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가와 공예가, 그 구분을 허물다 :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 [시각예술]

바우하우스, 현대 디자인의 모태라고 회자된다
글 입력 2019.10.0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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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전시가 풍년이다. 1년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기획들을 이맘때 배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주는 미술주간으로, 각종 사립 국립 미술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입장료 할인이 진행된다. 이러니 문화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을은 가장 사랑스러운 계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처럼 삼청동에서 전시 투어를 하면서 보고, 듣고, 새겼던 것들을 조금씩 풀어놓으려 한다.




20세기, 독일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현대 디자인의 모태라고 회자된다. 금호미술관에 큼지막하게 붙은 ‘BAUHAUS’라는 글씨에 무작정 미술관의 문을 열었다. 디자인의 역사나 20세기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언제나 마주치는 이름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바우하우스’에 아는 것은 없다. 익숙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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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 당시의 시대 흐름을 알아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부터 4년간 진행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7년간 진행되었다. 이 당시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은 피폐했고, 허무함과 공허감이 만연했다. 사람들이 찬양했던 기술과 지식, 그리고 이성의 끝은 살인이었고, 그로 인해 예술 자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정신과 혁명적인 미술 경향이 등장한다.


그리하여 미술에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불합리한 것, 허무 등을 표방하는 경향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다이즘이다. 다다이즘도 매우 매력적인 부분이나, 지금 그 부분은 차치하고, 바우하우스가 있었던 독일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19세기 말의 독일은 선진산업 국가인 영국을 뒤따라가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은 자신들이 산업 강국이기를 원했고 예술 문화 수준도 높이고자 하였다. 대량생산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물건의 질도 중요했지만, 그것이 가진 형태 또한 중요했다. 그래서 공장으로 예술가들을 끌어들였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결성된 것이 ‘독일공작연맹’이었다.


당시 디자인은 지금 우리가 규정하는 기준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분야는 아니었으며, 소수의 엘리트들만 향유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부 돈 많은 부르주아들이 즐기는 것으로 전락되고 마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에 독일공작연맹은 미술과 공업, 수공예과 상업을 잘 결합시킨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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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Gropius




바우하우스 바이마르



이러한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서구식 산업사회에 시작된 초창기 미술학교가 바로 바우하우스다.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바우하우스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던 20세기 그 한 가운데에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지향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독일 바이마르에서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약 14년동안 예술 교육 기관으로 많은 디자이너들을 배출했다. 1925년에 바우하우스 바이마르가 폐쇄되고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 바우하우스를 유치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바우하우스 데사우와 바우하우스 베를린이 그것이다. 바우하우스 데사우는 1931년까지 바우하우스 베를린은 1933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로피우스가 작성한 선언문에는 이러한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의 장벽을 이루는 계급의 구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길드를 조직’하자는 것이 바우하우스의 선언문 내용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시대가 요청하는 진정한 미술은 현실적 기능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더 나아가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조형 분야의 상호 공조를 도모하는 종합예술을 주장했다.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미적 형식들을 만들어냈다. 장식적인 요소를 줄이고, 기능을 강조함으로 새로운 미적 형식을 이끌었다.





