에서 성매매를 하는 헤일리의 모습엔, 그냥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일리가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그 점이 가장 문제이긴 하지만) 무니는 엄마와 함께 있을 때면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는다. 그 해맑은 웃음 때문에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상당히 마음 아팠다.

 

헤일리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어릴 때 철없이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책임은 지고 있지만 그녀가 무니를 키우는 환경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모두가 동의할 사실이다. 헤일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동국이 그녀의 아이를 데려가려 할 때에도 어린 엄마는 큰 저항을 할 수 없다. 바비는 그런 모녀를 보며 그저 한숨을 내쉰다. 무니는 그저 자신에게 찾아온 생이별이 아득하기만 하다. 잠시 다른 집에 가 있다가 돌아온다는 아동국 직원의 말을 아무 의심없이 믿던 무니는, 점차 이상한 기미를 감지하고 엄마와 영원히 헤어질 수 있다는 직감을 하자마자 매직 캐슬을 박차고 도망간다. 아이가 울면서 달려간 곳은 단짝 친구 ‘젠시’가 사는 퓨처랜드 모텔. (젠시는 첫 장면에서 아이들의 침을 뱉었던 차주의 손녀이다). 자신 앞에 선 젠시에게 무니는 울먹거리며 이야기한다.

 

“제발…. 너는 내 단짝친구인데

다시는 너를 못 볼 수도 있어… 말을 못 하겠어…”

 

젠시는 가만히 그런 무니를 보다가 무니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뛰어간다. 그들이 뛰어가는 곳은 영화 속에서 지척에 있지만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곳, ‘디즈니 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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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디즈니 월드를 향해 뛰어가는 이 결말은 영화에서 가장 격정적인 장면이다. 사실 ‘디즈니월드 옆 매직캐슬 모텔’이라는 플롯의 설정은 이 결말을 위한 큰 그림이었다. 디즈니 월드는 모든 아이들이 꿈꾸는 ‘꿈과 환상의 나라’,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지만 무니에게 디즈니 월드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화려하고 꿈 같은 동화 속 나라 옆에서 무니는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기에, 디즈니의 존재를 인식하는 건 아이들에겐 오히려 큰 비극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한번도, 언급조차 된 적 없던 꿈과 환상의 나라 ‘디즈니 월드’에 무니는 발을 디뎠다. 자신이 맞은 가장 극한의 순간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 아이들이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션 베이커 감독이 아이폰으로 직접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아이들과의 거리는 한껏 가까워졌고 화면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이 아이들은, 누군가에게 맹렬하게 쫓기는 듯하다. 과연 아이들은 무언가로부터 도망가고 있는 것일까?

 

디즈니 월드 속 모두가 행복하게 웃는다. 아이를 품에 앉은 아빠,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 단란한 가족들이 한껏 들어찬 그 곳에 사회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아이들이 들어선다. 꿈과 환상을 말하지만 사실은 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기업인 디즈니가 만든 ‘가짜’ 세계를,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로 인해 극한에 몰린 아이들이 도피처로 택하는 사실은 다분히 모순적이다. 이 디즈니 월드에서 아이들은 아무런 꿈과 환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니는 어찌하든, 단짝인 스쿠디와 젠시와 헤어 져야 하며, 사랑하는 엄마와는 영영 헤어져야 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철없는 어린 엄마는 그저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무니의 엄마로서 헤일리는 많이 미숙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 어린 나이에 한 생명을 책임지게 된, 사회에서 외면 받는 어린 22살의 미혼모일 뿐이다. 무작정 그녀를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몰아갈 생각은 없지만, 헤일리가 온전히 스스로의 잘못만으로 무니를 그 환경에 방치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여지가 다분하다. 홈리스와 다름없는 22살의 여자 혼자 어떻게 6살 아이를 ‘잘’ 기를 수 있을 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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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월드 옆에 살면서, 지독한 현실에 아무런 방어막 없이 노출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방관하는 어른들, 아름다운 플로리다의 하늘, 연 보랓빛 매직 캐슬의 풍경,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 소리. 영화를 채우는 건, 아름다운 영상미와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사회를 향한 비판이다. 결말이 전혀 희망적이지 않은 것 역시 감독이 관객들에게 던지는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지적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 홀려,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의 아름다운 색감은 그저 사회가 마주한 지독한 현실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기 위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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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을 쓰면서 ‘함께 소개 해야지’ 생각했던 영화가 있다. 올해 초 국내에 개봉했던 영화 <가버나움>이다. 아들이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를 고소한다는 다소 극적인 설정의 이 영화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 발자국 떨어져 잔잔하면서도 사실적으로 조명한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다르게 주인공 자인의 시선을 듬뿍 담아낸다. 가난한 국가, 가난한 가정, 무책임한 부모 밑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고통받는지를 12살 자인의 시선으로 비춘다. 아무런 필터링도 없이, 거리낌도 없이, 영화는 비정상적인 사회 속 가장 약자인 아이들이 어떻게 파괴되어가는지 보여준다.

 

그나마 주인공 자인은 현실에 당차게 저항하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자인이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에선 일부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 아이를 둘러싼 참담한 현실엔 푹- 한숨만 나올 뿐이다. 영화 속 내내 해맑은 웃음을 흘리던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와 달리, <가버나움>의 자인은 딱 한 번,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꿈’이라는 걸 꾸게 된 엔딩 장면에서 어색하게 씨익- 웃는다. 분노와 아픔으로 이루어진 영화지만, 이 영화 역시 영상미가 좋은 작품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함께 처음 이 작품을 소개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서 출발했다. 더할 나위 없는 사실적인 리얼리즘 작품이라는 점도 두 영화를 묶어주는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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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가버나움>으로 글을 끝마치지 못한 점은 두 영화를 풀어 쓰는 일이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이 두 작품을 이어서 본다면, 한동안은 기분이 많이 울적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두 편의 작품을 보면 그저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나는 앞서 아이들을 싫어한다 이야기했다. 여전히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진 않는다. 그들을 좋아하고, 마냥 사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다만, 한 가지 나에게 남은 건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일종의 막연한 책임감이다. 아이들은 연약하다. 이들에겐 스스로를 꼿꼿하게 지탱하고 일어서 세상을 마주할 힘이 아직 부족하다. 이들이 충분히 자라고 성장할 때까지 사회는 그들을 품어낼 의무가 있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들이대는 ‘성인의 잣대’를 내려놓아야겠다, 조용히 되뇐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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