바우하우스 디자인



전시장의 2층과 3층에서 바우하우스 디자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 중 반가웠던 것은 요즘에는 ‘락앤락’ 통이라고 불리우는 저장용기와 이케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양의 탁상 조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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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용기는 빌헬름 바겐펠트Wihelm Wagenfeld의 디자인으로 그는 독일공작연맹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바우하우스 바이마르의 금속 공방에 있었다. 1938년에 제작된 유리 용기는 저장이 용이하고 저장 용도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가능했다. 우리가 락앤락 용기라고 부르는 것의 초기 디자인을 보고 있자니,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든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그 용기들이 겪어오고 담아왔던 이야기들을 비밀스럽게 들려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빌헬름 바겐펠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디자인이 바로 바우하우스가 추구하는 모범적인 사례들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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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 디자인이야말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반가워한다고 한다. 내 방 침대 옆에 있는 녀석이랑 아주 판박이기도 하다. 이 탁상 조명을 디자인한 사람은 크리스찬 델Christian Dell이다. 그 당시만 해도 탁상 조명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많이 고민했던 그는 지금의 탁상 조명을 디자인하게 되고, 현재는 거의 대부분의 책상에 조명 하나씩은 두고 있을 정도로 상용화가 되었다. 이 조명 디자인이 특별히 더 반가운 것은, 이케아에서 이 디자인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찬 델 역시 바우하우스 바이마르의 금속 공방의 기술 마이스터로 근무했으며, 그의 작업들은 바우하우스 금속 공방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전시장에서는 이 외에도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아돌프 마이어Adolf Meyer, 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페터 켈러Peter Keler 등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에서는 바우하우스 디자인 이외에 20세기의 디자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건축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서 만날 수 있다. 르코르뷔지에나 그로피우스의 건축물들은 지금 보아도 매우 실험적이다. 이 전시장의 아카이브를 통해, 그 당시의 디자인이 단순히 바우하우스만의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디자인 흐름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효율적인 가사 노동을 위한 주방과 일상적인 가정의 삶이 영위되는 주택 건축 등 생활 공간에 대한 금호미술관의 탐구는 지속적이고 독자적인 리서치와 수집 과정을 통해 400여 점의 디자인 컬렉션으로 이어졌다. 유럽의 모던 빈티지 디자인뿐만 아니라 국내 디자이너와 건축가를 소개하는 전시를 통해 금호미술관은 계속해서 예술의 범주와 전시 영역을 확장시켜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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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바우하우스



물론 바우하우스 내에서도 분란이 많았다. 미술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기계와 예술의 융합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모두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그 당시 훌륭한 예술가 중에 바우하우스의 선생이 아닌 사람도 있었다.


또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이 강조되다보니, 그 시대에는 그와 같은 이념을 표방한 교육 기관이 바우하우스 하나뿐이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앞선 글에서 계속해서 말해왔듯, 그것은 20세기의 전반적인 분위기 같은 것이었다. 바우하우스는 그 흐름 속에 있었던 학교 중 하나였을 뿐이다. 꼭 독일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독일에 그로피우스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 유명한 ‘르코르뷔지에’가 있었듯이, 다양한 나라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저마다의 흐름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많은 교육 기관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의 디자인과 그들의 활동이 아직까지 회자되며, 다른 학교들보다 유난히 바우하우스가 특별하게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학교에 비해 바우하우스가 가진 장점이 지금도 참고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혹자는 이야기한다. 아직도 바우하우스가 회자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예전에서 방법을 찾아야할 만큼 지금이 부족하다는 반증은 아닐까 하고.


역사는 승자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고 했던가. 혹자는 중세가 암흑기라고 이야기하지만, 혹자는 그것이 르네상스적인 사고와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우하우스도 마찬가지다. 바우하우스는 결코 ‘신화’같은 것이 아니며, 그렇게 인지되어서도 안된다.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필요로 했던 부분이 수용된 결과일 뿐이다.


추가로 바우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궁금하다면, 지금 상영 중인 <바우하우스Bauhaus Spirit>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추천한다. 당신이 어떤 이유로든 바우하우스에 관심이 생겼다면, 다큐멘터리는 그 관심의 폭을 더 넓혀줄 것이다. 영상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바우하우스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을 제시할 것이다.



[100 YEARS OF BAUHAUS] 디자인 혁명의 아이콘 심플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시작 인류 첫 창조 학교 ‘바우하우스’의 100년 발자취! [BAUHAUS NOWHAUS] 예술과 기술의 조화, 자유로운 상상력, 배움의 즐거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바우하우스의 움직임은 현재진행형이다!


- <바우하우스>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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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은 현대 디자인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다양한 전시회를 개최해왔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바우하우스 디자이너들의 작업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유럽과 미국의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가구들 또한 만나볼 수 있다.


만일 바우하우스 디자인에 대해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면,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처럼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에 대해 정보가 부족한 상태라면, 도슨트를 듣거나 전시연계프로그램을 신청하는 것을 추천한다. 전시 리플렛에는 바우하우스 디자인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필자 또한 도슨트 선생님의 설명과 ‘바우하우스 이미지’에 대한 연계 강연을 들음으로써 전시를 좀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작업을 단편의 조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역사의 흐름과 맥락 속에서 왜 아직도 바우하우스 디자인이 회자되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을 본인에게 제공한다면, 그들의 작업물이 당신의 마음 속에 더욱 아름답게 각인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바우하우스와 현대생활Bauhaus and Modern Life> 전시는 내년 2월 2일까지 진행되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방문해보기를 바란다.



[장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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